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11/22/2020 욥기 1:21-22, “감사의 폭 넓히기”

상실의 고통은 서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신앙적으로 성장을 이루는 기회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욥입니다. 욥이 겪은 상실의 고통은 너무도 커서 감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녀 모두를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란 고백을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유혹은 상실의 고통을 파고듭니다. 욥은 고통을 잊기 위해 죄짓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또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상실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있지만 그는 이것을 이겨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원망을 자주 했습니다. 물이 없어서, 음식이 없어서, 생활이 고달파서 원망했습니다. 욥은 더 고통스러운 상실을 경험했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단한 신앙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사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감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대단했을지를 상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감사의 폭은 상실의 고통을 거치면서 더욱 확대될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향한 감사는 상실의 고통 중에도 우리 삶 속에서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주일설교 11/15/2020 사도행전 10:44-48 “성령으로 하나되다”

고넬료 회심 이야기의 마지막은 성령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성령이 이방인 가정에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내려오시니’ ‘성령 부어주심’ ‘성령을 받았다’는 표현들이 두드러집니다. 성령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임하신 것은 교회가 성령으로 하나된 공동체임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첫째 성령은 자유로우십니다. 특정한 사람이 성령을 속박할 수가 없습니다. 특정한 방식이 성령을 가둘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자유롭게 활동하십니다. 둘째, 성령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성령이 이방인에게도 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종, 민족, 지역을 따지지 않으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이심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니편 내편을 나누고 주는 것이 없이 미워하는 편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로서 이러한 잘못된 성향을 극복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은 체험적이십니다. 추상적, 이론적으로만 성령을 공부하면 위험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령은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교회는 성령을 체험한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령의 자유로우심, 사람을 가리지 않으심, 체험할 수 있는 분이심을 교회는 항상 명심할 뿐 아니라 성령을 더욱 더 의지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하나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일설교 11/08/2020 사도행전10:36-43 “복음의 심장”

예수님을 남에게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역을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전해야 할 이유로 예수님을 통해 평화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을 평화로 바꾸신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이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원수된 것을 허물어뜨리신 분으로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기에 평화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전해야 할까요? 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증언자로서 예수님 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증언자는 관망하거나 연구만 하거나 리포터처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한 몸인 것처럼 예수님의 편에 서서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 이야기가 전해질 때 사람들이 바뀝니다. 믿음의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뿐만 아니라 죄용서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받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실제로 고넬료를 통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전체는 이것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의 심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우리의 심장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일설교 11/01/2020 사도행전10:30-35 “하나님을 향한 마음”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진실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적인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떠한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하는데,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식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죄의 오염은 욕심과 고집에서 오는데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죄로 물들게 합니다. 마음이 차가워지는 것은 열정을 식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더 커질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하나님 앞에 서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와 다른 분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말씀을 듣고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또한 어떤 말씀이든 다 듣겠다는 자세도 매우 훌륭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실 뿐 아니라 누구든지 품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은 외모로 판단했다가 하나님께 꾸중을 들은바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누구든지 품으신다는 점은 고넬료를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놀라운 진리의 산 증인이 고넬료입니다. 교회는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으로서 혈통, 인종, 지연을 따지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진실한 신자로서의 삶의 모습입니다.

주일설교 10/25/2020 사도행전 10:9-16 “순종의 삶”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본 환상 이야기인데, 평소 절대 먹지 않던 부정한 음식을 앞에 두고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먹으라는 명령과 먹지 않겠다는 거절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핵심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더럽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방인을 배척하는 베드로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한 것이다. 이방인을 깨끗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그가 수용해야 고넬료와 만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정한 사람도 품으신 것을 직접 보았다. 세리와 죄인들의 구주가 되셔서 함께 식탁 교제를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과 ‘성령이 임하시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직접 들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부정한 사람이란 이유로 이방인과의 교제를 끊고 있다. 그런 그가 고넬료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이다. 결국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순종한다. 그는 행10:28에서 고넬료에게 자신이 깨달은 새로운 진리를 말한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면 안되지만 하나님의 지시 때문에 고넬료의 집에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베드로의 모습이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묘미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닫고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즐거움이다. 베드로는 오래동안 지켜오던 이방인과의 단절을 끊어내고 고넬료와 교제를 나눈다. 이런 변화는 초대 교회에 큰 도전을 주었다. 이런 순종의 삶은 언제나 교회의 커다란 동력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주일설교 10/18/2020 사도행전10:1-5 “구별된 삶”

<설교 요약>                제목:“구별된 삶” (사도행전10:1-5)

고넬료는 사도행전에서 이방인 선교의 물꼬를 튼 첫 회심자로 기록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회심 이야기는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 세계까지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의 경건 생활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유대교 신앙을 갖고 있었던 그가 보여준 신앙은 구약의 경건한 신앙인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경외하는 삶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로 나타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을 대표합니다. 기도할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바빠도 기도할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기도하는 동안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 생각으로 충만해질 때 진정한 경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구제’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경건의 모습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고보서1:27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구제는 신앙인의 사회적인 책임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와 구제를 통한 경건한 삶을 하나님은 인정하십니다. 4절에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심을 확인시켜주는데, 이것은 기도와 구제의 삶을 사는 모든 신앙인에게 힘이 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경건의 삶을 살 때 하나님도 함께 움직이고 계심을 보여주기에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구별된 삶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10/11/2020 사도행전9:36-42 “신앙의 힘으로”

