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12/05/2021 “회심이 있는 곳에는” (행16:11-15)

회심을 보통 유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방향을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는 것이 회심의 특징입니다. 회심은 우상에서 하나님으로 방향이 바뀔 때 일어납니다. 오늘은 루디아 회심 이야기를 통해 회심의 세 가지 특징을 보겠습니다. 첫째,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여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중 하나인 루디아가 반응을 보였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회심했습니다. 즉 말씀을 듣는 중에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회심이 있는 곳에는 이처럼 말씀의 자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말씀 듣는 일에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진정한 회심이 일어납니다. 둘째, 주께서 마음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본문에서 루디아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바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와 나타나심으로 전도의 열매가 열린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지만 마음을 여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강조했습니다. 셋째, 확실한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루디아가 회심한 후에 세례를 받았고,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세례와 성도의 교제는 회심한 자에게 생기는 확실한 열매입니다. 루디아는 자신의 가정을 믿는 이들에게 개방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교회 공동체가 갖는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합니다. 회심이 있는 곳에는 이 세가지가 뒤따라옴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11/28/2021 “열린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기” (행16:6-10)

계획이 선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 가서 주의 말씀을 전하려는 선한 계획을 세웠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이를 막으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또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성령이 막으셨다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나쁜 계획을 세웠음에도 잘 풀리는 경우를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입니다. 반대로 선한 계획이 나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여주인의 유혹을 뿌리친 사건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령이 막았다는 본문의 기록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2:18에서 교회를 재방문하려는 것을 막은 세력을 사탄으로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성령이 막으셨는지, 사탄이 막았는지 어떻게 아느냐란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선한 계획, 의지, 뜻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또한 결과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선한 계획임에도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될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는 것이 주의 뜻임을 인정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한 계획과 의지를 앞세우지 않고 주의 뜻이 이끄시는대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11/21/2021 “변함없는 감사의 이유” (스바냐3:17)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감사의 이유를 찾게 됩니다. 각자 다양한 이유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팬데믹 속에서도 현장 예배를 드리게 된 점, 모든 성도가 안전하게 생활하고 있는 점, 새로운 직분자를 선출한 점은 교회의 감사 이유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변하지 않는 감사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을 그 이유로 꼽고 싶습니다. 스바냐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고백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신앙적인 고충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불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우리는 성전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시대, 문화,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변함없이 지속되었습니다. 왜 이것이 우리에게 감사 이유일까요? 스바냐는 세 개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 기쁨, 사랑’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너무도 행복해하십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라고 스바냐는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에서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의 결정체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의 변함없는 감사의 이유로 충분합니다.  

주일설교 11/14/2021 “교회를 위한 유연한 태도” (행16:1-5)

디모데를 사역팀에 합류시키면서 바울은 그로 할례를 받게 합니다. 이는 이전 그가 보였던 할례에 대한 거부 반응과 대조적입니다. 그는 할례받는 행위를 매우 위험하다고 여겼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할례 받으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도록 설득했고 실제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 유연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할례를 허용하기도 하고 엄격히 금지하기도 하는 모습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평소에 가르치지 않던 어떤 규칙들에 유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입니다. 이를 이방인 교회에 주어 지키게 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신앙 유연성이 너무 지나치면 신앙 방종으로 변질됩니다. 아론이 우상을 만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에 너무 유연하게 대하면서 이런 죄를 짓고 말았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신앙 유연성이 너무 없으면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유연성을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적절한 신앙 유연성은 교회의 믿음을 더욱 키우는 좋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한 교회의 새로운 신자들로 정착하도록 이끕니다. 이 모든 유익이 신앙 유연성에서 나옵니다. 신앙 유연성은 교회를 위한 유연한 태도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11/07/2021 “그래도 주의 일을 멈추면 안됩니다” (행15:36-41)

바울과 바나바는 둘도 없는 믿음의 동역자였고 주의 일을 온 힘을 다해 해낸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우정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더이상 함께 하지 않고 갈라서게 된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이제는 서로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뢰 관계가 깨지는 것을 볼 때에 그동안 쌓아온 우정이 허무해진 것같아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이렇게 싸우게 된 것은 마가 요한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를 데려갈 수가 없다고 했고, 바나바는 함께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둘 사이의 견해가 좁혀지지 않았고 감정 싸움으로까지 번졌습니다. 둘 중 누가 더 잘못한 것인가에 대해 본문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둘 중 한 쪽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더 잘했고 못했느냐의 문제를 본문이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배울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화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그의 사역에서 되짚어보았던 것같습니다. 그는 로마교회를 향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고 권면할 것을 볼 때에 알 수가 있습니다. 둘째, 그래도 주의 일을 멈추면 안됩니다. 본문은 이 둘이 서로 갈라졌지만 사역은 계속 이어갔음을 강조합니다. 감정 싸움으로 번졌음에도 주의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교회를 견고하게 한 바울 사역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서로 관계가 어긋날 수는 있지만 주의 일을 포기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10/31/2021 “위로의 말씀이 교회를 살리다” (행15:30-32)

