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1/2020 사도행전6:7, “교회의 힘”

제목: “교회의 힘” (사도행전6:7)

몸이 약해지면 체력을 보강하듯이 교회도 약해지면 힘을 키워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 힘이 넘치는 모습일까요? 본문은 우리에게 명료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확산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라고 말합니다. 말씀의 확산이 빠르다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는 매우 안좋은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말씀의 확산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숨은 공로 두 가지가 있는데, 교회의 기도와 실천입니다. 사도행전4:29은 교회의 기도, 31절은 교회의 실천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상황이 코로나로 인해 힘들지라도 말씀의 확산을 위한 기도와 실천을 쉬면 안됩니다.

둘째, 제자의 수 증가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라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교회에 새로운 사람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손길과 더불어 교회가 제자 양육을 위해 힘을 쏟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28:19-20이 증거입니다.

셋째, 복종케 하는 능력입니다. 본문은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합니다. 누가 복종했느냐면, 제사장들입니다. 사도행전4:1-3을 보면 이들은 교회를 핍박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복음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축된 교회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교회는 복종케 하는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입니다.

결론으로 교회는 힘을 잃을 수 있지만 복음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오늘도 새로운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말씀, 제자, 복종의 능력으로 체력을 키워야 합니다.

05-10-2020 에베소서6:16, 영적 무기(4) “믿음의 방패”

제목:영적 무기(4) “믿음의 방패” (에베소서6:16)

오늘은 영적 무기 네번째인 “믿음의 방패’를 살펴보자. 믿음이 어떻게 영적인 무기인지, 이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마귀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지를 보자. 우선 믿음이 영적인 무기임을 잊지 말자. 믿음은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는 매우 강력한 무기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엡3:12,17;4:13에 보면 믿음의 대상이 분명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과연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믿음을 방패로 사용해야 한다. 무엇을 막아내는 방패인가?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이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불신앙’이다. 마귀는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불신앙이란 불화살을 무차별적으로 쏜다.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이스라엘, 신약의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공격을 받아 신앙적으로 상처를 크게 입었다. 불신앙의 뿌리는 무엇인가? 의심이다. 작은 의심일지라도 처리하지 않으면 불신앙으로 커진다(약1:6). 마지막으로 과연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 마귀의 불신앙이란 불화살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우리는 믿음을 키워야 한다. 제자들도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을 더해달라’고 했다. 히브리서는 11장에서 믿음의 선배들을 소개한 후 12:2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한다. 믿음은 성장해야 한다. 믿음을 키우지 않으면 마귀의 공격 앞에 무력하게 무너진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믿음을 키우는 중이다. 한시도 경계심을 풀지 말고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 영적으로 승리하는 길이다.

05-03-2020 엡6:15, 영적무기(3)“평화의 복음”

제목:영적 무기(3) “평화의 복음” (에베소서6:15)

영적 무기의 세 번째인 ‘평화의 복음’에 대해 바울은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합니다. ‘평안’은 ‘평화’입니다. 신을 신는 행위는 로마 군인이 신던 신발과 관련이 있습니다. 적과 맞서 후퇴하지 않고 버티는 의미와 앞으로 전진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복음’으로 무장해야 하는데, 이것이 무엇인지를 바울의 시각으로 에베소서 안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2:14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라”면서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이심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2:16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셨음을 밝힙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우리 사이의 평화를 이루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루셨던 평화입니다. 우리는 이 평화의 복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평화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듣고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지를 확인하고 이 복음이 주는 열매인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우리 사이의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무기와 혼연일체가 되는 길입니다. 그래야 적과 맞서 자유자재로 이 무기를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적인 마귀는 지금도 이 무기를 무력화시켜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건강의 복음, 성공의 복음, 자기 사랑의 복음, 물질 축복의 복음이란 왜곡된 것으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평화의 복음을 우리는 사수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질적이고 왜곡된 다른 복음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입니다.   

