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01/23/2022 “헌신의 깊이가 더해져야 합니다” (행17:3-7)

소비주의와 실용주의가 이끄는 교회를 치유하는 방식은 복음이 이끄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도시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 즉 왕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이나 세상의 발전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복음이십니다. 이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은 야손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회심과 제자로서의 삶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왕으로 섬겼습니다. 그의 삶은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절대 약해지지 않습니다. 또한 야손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회심은 제자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바울과 그의 일행을 집으로 초대했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떤 학자는 야손의 집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장소였다고 말합니다. 그의 집이 예배 처소가 되어 많은 신앙인들의 영적 충전소 역할을 했습니다. 이 모습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 모습과 흡사합니다. 사도행전2장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현실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 공동체로서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품어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신앙인은 헌신의 깊이가 더해져야 합니다.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날마다 깊어지면 주님이 영광받으십니다.

주일설교 01/16/2022

영적 메마름은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증상으로 구원에 대한 무관심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로 구원의 추상화와 저세상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 관심이 생긴 교도관을 보여줍니다. 그가 감독하고 있는 감옥에 지진이 생겼고,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로 알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바울의 의해 미수에 그쳤습니다. 죄수인 바울이 도망가지 않고 간수에게로 왔던 것입니다. 바울 앞에 엎드린 그는 구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결국 지진은 바울이 아닌 간수를 위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지진을 사용하셔서 간수를 구원코자 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기쁨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잃은양 비유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간수는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답을 듣고서 곧바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와 그 가족 모두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각각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한 것을 떠올리면 간수의 회심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간수는 삶의 현장에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구원 열정이 바울에게서 간수에게로 흘러갔음을 놓치면 안됩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불타올랐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일설교 01/09/2022 “신앙은 위기에서 빛이 납니다” (행16:22-25)

바울은 좋은 일을 했음에도 고소를 당했습니다. 점치는 여종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는데,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게 되자 물질적인 손해를 크게 입은 주인들이 고소를 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엄청 맞았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들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은 매우 컸습니다. 몸과 마음이 고통에 시달릴 때에 신앙은 어떤 힘을 줄까요? 신앙이 좋았으면 이런 위기가 없을 것이란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욥이 대표적입니다. 신앙이 좋아도 커다란 시련이 올 수가 있습니다. 신앙은 위기 예방책, 모면용이 아닙니다. 신앙은 위기를 이기도록 힘을 줍니다. 바울과 실라가 깊은 감옥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했습니다.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어떤 마음으로 찬송했을까요? 형식적일 수가 없습니다. 진심을 담아 예배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기도와 찬송을 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을 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절망과 탄식, 원망에 함몰되지 않고 예배자로서 기도와 찬송을 드렸다는 것은 신앙이 크게 작동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죄수들이 들었다’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기도와 찬송 소리를 죄수들이 들었음을 강조합니다. 물론 한밤중에 떠든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면서 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신앙이 끼치는 좋은 영향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위기에서 빛이 남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주일설교 01/02/2022 “새로운 마음, 새로운 변화” (롬12:2)

신년 주일을 맞이하여 올해 표어인 ‘새로운 마음, 새로운 변화’를 로마서 말씀 통해 깊이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새해가 되면 새로운 마음을 먹습니다.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작심삼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도 비슷합니다.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결심합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를 ‘새로운 마음, 새로운 변화’를 이루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에서 ‘마음’은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마음을 뜻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된 구원얻은 마음입니다. 예수 믿지 않은 이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패하고 미련하고 무익한 마음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새롭게 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새로운 변화입니다. 새로운 마음을 갖고 있는 이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변화의 실체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신앙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진 새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실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가장 먼저 추구합니다. 이 변화가 때론 고통과 아픔을 수반합니다. 이것을 뚫고 가야 진정한 변화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변화는 놓칠 수 없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주일설교 12/26/2021 “기독교의 저력을 아십니까” (행16:19-21)

송년 주일을 맞이하여 기독교가 갖고 있는 저력을 알아보겠습니다. 빌립보란 도시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바울은 거리에서 점치는 여종을 만납니다. 그는 귀신에 사로잡힌 여종을 예수 이름으로 고칩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여종을 통해 돈을 벌었던 주인들이 바울과 그의 일행을 로마 당국에 고소합니다. 고발 이유를 보면 오히려 기독교의 저력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기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고소 내용은 ‘이 사람들이 이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한다’입니다. 기독교 복음을 전한 바울과 실라에 의해 도시 전체가 들썩거렸습니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흐름이 생겼습니다. 점치는 여종을 통해 돈을 벌었던 기존 질서가 무너졌고 뭔가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손해본 주인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이는 기독교가 보여준 저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반증합니다. 기독교 저력은 한 영혼의 변화에서 시작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기독교 메시지가 갖는 파워입니다. 고소 내용으로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기독교 메시지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지에 맞추라고 하니다. 그러나 예수 복음의 가치는 영원합니다. 세상 질서를 파고드는 메시지입니다. 기독교 저력을 사회적인 영향력과 기독교 메시지에서 확인할 때 우리는 좀 더 확신을 갖고 세상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주일설교 12/19/2021 “진심으로 예수님을 기념하려면” (고전12:27)

