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힘” (시편31편 묵상) – 4/15/2020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자녀가 아플 때 옆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부모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아프지도 않게 지켜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자책하면서 아픈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누가 부모의 사랑을 약하고 무능하다고 비난할 수가 있을까요? 아프지 않게 하지도 못하고 대신 아플 수도 없는 부모의 마음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아무리 힘이 없고 가난해도 부모의 사랑은 강합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항상 강하고 담대합니다. 자녀가 위기에 처할 때 강함과 담대함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가요? 시편 저자는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신앙인의 자연스러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주의 얼굴을 내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 속 깊숙히 파고듭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멈추지 않습니다. 시편 저자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련의 계절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저자처럼,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또한 “내 기력이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할” 정도로 고통의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시편 저자가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가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 삶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실 수 있느냐는 깊은 실망감이 생깁니다.

우리는 실망과 의심을 이겨내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다”고 할 정도로 삶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픔과 시련이 삶을 흔들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울 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겨내고 “그러하여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묻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돌아볼 때입니다.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담대해질 것입니다.

“돕는 손길” (시편30편 묵상) – 4/14/2020

우리는 돕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남을 도우면서 남모를 기쁨을 맛본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길을 가다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갈 때에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움을 주었을 때의 뿌듯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선행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극악한 죄들이 뉴스 전면을 차지해도 보이지 않게 이웃을 돕는 손길은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론 돕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경험을 합니다. 순수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이유도 없이 왜 도와줄까란 의심을 받게 되면 도움을 주는 입장에서 큰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 만족, 자기 우월감으로 남을 돕는다는 비난을 듣게 되면 돕는 일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저 사람은 도와주면서 왜 이 사람은 도와주지 않느냐’는 공평의 문제에 걸리면 다시는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지 않는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남을 돕는 일은 그것 자체로 칭찬을 들어야 함에도 세상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냉정함을 알고 있기에 남을 돕는 손길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도움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물론 도움을 받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도움 주는 일은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도울 때 도와준 사람으로부터 그만큼의 보상을 바라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순수하지 않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도와주는 것은 투자일 뿐입니다. 도움을 주는 것은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이 없이 그냥 베푸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 이렇게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도움 받는 입장이 되면 사회적 약자 취급을 받으면서 불편한 시선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돕는 손길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도움 받는 일이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사회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부담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되갚아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느끼면 신앙적으로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투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움을 주면서 더 큰 뭔가를 얻어내시려는 의도가 하나님에게는 전혀 없으십니다. 그렇기에 시편 저자처럼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헤를 베푸소서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라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반응은 되갚는 것이 아니라 “잠잠하지 아니하고 주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자”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주의 돕는 손길은 따스합니다. 그 손길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지 우리를 돌아볼 때입니다.

“말씀의 위력” (시편29편 묵상) – 4/13/2020

우리가 말한대로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란 생각을 잠시동안 해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해서 저주를 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물론 남을 축복하는 말을 해서 모두 다 행복해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미움과 증오, 분노로 쏟아낸 저주의 말들이 온 세상을 덮을 것을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성품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과 성급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됨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입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이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다는 뜻이 아닙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빛이 생기기에 힘이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공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즉흥적이지 않습니다. 느낌과 기분에 따라 가볍게 내뱉는 소리가 아닙니다. 급한 마음에 내뱉은 후에 곧바로 후회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신다”고 합니다. 백향목을 꺾을 정도로 소리가 크다는 뜻이 아니라 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백향목일지라도 하나님의 소리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꺾이는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른다”고 합니다. 화염은 산불처럼 불이 온 산을 태우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리는 그러한 화염까지도 뚫고 전달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위력입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하나님이 공급하신 물을 먹으면서 생존했습니다. 사막일지라도 하나님의 위력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준 놀라운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장애물을 뚫고 우리에게 말씀을 전달하십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로 다가오셔서 자신의 뜻을 전하십니다. 우리의 귀에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까지 뚫고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모든 것을 꺾을 수 있고, 떨리게 할 수 있고, 뛰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어떤 혜택을 누릴까요?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우리를 살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싶어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소리가 우리에게 들립니다. 말씀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즐거워할 때 우리의 영혼은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의 사회적 거리 두기 앞에서 우리는 말씀과의 거리를 좁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앙의 기쁨” (시편28편 묵상) – 4/11/2020

우리는 살면서 기쁨이 얼마나 삶에 활력을 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기쁨을 느끼는지 확인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어제 하루 동안 어떤 기쁨이 있었나요?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는 웃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더욱 심각해지는 현재의 상태에 한숨만 터져나올 뿐입니다. 기쁨이 넘치는 삶을 원하지만 우울한 현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라고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의 자세가 얼마나 진지하고 절박한 지를 보여줍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평범한 생활에서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이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그에 맞는 기도의 자세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삶에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의 기도도 달라집니다. 우리 집에 불이 났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목이 쉴 정도로 절박한 심정으로 소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를 막고 있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요? 불을 꺼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는데 사람들이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 더 절망할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주께 부르짖을 때” 제발 하나님이 귀를 막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그는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 것”이라 말합니다.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는데 전혀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과연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는 절박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응답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절대 아닙니다. 응답하지 않으실 것 같은 의심의 눈초리를 하나님께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절박한 매달림입니다. 여러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방법 밖에 없다는 심정으로 매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를 절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고 간증합니다. 또한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의 마음을 그는 “내 마음이 크게 기쁘다”고 대변합니다. 절박할 때 기도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건강한 반응이라면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반응은 은혜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채워진 마음의 기쁨은 교회 공동체 전체로 확산됩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라면서 신앙 공동체를 품고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기쁨으로 채워지면 우리는 동료 신앙인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참된 공동체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나타납니다. 신앙의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공동체를 살리는 기적의 샘물입니다.