04-12-2020 고전15:3-4, “부활하신 예수님”

제목: 부활하신 예수님 (고전15:3-4)

부활주일인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는 기념한다. 기독교의 심장인 부활은 과학의 시대를 맞이하여 집중 공격을 받고 있다.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수호할 것인가?

우선, 부활은 이미 일어났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자. 사복음서는 부활의 역사적인 장면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물론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났지만 예수님만이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고 다시는 죽음을 겪지 않으셨다.

다음으로 “성경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기억하자. 본문은 두 번에 걸쳐 ‘성경대로’를 반복한다. 구약 성경인데 부활이 하나님의 작품임을 보여준다. 사람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사람의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로 부활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셨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이라 한다. 들었거나 수집했거나 심사숙고해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였다. 보물을 찾는 것과 선물을 받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선물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전하는 사람이 됨을 기억하자.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했다’고 한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곧바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파워이다. (나눔) 부활을 받아들이고 부활 신앙으로 지금 살고 있는지 서로 나눠보자.

04_05_2020 벧전2_24-25 “고난의 유익”

<오늘 설교 요약>제목: 고난의 유익 (벧전2:24-25)

종려주일인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베드로의 시각으로 기념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베드로는 그가 깨달은 것을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다. 우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역사적인 사실임을 명심하자. 기독교 신앙은 허구가 아닌 진실 위에 세워져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고”와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음”을 기억하자.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이 친히 겪으셨는데, 모두 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사실과 하나님의 뜻이 밝혀졌는데, 과연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는가? 믿는다면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끼치는 유익의 실체이다. 하나는 존재의 변화이다. ‘전에는 길을 잃은 양이었는데, 이제는 목자에게 돌아왔다.’ 우리가 뭔가 기여한 것이 없다. 그런데 존재가 바뀌었다. 다른 하나는 삶의 변화이다. 이것은 존재가 바뀐 후에 점차적으로 일어난다. 바뀐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이다. 죄와의 관계를 끊고, 의와의 관계를 살리는 삶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믿으면 이처럼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산다. 이것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매일의 삶에서, 평생에 걸쳐서 일어난다.  

“신앙의 문” (시편24편) – 4/7/2020

우리는 경쟁이 활발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과 경쟁하는 일은 달갑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경쟁에서 항상 승리할 수만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지만 언제 패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패배한 자로서 겪어야 할 아픔이 항상 같지는 않지만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혜택을 받은 것 같으면 우리는 매우 불편한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특권을 누리면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킵니다.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받는 일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우리가 어떤 기준을 통과한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과 경쟁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구원을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엡2:8)이라 말합니다. 구원을 경쟁에서 이긴 결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기만 합니다. 경쟁을 통해 구원을 얻으면 공평할텐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불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다니 불공평하다는 볼멘 목소리가 터져나옵니다. 하지만 은혜를 아는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얻은 구원을 너무도 귀하게 여깁니다. 공평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에 구원을 선물로라도 받을 수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로 얻은 구원의 감격을 아는 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다음이 무엇이냐란 질문 앞에 자신을 세웁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 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란 귀한 선물을 받은 이들을 향해 던지는 도전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시편 저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한 자”로 살아야 함을 촉구합니다. 은혜의 선물을 손에 쥐고 있을 뿐 아니라 은혜에 맞게 살아가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치열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그런 신앙인을 향해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들이 바로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 신앙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그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은혜의 선물로 그 문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답게 우리는 삶으로 증명해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서도 우리는 의연하게 신앙의 문에 들어선 사람임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신앙인다운 모습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는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03_01_2020 살후2_16-17 “양선의 열매”

제목: 양선의 열매 (살후2:16-17)

나쁜 뉴스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선을 행하면서 살고 있다. 성령의 역사로 선을 행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본문은 선하신 하나님과 우리의 선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본문16절은 사랑과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을 말하는데, 선하신 하나님의 진면목이다. 과연 하나님은 선하신가에 대해 성경은 초지일관 선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어둠이 전혀 없는 온전한 빛만 있으신 분이 선하신 하나님의 진짜 모습이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요8:44은 마귀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존재가 마귀이며 세상은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 악에 물들어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죄로부터 깨끗해질 수 있는 살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거룩한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성령으로 마음에 심겨진 우리는 선을 추구할 의무가 있다. 본문은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해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우리로 선을 행하도록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믿음은 행함을 배척하지 않는다. 믿음은 행함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선행을 위해 새로 지음받은 존재가 교회임을 잊지 말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을 행해야 한다. 선함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반영하는 중요한 행위이다. 선함이 교회 안에 가득해지도록 해야 한다.