성탄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세상도 성탄절을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없는 생일 축하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누가 진정으로 성탄절을 기념할 수가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누구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기뻐할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나의 어머니, 형제,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혈연이 아닌 믿음으로 가족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족으로서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된 것도 은혜 때문이지만 가족으로서 은혜를 계속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합니다. 셋째, 우리는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입니다.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머리의 통제를 받는 몸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따라서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일은 항상 가장 귀한 날입니다. 예수님을 마음껏 축하하고 기념하는 일은 그와 한 몸인 자로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그의 몸인 우리가 머리이신 예수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기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며, 은혜 속에 머무는 자이며, 그의 몸으로서 예수님의 생일을 가장 진심으로 기념할 수가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12/12/2021 “믿는 사람을 통한 복음 전파” (행16:16-18)

빌립보 도시에서 기도하러 갔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만난 이야기를 본문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여종은 점을 치는 직업을 갖고 있었고 큰 돈을 벌었습니다. 바울과 일행이 기도하러 가는 도중에 길에서 이 여종과 마주쳤습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 이 일은 여러 날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바울은 심히 괴로워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복음이 훼손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입에서 ‘구원의 길’ 이야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좋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여종이 전한 메시지가 같다고 여길 것입니다. 복음을 점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여길 수가 있습니다. 복음 가치가 형편없이 추락할 위기에 처해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용납할 수가 없기에 심히 괴로워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복음 전파를 방해한 것입니다. 점치는 자의 입에서 복음 전파가 이루어진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처럼 괜찮을까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사람들을 속이는 마귀의 계략을 성경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점치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보이면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됩니다.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복음의 훼손과 복음 전파의 방해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을 통해 전해져야 합니다. 복음의 가치와 복음 전파의 순수함이 믿는 이들의 전파로 세상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주일설교 12/05/2021 “회심이 있는 곳에는” (행16:11-15)

회심을 보통 유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방향을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는 것이 회심의 특징입니다. 회심은 우상에서 하나님으로 방향이 바뀔 때 일어납니다. 오늘은 루디아 회심 이야기를 통해 회심의 세 가지 특징을 보겠습니다. 첫째,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여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루디아가 반응을 보였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회심했습니다. 즉 말씀을 듣는 중에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회심이 있는 곳에는 이처럼 말씀의 자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말씀 듣는 일에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진정한 회심이 일어납니다. 둘째, 주께서 마음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본문에서 루디아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와 나타나심으로 전도의 열매가 열린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지만 마음을 여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강조했습니다. 셋째, 확실한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루디아가 회심한 후에 세례를 받았고,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세례와 성도의 교제는 회심한 자에게 생기는 확실한 열매입니다. 루디아는 자신의 가정을 믿는 이들에게 개방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교회 공동체가 갖는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합니다. 회심이 있는 곳에는 이 세가지가 뒤따라옴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11/28/2021 “열린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기” (행16:6-10)

계획이 선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가서 주의 말씀을 전하려는 선한 계획을 세웠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이를 막으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또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성령이 막으셨다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나쁜 계획을 세웠음에도 잘 풀리는 경우를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입니다. 반대로 선한 계획이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친 사건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령이 막았다는 본문의 기록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2:18에서 교회를 재방문하려는 것을 막은 세력을 사탄으로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이 막으셨는지, 사탄이 막았는지 어떻게 아느냐란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선한 계획, 의지, 뜻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또한 결과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선한 계획임에도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는 것이 주의 뜻임을 인정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계획과 의지를 앞세우지 않고 주의 뜻이 이끄시는대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11/21/2021 “변함없는 감사의 이유” (스바냐3:17)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감사의 이유를 찾게 됩니다. 각자 다양한 이유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팬데믹 속에서도 현장 예배를 드리게 된 점, 모든 성도가 안전하게 생활하고 있는 점, 새로운 직분자를 선출한 점은 교회의 감사 이유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변하지 않는 감사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그 이유로 꼽고 싶습니다. 스바냐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고백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신앙적인 고충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불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우리는 성전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시대, 문화,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변함없이 지속되었습니다. 왜 이것이 우리에게 감사 이유일까요? 스바냐는 세 개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 기쁨, 사랑’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너무도 행복해하십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라고 스바냐는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에서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의 결정체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의 변함없는 감사의 이유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