“한 줄기 빛” (시편 27편) – 4/10/2020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매일 3만명을 넘고 있으며, 사망자도 늘어만가는 현실 앞에서 미국 전체가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길고 긴 어둠의 터널 끝에 아주 작은 불빛이라도 보고 싶은데 아직까지는 그것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둠이 곧 끝날 것이란 희망은 사람들 마음에 싹트고 있습니다. 갑자기 어둠 속에 있게 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듯이 지금의 어둠이 아무리 진할지라도 우리는 이 속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 고백 중 하나는 시편 저자가 말하듯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입니다. 어둠만이 짙게 드리운 현실 속에서 빛이신 하나님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물에 걸린 새가 자유를 얻듯이 죄의 사슬에 얽매인 우리가 자유를 얻도록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나온 신앙 고백이 아닙니다. 어둠과 죄악이 짓누르는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시편 저자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고 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한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현실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환경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과 구원’이라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짓눌린 우리의 마음을 이겨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시편 저자는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하면서 흔들리는 자신의 내면을 다잡고 있습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다”는 말은 어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의지는 하나님이 ‘빛과 구원’이심을 믿기에 나올 수 있는 신앙적 표현입니다. 온 세상을 아무리 어둠이 집어삼킨다해도 한 줄기 빛만으로도 그 어둠을 뚫을 수가 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둠을 얼마든지 뚫고 우리 안에 새로운 희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라면서 스스로를 굳세게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편 저자가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라고 말하듯이 우리 자신의 마음을 향해 주를 찾으라 명령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찾는 열정을 우리는 지금 회복해야 합니다. 심지어 세상이 나를 버릴지라도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이란 마음으로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말아달라”는 애절함을 하나님께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과 구원이시기에 어둠뿐인 우리 삶에 한 줄기 빛을 주십니다. 이 소망을 갖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향해 “너는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리라”고 외칠 수 있습니다. 내일이 아닌 오늘 이 순간 우리의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신앙 단련” (시편26편 묵상) – 4/9/2020

우리는 건강한 삶을 원합니다. 신체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 음식을 조절하고 적당한 운동을 해야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 좋은 생각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시련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칠 뿐 아니라 심각한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한 후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란 두려움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상 많은 부분에서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볼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어떤 분이 나이가 삼십대 중반이라 가볍게 이길 줄 알았는데, 인공호흡기를 달 정도로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합니다. 건강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중환자실에서 집중치료를 받은 후 회복되어 퇴원을 한 후에 소감을 밝혔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합니다.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같은 마음가짐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하루 하루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새삼스럽게 느꼈다는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저 또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하면 신앙적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란 고민을 한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향해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라 기도합니다. 신앙적인 단련을 원하는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일까요? 신앙 단련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무더운 날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쾌적한 실내에서 멋진 강의를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오히려 안락하고 편안한 환경을 뒤로 하고 무더운 날 강렬한 햇빛 아래에서 체력 단련을 위해 집중 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 단련은 달갑지 않은 훈련입니다. 그런데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신앙적으로 단련시켜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신앙 단련이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그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앙 단련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 과정을 거치면서 얼마나 단단해지는지를 시편 저자는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신앙 단련을 시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나요?

신앙 단련이 주는 유익에 대해 시편 저자는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적으로 훈련을 받으면서 세상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신앙 간증입니다. 신앙 단련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인생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 아닙니다. 시편 저자처럼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세상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고 성공하는 인생을 꿈꾸는 사람은 신앙 단련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주와 함께 사는 인생, 주와 함께 걸어가는 인생을 꿈꾸는 사람은 신앙 단련을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신앙 단련으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에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신앙 단련으로 우리의 신앙심이 더욱 더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힘” (시편25편 묵상) – 4/8/2020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정 불화가 발생한다는 뉴스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학교와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가족 구성원들이 온종일 집 안에 함께 머물러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 어떻게 의사소통해야 하는지, 어떻게 서로를 용납해야 하는지를 놓고 의견 차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족의 대화가 회복되고 서로의 생각을 알게 되고 친밀감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일년 동안의 대화를 지금 다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외로움과 싸우고 있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시편 저자는 “나는 외롭고 괴롭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 마음의 근심이 많다”고 말합니다. 외로움과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외부의 힘에 의해 발생하는 재앙 속에서 우리는 혼자 있는 것 같은 쓸쓸함과 남과 공유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합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육체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진통제를, 마음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상담을 이용합니다.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외로움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를 괴롭힐 수가 있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신앙은 어떤 힘을 갖고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어떤 것도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신앙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봅니다”고 자신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실제로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다른 곳을 향하던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흔들리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신앙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외로움과 고통이 생기자 아침 안개처럼 신앙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의 힘이 무엇인지를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진짜 신앙을 소유하면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더욱 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시편 저자처럼,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해 달라”고,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의지합니다. 신앙의 힘은 평안할 때보다 어렵고 힘들 때 더욱 빛이 납니다.

