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에베소 도시에 이르러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곳을 떠날 때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그의 긍정적 생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이렇게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감 내지 왜곡이 우리 안에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 부분에 있어서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감 또는 왜곡이 있어서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는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왜 반감, 왜곡이 생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실망에서 발생합니다. 어떤 유명한 신학자도 가족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원치않는 불행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반감을 갖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반감과 왜곡을 이겨내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란 기도를 한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아 자신에게 돌을 던진 이들을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열린 마음은 반감을 이겨내고 신뢰를 쌓아갈 때에 더욱 강력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이처럼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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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02/27/2022 “복음의 가치를 극대화하려면” (행18:14-15)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복잡해지고 있고, 다양성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복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 앞에서 세상은 오만합니다. 본문의 갈리오 총독을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서 빌라도의 오만함과 하나님 앞에서 오만했던 바로의 모습을 보시면 세상의 오만함을 알게 됩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무시한 이들을 오만한 자로 규정합니다. 복음의 가치를 최대한 축소시킵니다. 과연 교회는 어떠한 모습을 보이고 있나요?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극대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첫째, 복음은 세상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복음은 세상 모든 죄인을 품고 있습니다. 특정한 민족, 인종, 그룹만을 위해 복음이 있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바울도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려고 자기 몸을 주신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둘째, 복음은 세상을 바로 잡아주는 유일한 길잡이란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한 예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죄악을 제거하는 동시에 죄로 오염된 모든 것을 바르게 잡아줍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모든 어그러진 것들을 바르게 세우는 복음을 위해 우리는 모든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극대화하려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도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설교 2/20/2022 “신앙 재충전, 어떻게 얻을 것인가” (행18:9-10)
신앙 생활에서 탈진은 매우 위험합니다. 힘들고 지친 신앙인에게는 재충전을 위한 쉼이 필요합니다. 세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동역자를 통한 재충전입니다. 힘들 때 진짜 친구가 필요하듯이 바울도 믿음의 동역자들을 통해 영적 재충전을 얻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실라와 디모데 등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신앙적으로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바울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였습니다(롬16:4). 디모데도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소식을 전해주면서 커다란 위로를 받게 했습니다. 다음으로 신앙 열매를 통한 재충전입니다. 신앙 열매는 보람을 느끼게 하며, 영적 비타민으로 큰 힘을 줍니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보와 디도 유스도란 열매가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신앙 열매는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 하늘의 위로를 통해 재충전을 얻어야 합니다. 바울은 주의 음성을 통해 사람을 무서워말고, 침묵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함께 하신다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주님의 타이밍은 놀랍고 은혜롭습니다. 주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힘들고 지친 신앙인에게 너무도 적절한 시점에 주님께서 위로를 주십니다. 야곱도 외롭고 지친 상태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듣고 힘을 냈습니다. 엘리야도 죽고 싶을 때 주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위로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2/13/2022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다” (행17:22-25)
어떤 신학자는 ‘우리는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고, 그 토대 위에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의심의 시대를 살지만 기독교 신앙이 신뢰할 수 있는 것임을 확고히 하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는지를 확신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철학자들에 맞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세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는 아테네인의 모습을 본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셨음을 증거했습니다. 조금도 어렵지 않은 말로 하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바울의 자세는 본받을만한 모습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혀야 합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다’고 말한 바울의 증언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섬겼던 바울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상으로 하나님을 변질시키지 말고, 회개와 믿음으로 올바른 반응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런 건강한 반응이 우리로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게 만듭니다. 이것에 실패한 신앙인들의 모습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반응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위의 세 가지를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주일설교 2/06/2022 “복음이 세상을 뒤흔들다” (행17:16-18)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세상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가를 쓴 책이 있는데, 기독교의 영향력을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해놓았습니다. 여성인권, 노예폐지, 구제사업, 의학, 교육 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저항한 흔적 또한 뚜렷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저항을 보여줍니다. 아테네를 가득채운 우상과 철학입니다. 바울과 우상이 부딪혔습니다. 아테네 도시는 우상으로 가득찼는데, 전쟁, 지혜, 사랑, 죽음, 승리, 풍요를 관장하는 신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우상에 대해 분개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상이 지배종이 되면 기독교도 이것에 무감각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인들이 아테네 도시에서 이런 현상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우상과 맞서 싸웠습니다. 이는 복음이 우상과 함께 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다음으로, 철학과 복음의 충돌입니다. 아테네에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라는 걸출한 철학사조가 있었습니다. 둘 다 관점과 방향이 다르지만 인간 중심의 세상을 가치로 내세웠습니다.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외치자 그들의 본색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인간 이성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부활을 예수가 했다는 것을 그들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철학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복음과 반대되는 철학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은 세상을 지배하는 우상과 철학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주일설교 1/30/2022 “말씀 듣기는 신앙의 생명입니다” (행17:10-12)
