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_17_2019 사도행전 6_1-7 “교회의 진정한 실력”*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완벽한 교회는 없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교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초대 교회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든다. 영적 분위기가 최고 수준이고, 영적 성장이 괄목할 만하고, 경건 실천이 탁월하다. 그럼에도 교회에 위기가 찾아왔다. 교회 분열이 일어날 정도로 큰 사건을 만났다. 한 쪽 그룹이 원망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원망이 폭발해서 온 교회가 큰 시험에 빠졌다. 과연 사도들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무엇이 진정 문제인지를 놓고 ‘하나님 말씀을 제쳐 놓았던’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 사도들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기도와 말씀 사역임을 확인한 것이다. 말씀 사역에 소홀해지면 왜 문제가 되는가? 교회 전체가 말씀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교회의 모든 사역이 말씀과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도들은 말씀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렇다면 구제 사역은 어떻게 되는가? 일곱 명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를 선출하도록 교회에 권한을 위임한다. 교회는 사도들의 제안을 기쁨으로 수용한다. 원망했던 그룹들도 사도들의 권위에 순종한다. 정해진 기준에 맞춰 일곱 명의 일꾼을 세운다.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고 있다. 말씀이 최우선임을 확실히 한 결과로 온 교회는 말씀이 왕성해진 것을 경험한다. 말씀이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영성을 갖추고 있는지 돌아볼 때이다.

11_10_2019 사도행전 5_40-42 “예수님 때문에 다시 힘을 냅니다”

제목: 예수님 때문에 다시 힘을 냅니다 (행5:40-42)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이야기로 예수님 때문에 교회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예수님 따름이로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은 오늘 본문에도 잘 드러난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에 예수님이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다시 힘을 내야 함을 오늘 본문이 보여준다. 과연 다시 힘을 내기 위해 교회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세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할 수가 있다. 고난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면서도 의연했던 이유는 예수님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고난을 겪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 때문에 제자들이 박해 받을 것을 미리 예고하셨다. 사도행전은 이 점을 매우 강력히 보여준다. 둘째,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기쁨으로 극복할 수가 있다. 세상에서 교회가 예수님 때문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가장 강렬한 형태이다.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능욕받는 일에 쓰임받은 것을 기쁘게 여겼다. 박해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을 뿐 아니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는 경지에까지 이를 수가 있다. 셋째,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뚫고 복음을 전할 수가 있다. 복음 전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 앞에서 여전히 복음을 외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자. 교회는 복음을 어떤 반대에도 전할 수 있어야 함을 기억하자. 이렇듯이 예수님 때문에 교회는 지금도 힘을 내고 있다.

11_03_2019 사도행전 5_33-39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제목: 교회의 뿌리를 찾아서 (행5:33-39)

입양된 후 30년만에 친부모를 찾아 고국을 방문한 이들의 소식을 듣는다. 교회의 뿌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와 박해가 동시에 기록되어 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다. 가말리엘은 이런 시도를 막기 위해 설득한다. 그의 말에서 핵심은 교회의 기원이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이다. 그의 주장은 드다와 유다처럼 사람이 기원이기에 놔두면 사라질 것이라 구태여 폭력으로 진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각을 엿볼 수가 있다. 교회의 기원은 철저히 사람에게 있다는 시각이다. 과연 그러한가? 교회의 뿌리는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성경은 하나님이 교회의 뿌리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세 가지로 확인하자.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분이시다. 그의 출생을 복음서는 기록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임을 증거한다. 요한복음3:34-35에 근거한다. 둘째, 교회는 예수의 몸이다.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를 보여준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지점이다. 마지막으로,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났다. 하나님이 기원일 수 밖에 없는 교회의 정체성이다. 디모데전서3:15에서 바울은 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라 했다. 가말리엘의 의문은 이제 풀렸다.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난 거룩한 공동체이다.