지금 우리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과연 내가 갖고 있는 신앙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를 스스로 점검해봐야 합니다. 신앙이 아무런 힘을 내지 못하는지, 아니면 외로움과 고통까지도 극복할 정도로 신앙이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신앙의 힘을 실제로 체험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신앙의 문” (시편24편) – 4/7/2020

우리는 경쟁이 활발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과 경쟁하는 일은 달갑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경쟁에서 항상 승리할 수만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지만 언제 패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패배한 자로서 겪어야 할 아픔이 항상 같지는 않지만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혜택을 받은 것 같으면 우리는 매우 불편한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누군가가 특권을 누리면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킵니다.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받는 일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우리가 어떤 기준을 통과한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과 경쟁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구원을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엡2:8)이라 말합니다. 구원을 경쟁에서 이긴 결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기만 합니다. 경쟁을 통해 구원을 얻으면 공평할텐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 불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다니 불공평하다는 볼멘 목소리가 터져나옵니다. 하지만 은혜를 아는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얻은 구원을 너무도 귀하게 여깁니다. 공평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에 구원을 선물로라도 받을 수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로 얻은 구원의 감격을 아는 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다음이 무엇이냐란 질문 앞에 자신을 세웁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 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란 귀한 선물을 받은 이들을 향해 던지는 도전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시편 저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한 자”로 살아야 함을 촉구합니다. 은혜의 선물을 손에 쥐고 있을 뿐 아니라 은혜에 맞게 살아가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치열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그런 신앙인을 향해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을 것”이라 말합니다. 이들이 바로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문에 들어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 신앙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그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은혜의 선물로 그 문을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답게 우리는 삶으로 증명해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서도 우리는 의연하게 신앙의 문에 들어선 사람임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신앙인다운 모습으로 오늘 하루도 우리는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회복을 꿈꾸며” (시편 23편 묵상) – 4/6/2020

건강을 잃으면 우리는 다시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살림이 어려워지면 우리는 넉넉한 생활을 꿈꿉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치료제가 나오면 다시 예전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이 올 것을 기대하지만 지금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불안과 답답함을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날에 대한 소망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많은 부분에서 달라집니다. 그 중 으뜸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심을 믿게 되면서 그분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삶의 내용이 됩니다. 마치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궁금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누리는 삶의 풍요로움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시편 저자는 그것이 얼마나 풍성하지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표현합니다. 정말 부족함이 전혀 없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 후에 삶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결과일까요? 부족함이 크게 보였던 삶이 변하여 이제는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기에 부족함이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음을 시편 저자는 깨달은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목자가 되신 후에 일어나는 삶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멋지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의 삶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받아들인 모든 사람이 꿈꾸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때로는 암흑기에 접어들 때가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두침침한 터널을 지나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셨는데도 어떻게 불안하고 두려운 환경에 처할 수 있는가란 실망감이 생길 수 있지만 이것이 엄연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이상적인 삶과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괴로운 현실 속에서 우리의 신앙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편 저자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답을 내립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회복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주의 인도하심을 꿈꿀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암울한 현실은 영원하지 않지만 막연히 좋아질 것을 기대하기보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지금 여기서 회복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시편 22편 묵상) – 4/4/2020

우리는 때로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출구를 찾지 못한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현실이 답답하면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탁 트인 바닷가를 보고 싶어도 눈치가 보여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나갈 수 있음에도 나가지 않는 것과 나갈 수 없어서 나가지 못하는 것은 매우 다른 상황입니다. 자유로운 사회이지만 자유를 억제해야만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답답함은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답답한 현실에서 억울한 일까지 겹치면 우리는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잘못이 없음에도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작은 실수일 뿐인데 대가를 너무 크게 치르면 그것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혔어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인데, 평범한 삶에서 너무도 큰 피해를 당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피해를 입었어도 호소할 곳이 없다면 마음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낙심합니다.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겹치면 마음이 우울해집니다. 우울한 마음이 커지면 스스로 그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이로인해 많은 부작용들이 우리 일상을 뒤흔들어놓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 상태로 인해 가족이 피해를 입게 되고 누군가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고통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인터넷 세상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댓글을 통해 인격 살해를 서슴치 않는 현상은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시편 저자는 답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함으로 마음이 우울한 상태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그는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인격 살해에 가까운 비방과 비웃음으로 그의 인격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을까요?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온 것인지를 놓고 고민할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분석할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마음이 우울함에도 기도할 수 있다니 그는 대단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편 저자는 응답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더 깊은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도 더 깊은 신앙으로 답답한 현실을 이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