상처입은 이에게 위로가 필요하듯이 상처입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위로의 파워를 경험해야 합니다. 상처가 나면 약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상처도 약이 필요한데 그것은 위로입니다. 신앙의 상처에도 위로는 무척 도움이 됩니다.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는 본문의 상황도 비슷합니다. 상처입은 시리아 안디옥 교회가 위로의 편지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고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위로가 얼마나 신앙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위로가 우리에게 필요할까? 하나님의 위로와 신자의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일에 있어서 최고이십니다. ‘위로의 하나님’으로 불리울 정도로 이 일을 탁월하게 하십니다. 또한 신자의 위로가 있는데, 이 일도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중요한 사역입니다. 이사야에게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 것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위로와 더불어 매일 새로운 말씀이 필요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선지자인 유다와 실라를 통해 상당한 기간 동안 새로운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신앙 회복에 새로운 말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이란 이미 주어진 성경이 우리 삶에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 삶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새로운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위로와 새로운 말씀은 교회를 살리는 놀라운 일을 해냅니다.

주일설교 10/24/2021 “남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 (행15:19-21)

할례 구원을 강조한 유대인 신자들로 인해 이방인 교회가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할례 구원을 외치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의 격렬한 논쟁이 펼쳐졌는데, 베드로는 오직 예수 구원만이 진짜임을 외쳤습니다. 그 뒤에 이 교회의 수장인 야고보가 일어나서 예수 구원이 절대적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 후에 이방인 신자들을 괴롭히지 말 것을 유대인 신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또한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유대인 신자들을 고려해서 몇 가지를 조심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우상 제물,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세 율법이 가르친 것으로 유대인들이 오랜 전통으로 지켜온 것입니다. 과연 야고보도 할례 구원처럼 율법 구원을 강조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하나로 화합하기 위해 무엇이 진정 필요한지를 가르친 것입니다. 서로 남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을 갖도록 촉구했던 것입니다. 신앙인의 배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한 쪽만의 양보가 아닌 서로가 배려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유가 있지만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면 안됩니다. 남의 유익을 먼저 고려하면서 사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고전10:23)이 아니라고 했던 바울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남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10/17/2021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 (행15:8-11)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그는 구원 교리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극심하던 상황에서 복음의 핵심을 놀랍도록 명확히 알렸던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을 설파하면서 구원 교리의 혼란스러움을 잠재웠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임을 우리는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 성령을 받는 일입니다. 8절을 보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란 대목이 나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는다는 선언입니다. 성령 받는 일을 통해서 복음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음을 우리는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마음의 청결입니다. 9절에도 ‘그들이나 우리나’란 문구가 나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상관없이 마음의 청결을 믿음으로 받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 가정이 믿음으로 청결함을 받은 사건을 베드로는 떠올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마음의 청결이 이루어집니다. 셋째, 은혜로 받는 구원입니다. 11절도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란 문구가 등장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받는다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종, 민족, 혈통, 사회적 지위 등으로 사람을 나누어 구원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복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10/10/2021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길” (행15:1-2)

구원을 등산에 비교하면서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많듯이 구원의 길도 많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교회 안에서 표출함으로 속앓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 교회가 이런 문제를 겪었습니다. 유대에서 온 성경 교사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레위기12:3에 근거해서 모세의 법이 할례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예수 구원을 경험한 이방인들도 할례 구원을 받아야 함을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 와서 강력히 가르쳤습니다.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예수 구원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 구원에다 할례 구원이 합해져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구원을 전했을까요? 행 13:38-39에 의하면 오직 한 길인 ‘예수 구원’을 전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할례 구원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갈5:4)라고 했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고 한 유대 성경 교사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이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구원에 다른 요소를 첨가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선언했던 바울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구원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10/03/2021 “하나님을 체험한 이야기가 있나요?” (행14:26-28)

시리아 안디옥에서 교회들을 모아놓고 바울은 신앙 간증 형식으로 선교 현장 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이야기로 채워졌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야기입니다. 이는 그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바울 사역에서 역사하였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중요했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동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선교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놀라운 정도로 구체적이었습니다. 이 둘은 바울만이 아니라 교회가 항상 나누어야 할 하나님의 동행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언제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구체화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 이야기입니다.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할 때에 자주 목격했던 장면입니다. 믿음의 문을 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가장 가까이에서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도 이방인이었는데 하나님이 믿음의 문을 여신 결과로 이렇게 신앙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믿음을 여신 하나님의 이야기로 가득채워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존 신앙인들은 믿음의 문을 여신 하나님께 열린 마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불신으로 믿음의 문을 닫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으면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교회는 하나님 체험 이야기로 풍성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