02_23_2020 엡2_5-7 “자비의 열매”

제목: 자비의 열매 (엡2:5-7)

불우한 이웃을 돕는 행위는 자비에 속한다. 성령의 열매인 자비는 무엇이 다른가? 출발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태도이다. 본문 7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는 하나님의 자비가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났음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으로 나타났다. 우리가 이미 죽은 상태이기에 우리 힘으로는 절대 살아날 수가 없다. 이 죽음은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죽은 상태인 이유는 우리의 허물과 죄에 있다. 우리의 역할은 전혀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았는가? 그렇다해도 마음으로 받아들인 자와 머리로만 아는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머리로만 알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타인에게 나타내지 못한다. 받은 은혜를 주는 삶으로 증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간다. 삭게오는 자비하심을 체험한 사람의 변화를 극명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자비의 마음이 가득넘칠 수 있다. 또한 룻이 보아스로부터 받았던 친절은 자비의 본질을 드러낸다. 상대방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조건을 따지지 않고 도움을 주는 마음은 자비의 본질이다. 성령의 열매인 자비는 예수 안에서 가장 화려하게 드러난다. 예수와 함께 살아난 우리는 자비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02_16_2020 벧후 3_9 “인내의 열매”

제목: 인내의 열매 (벧후3:9)

사람은 인내하면서 살아간다. 성령의 열매로서 인내는 무엇이 다른가?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내는 심판과 멸망을 당장 실현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우리는 ‘멸망’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구약은 심판으로 인한 멸망을 말한다. 홍수 심판, 소돔과 고모라 멸망 등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하늘로부터 이 땅에 임했음을 바울은 로마 교회에 외쳤다. 심판과 멸망이 당장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인의 구원이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인내를 잘 보여준다. 요한복음3:17은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이유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임을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인내를 비웃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지금도 하나님을 비웃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인내를 불평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럼에도 신실한 신자들은 심판과 멸망을 실감하기에 하나님의 인내를 찬양하고 기뻐한다. 하나님의 인내를 우리 안에 가득채우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예수님을 소망해야 한다. 이유는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반드시 소유해야 한다. 믿음은 인내로서 신앙 생활하게 한다. 인내로서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있는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신앙의 인내는 우리로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게 한다.

02_09_2020 엡 2_14-18 “화평의 열매”

제목: 화평의 열매 (엡2:14-18)

성령의 세 번째 열매인 ‘화평’은 성령을 따르는 이들 속에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화평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다. 성령은 평화를 교회 속에 심으신다. 과연 어떤 형태의 평화인가? 우선,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선물로 주어지는데, 우리의 힘과 실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진다. 보상이 아닌 선물로 주어지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십자가로 소멸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기에 선물일 수 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과 원수 관계인 인류의 모습을 다각도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하셨다. 과연 이것을 받아들이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선물을 귀하게 여기는지, 아니면 가볍게 여기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과의 평화는 실천하는 평화로 우리 안에 나타난다.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버린 십자가의 능력은 교회를 변화시킨다. 여러 형태로 우리 사이를 막아선 벽들을 십자가는 지금도 허물고 있다. 예수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고, 한 몸을 이루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교회가 된다. 성경은 우리가 평화를 이루어가야 함을 강력히 호소한다. 바울은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 것을 당부한다. 이렇듯이 성령은 화평을 교회 속에 심으시고 막힌 벽들을 허물고 계신다. 예배 및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