오늘 본문은 욥바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 다비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선행과 구제, 질병과 죽음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베드로에 의해 다시 살아난 장면과 욥바에 있는 많은 이들의 회심 이야기는 해피앤딩을 연상케 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비다의 제자로서의 삶이다. 그의 선행과 구제는 그것을 뒤받침하는 중요한 증거이다. 그는 힘든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고 가까이서 그들의 필요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채워주었다. 이것은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 할 신앙 모델이다. 하지만 질병과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연약함을 갖고 있는 다비다의 모습이 나온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무리 주를 위해 살아도 질병과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다. 우리는 겸손할 수 밖에 없다. 또한 훌륭하게 신앙생활하다가 질병 또는 죽음을 맞이한 동료 신앙인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욥의 세 친구는 위로하러 왔다가 비난과 정죄를 하게 된다. 욥이 당한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의 징계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수를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욥바의 성도들은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 함께 울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위로하셨다. 다비다를 살려냄으로 성도들과 과부들이 커다란 위로를 받았다. 연약한 이들이 서로 위로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약해질 때 함께 아파하면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긍휼이 여기시고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위로하신다. 이처럼 신앙의 힘은 제자의 삶을 살게 하며 서로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케 한다.

주일설교 10/04/2020 사도행전9:32-35 “성도로 산다는 것은”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에 의해 애니아란 성도가 깨끗이 낫게 됩니다. 무려 8년동안 앓던 중풍병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 뒤에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열매들이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애니아가 질병에 걸린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점입니다. 룻다에 복음이 전파될 때에 이미 몇 년 동안 중풍병으로 고생했던 애니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기 더 좋은 환경이 있거나 믿기 어려운 환경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환경이 아니라 주의 은혜가 너무 강력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믿었지만 애니아는 여전히 중풍병을 앓고 있었던 점입니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성도로서 살아갔습니다. 약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그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도 육체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응답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선물처럼 치료받은 애니아의 모습입니다. 이 순간까지 그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됩니다. 항상 소망을 품고 기도하면서 성도로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 치료라는 선물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에 더욱 소망을 품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은혜의 손길이 더욱 강력하게 임할 것입니다. 이렇듯이 성도로 살아가는 삶은 은혜의 연속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9/27/2020 사도행전9:31 “살아있는 교회”

사도행전은 ‘성령 행전’이라 할 수 있다. 행1:8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본문,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는 성령의 작품이다. 성령이 각 사회에 교회를 심으셨다. 이는 성령으로 교회가 살아움직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연 살아있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본문은 ‘평안’과 ‘연합’의 모습을 말한다. 예수님의 평안이 가득하고 성도간의 연합이 견고한 교회의 모습이다. 당시 교회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유대인의 핍박과 로마의 감시 등으로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 속에서 교회는 평화를 누렸다. 성도간의 연합이 잘 이루어졌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성령이 임하셔서 교회를 보호하셨기에 광야같은 곳에서도 살아움직였다. 연합의 결과로 교회가 든든히 서 가는 모습을 갖추었다.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넘치는 것은 나눠주는 마음이 연합의 끈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교회를 더욱 강화시켜줄 동력이 무엇인가? 본문은 ‘경외함’과 ‘위로’를 말한다. 우리 편에서 주를 경외하는 신앙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경외심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 자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지, 세상 말을 들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 편에 서는 삶의 태도이다. 주를 경외하는 교회는 더욱 활기 넘치는 신앙을 나타낸다. 그와 더불어 성령의 위로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다. 성령의 위로는 다양한 채널을 통해 온다. 이처럼 교회는 평안, 연합을 이루고 경외심과 위로가 뒷받침할 때 더욱 활발해진다.

주일설교 9/20/2020 사도행전 9:26-30 “신뢰의 관계”

다메섹에서 활동하던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들과 사귀고자 방문한 것입니다. 그는 이 교회와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개인적 죄책감과 미안함까지도 풀고자 이 교회를 방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를 매우 두려워합니다. 사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믿지 못했기에 또 피해를 입을까 걱정했던 것입니다. 사울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있습니다. 불신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교회의 친밀함을 파괴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불신하든 한 쪽이 불신하든 관계는 끝이 나고 맙니다. 불신은 교회를 아프게 하는 무서운 가시입니다. 불신하게 되면 자신은 옳고 상대는 무조건 틀리다는 오류에 빠집니다. 또한 불신을 제공한 사람만 탓하게 됩니다. 이렇듯 불신의 장벽이 생기면 교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교회는 사울을 용납합니다. 관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교회가 갖는 가장 멋진 모습입니다. 무엇이 불신을 신뢰로 만들었나요? 중재자인 바나바의 역할과 사울의 일관성입니다. 아무도 사울을 믿지 않았을 때 바나바는 그를 신뢰했습니다. 그를 데리고 사도들을 찾아가 설득했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을 해낸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울의 일관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위한 그의 모습이 교회의 신뢰를 더욱 강화시켜주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일관된 모습은 교회의 신뢰를 얻는 무척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신뢰의 관계는 신앙이 기초가 되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용납할 때 이루어집니다. 이런 멋진 모습이 우리 삶에 더욱 풍성히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