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가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로서 속상한 일입니다. 성격상 내성적이라 항상 기죽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밝은 아이인데 어떤 사건으로 인해 기가 팍 죽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속상하지만 부모로서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용기를 심어주는 일입니다. 어찌 자녀뿐이겠습니까? 남편이 회사일로 인해 기가 죽어 있는 경우 아내의 할 일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어떤 일로 인해 마음에 상처가 생겨 기가 죽어 있으면 남편은 당연히 용기를 심어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용기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좋지 못한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용기를 주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기를 팍팍 넣어주고 싶은데, 핀트가 안맞는 것입니다. 기껏 힘을 주는 말을 했는데, 적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더 기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기를 살리는 것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마음만 먹는다고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해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아픈 부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던지는 한 마디 말이 힘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적절한 말은 상대의 기를 살려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서로 격려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돌아본다는 것은 상대방을 관심 갖고 면밀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말입니다. 좋은 의사는 진찰할 때 정성을 다합니다. 혹시 놓치는 부분이 있는지 신경을 씁니다. 그래야 환자에게 바른 처방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서로 격려하기 위해 신자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흠을 찾아내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정죄와 비판을 목적으로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은 교회 공동체 전체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격려해야 할까요? 관심을 갖고 상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이제는 상대의 기죽은 마음을 살려줄 격려가 필요합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사랑과 선행’입니다. 사랑없는 선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선행없는 사랑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인적인 격려를 해야 합니다. 수박 겉핧기 식으로 격려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의미 없는 말 몇 마디로 격려했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전인적인 격려가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만나야 격려든 뭐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과 선행은 만남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습관에 빠지면 서로 격려하는 일은 불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서로 모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모임을 통해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개인주의 시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사는 교회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쓴다면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