말하고 듣는 행위는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말씀 전하고 듣는 행위도 비슷합니다. 사도행전 전체는 말씀을 전하고 듣는 구조입니다. 말씀 듣기의 롤모델은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말씀 듣기는 ‘받아들임’과 ‘묵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너그러움’과 ‘간절함’이 있습니다. 너그러움은 말씀 내용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모습을 바리새인들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를 매우 깐깐하게 들었습니다. 이 마음을 고쳐야만 말씀을 수용하는 능력이 커집니다. 간절함은 너그러움이 나태함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영적 목마름은 간절함을 갖게 합니다. 시편42:1에서,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말입니다. 다음으로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본문은 ‘확신’과 ‘끈기’를 말해줍니다. 바울이 전한 것을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성경을 묵상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첫째, 확신입니다.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하여 성경을 묵상한 모습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의심이 아닌 확신을 갖기 위한 자세입니다. 둘째, 끈기입니다. 이것은 꾸준함을 뜻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묵상한 태도에서 우리는 끈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말씀 듣기는 예술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처럼 다채롭습니다. 신앙의 생명과 같은 말씀 듣기에서 우리는 성공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01/23/2022 “헌신의 깊이가 더해져야 합니다” (행17:3-7)
소비주의와 실용주의가 이끄는 교회를 치유하는 방식은 복음이 이끄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 즉 왕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이나 세상의 발전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복음이십니다. 이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야손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회심과 제자로서의 삶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겼습니다. 그의 삶은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절대 약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야손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회심은 제자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바울과 그의 일행을 집으로 초대했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자는 야손의 집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장소였다고 말합니다. 그의 집이 예배 처소가 되어 많은 신앙인들의 영적 충전소 역할을 했습니다. 이 모습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 모습과 흡사합니다. 사도행전2장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현실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 공동체로서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품어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신앙인은 헌신의 깊이가 더해져야 합니다.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날마다 깊어지면 주님이 영광받으십니다.
주일설교 01/16/2022
영적 메마름은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증상으로 구원에 대한 무관심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로 구원의 추상화와 저세상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 관심이 생긴 교도관을 보여줍니다. 그가 감독하고 있는 감옥에 지진이 생겼고,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로 알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바울의 의해 미수에 그쳤습니다. 죄수인 바울이 도망가지 않고 간수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바울 앞에 엎드린 그는 구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결국 지진은 바울이 아닌 간수를 위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진을 사용하셔서 간수를 구원코자 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잃은양 비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간수는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답을 듣고서 곧바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와 그 가족 모두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각각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을 떠올리면 간수의 회심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간수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구원 열정이 바울에게서 간수에게로 흘러갔음을 놓치면 안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불타올랐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일설교 01/09/2022 “신앙은 위기에서 빛이 납니다” (행16:22-25)
바울은 좋은 일을 했음에도 고소를 당했습니다. 점치는 여종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는데,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게 되자 물질적인 손해를 크게 입은 주인들이 고소를 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엄청 맞았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들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은 매우 컸습니다. 몸과 마음이 고통에 시달릴 때에 신앙은 어떤 힘을 줄까요? 신앙이 좋았으면 이런 위기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욥이 대표적입니다. 신앙이 좋아도 커다란 시련이 올 수가 있습니다. 신앙은 위기 예방책, 모면용이 아닙니다. 신앙은 위기를 이기도록 힘을 줍니다. 바울과 실라가 깊은 감옥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했습니다.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어떤 마음으로 찬송했을까요? 형식적일 수가 없습니다. 진심을 담아 예배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기도와 찬송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을 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절망과 탄식, 원망에 함몰되지 않고 예배자로서 기도와 찬송을 드렸다는 것은 신앙이 크게 작동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죄수들이 들었다’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기도와 찬송 소리를 죄수들이 들었음을 강조합니다. 물론 한밤중에 떠든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면서 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신앙이 끼치는 좋은 영향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위기에서 빛이 남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주일설교 01/02/2022 “새로운 마음, 새로운 변화” (롬12:2)
신년 주일을 맞이하여 올해 표어인 ‘새로운 마음, 새로운 변화’를 로마서 말씀 통해 깊이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새해가 되면 새로운 마음을 먹습니다.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작심삼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도 비슷합니다.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결심합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를 ‘새로운 마음, 새로운 변화’를 이루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에서 ‘마음’은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마음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얻은 마음입니다. 예수 믿지 않은 이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패하고 미련하고 무익한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새롭게 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새로운 변화입니다. 새로운 마음을 갖고 있는 이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변화의 실체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신앙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진 새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실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가장 먼저 추구합니다. 이 변화가 때론 고통과 아픔을 수반합니다. 이것을 뚫고 가야 진정한 변화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변화는 놓칠 수 없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