10_27_2019 사도행전 5_29-32 “한결 같은 신앙”

제목: 한결 같은 신앙 (행5:29-32)

사람은 누구나 안정된 생활을 원한다. 신앙 생활도 비슷하다. 매 앞에 장사가 없듯이 불안한 환경은 신앙을 흔들 수가 있다. 초대 교회를 보자. 성령역사는 교회를 새롭게 했지만 유대인의 박해는 위협적이었다. 특히 사도들은 감옥에 갇히는 고통을 겪었다. 오늘 본문도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보여준다. 교회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물러나거나 위축되거나 타협하는 방식은 성경적이지 않다. 올바른 태도는 ‘한결 같은 신앙’을 갖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자. 첫째, 순종이다. 본문 29절이 보여주듯이, 순종은 당연하다. 하지만 다른 요소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사울왕은 제사가 순종보다 더 낫다고 했다가 크게 혼났다. 야고보는 순종 없는 믿음은 거짓되다고 했다. 둘째, 신앙고백 이다. 본문30-31절은 우리의 신앙 고백 내용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우리의 임금과 구주가 되신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위협적인 현실에서 이 고백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 셋째, 확신이다. 본문32절은 증인으로서의 확신을 말한다. 하지만 증인됨을 포기할 때가 있다. 위험한 일 앞에서이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은 확신 속에서 자란다. 이렇듯이 한결 같은 신앙은 세 가지 토양 위에서 자란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한결 같은 신앙을 보이고 있는가?

10_13_2019 사도행전 5_12-16 “단단하게 하시는 하나님”

제목: 단단하게 하시는 하나님 (행5:12-16)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이 어려움을 겪으면 더 강해진다. 하나님도 우리를
연단하시는데, 더 강한 신앙을 갖도록 한다. 본문은 교회를 더 단단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일으켜
교회의 위상을 높이신다.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을 보이신다.
교회가 단단해지면 어떤 모습을 나타낼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믿는 사람들이 모이기를 힘쓴다. 본문에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습관처럼
서로 모였다. 모두 다 마음을 같이하여 더욱 더 모이기를 힘썼다. 이것은
교회의 단단함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모이지 않는 교회는 힘이 없다.
마음이 흩어지면 연대감은 느슨해진다. 둘째, 교회 밖의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이다. 본문에, ‘상종하는 사람이 없다’와 ‘백성이 칭송하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외부인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고, 칭송하는 대상인 교회는 위상이 매우 높다. 교회의 단단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셋째, 영적인 열매이다. 본문에, “믿고 주께 돌아오는
자가 더 많다”고 한다. 새로운 믿음의 식구의 증가이다. 치유 역사가 일어나
호기심으로 모인 것이 아니다. 회심을 경험한 이들이 교회에 합류하는
모습이다. 교회의 단단함은 이렇듯이 새로운 식구들의 합류로 더욱
강해진다. 이와 같이 교회는 연약함을 극복하고 단단해져야 한다.

10_06_2019 사도행전 5_1-1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잘 나갈 때 조심하라’는 말처럼 교회는 모든 일이 잘 되고 있을 때 조심해야 함을 본문이 보여준다. 교회의 영적 부흥이 타오를 때에 교회에 위선과 거짓이 침투하였다. 그 통로 역할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했다. 그들은 매우 헌신된 신자들로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헌금했다. 존경과 칭찬받을 정도로 훌륭했던 그들이 거짓과 위선이란 함정에 빠졌다. 작은 것에 욕심을 내면서 큰 것을 놓치는 신앙을 보였다. 소유를 판 값 중 얼마를 숨기면서 모든 것을 다 바친 것처럼 꾸몄다. 베드로에 의해 이것이 발각되었고, 이 둘은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죄는 위선과 거짓이었다. 하나님이 부흥하는 교회에 찬물을 끼얹을 거짓과 위선이란 독을 해결하셨다. 해독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죽음을 당했지만 이 사건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었다. 주목할 점은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위선과 거짓이 침투한 일이다. 이것이 신앙과 교회에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음에 이르게 하심은 이것이 얼마나 교회에 해로운 지를 보여준다. 이 사건의 결과로 교회에 큰 두려움이 생겼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이 본문 기록의 목적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키우는 곳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위선과 거짓과 싸우는 것이 그 중의 하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