역주행 신앙

제가 오래 전에 한 번 운전하다 역주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가본 길인데 약간 헷갈렸습니다. 무심코 좌회전을 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차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 역주행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급하게 핸들을 꺾고 그 길을 벗어났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입니다. 한 편으로는 길도 몰라 역주행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도로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대형사고의 지름길입니다.

인생에서 역주행은 과연 어떨까요? 물 흐르듯이 시류를 따라 사는 것은 지혜로운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예를들어, 회사에 들어가 회사 규칙을 따라 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학생은 학교 규칙을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시민 정신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힘들게 할 수 있는 좋지 못한 형태가 역주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역주행하는 사람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불공평하고 불의하고 죄악이 만연한 사회일 경우에는 역주행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군사독재 시절을 겪을 때, 수많은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역주행을 시도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와 법의 잣대로 보면, 역주행한 사람들은 다 죄인들입니다. 국가에 반역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거역하는 역주행을 시도했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민주 시민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골칫거리로 여겨졌습니다. 역주행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있기에 사회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그 뒤에 오는 세대가 좀 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럼 신앙은 어떨까요? 역주행하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인이 사회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중요한 권면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역주행 신앙이라 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이 바로 역주행 신앙입니다. 이 세대란 각 신자가 살고 있는 사회 전반을 가리킵니다. 각 세대마다 가치관이 있습니다. 각 사회가 가르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관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권면입니까? 또한 각 신자에게 이보다 더 큰 고민을 안져주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가치관을 본받지 말라는 것은 신자의 삶을 위태롭게 할 지도 모릅니다. ‘사서 고생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시류를 따라 살면 편할 것을 세대를 본받지 않고 역주행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니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은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신자로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역주행을 해야 하는 신앙 생활이 우리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물론 매일 역주행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역주행할 수 밖에 없는 삶이 우리를 찾아올 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과연 당신은 역주행 신앙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혹시 지금 역주행 신앙의 초대장을 받아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서로 격려하십시오

자녀가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로서 속상한 일입니다. 성격상 내성적이라 항상 기죽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밝은 아이인데 어떤 사건으로 인해 기가 팍 죽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속상하지만 부모로서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용기를 심어주는 일입니다. 어찌 자녀뿐이겠습니까? 남편이 회사일로 인해 기가 죽어 있는 경우 아내의 할 일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어떤 일로 인해 마음에 상처가 생겨 기가 죽어 있으면 남편은 당연히 용기를 심어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용기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좋지 못한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용기를 주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기를 팍팍 넣어주고 싶은데, 핀트가 안맞는 것입니다. 기껏 힘을 주는 말을 했는데, 적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더 기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기를 살리는 것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마음만 먹는다고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해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아픈 부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던지는 한 마디 말이 힘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적절한 말은 상대의 기를 살려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서로 격려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돌아본다는 것은 상대방을 관심 갖고 면밀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말입니다. 좋은 의사는 진찰할 때 정성을 다합니다. 혹시 놓치는 부분이 있는지 신경을 씁니다. 그래야 환자에게 바른 처방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서로 격려하기 위해 신자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흠을 찾아내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정죄와 비판을 목적으로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은 교회 공동체 전체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격려해야 할까요? 관심을 갖고 상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이제는 상대의 기죽은 마음을 살려줄 격려가 필요합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사랑과 선행’입니다. 사랑없는 선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선행없는 사랑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인적인 격려를 해야 합니다. 수박 겉핧기 식으로 격려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의미 없는 말 몇 마디로 격려했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전인적인 격려가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만나야 격려든 뭐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과 선행은 만남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습관에 빠지면 서로 격려하는 일은 불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서로 모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모임을 통해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개인주의 시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사는 교회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쓴다면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