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장 3절-5절 “주님을 향한 열정이 어느 정도입니까?” 2021년 12월 3일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예수님의 제자 중 이름이 아닌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로 불려진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두 번이나 ‘그 다른 제자’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일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랐던 제자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곁을 다른 이에게 내주지 않을만큼 열정적으로 그를 따랐던 제자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모든 제자를 아낌없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제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도 곁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어머니인 마리아를 맡겼을 정도로 신뢰를 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있던 이 다른 제자는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그는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는 가만히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다급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그는 무덤까지 전속력으로 달렸습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란 요한복음서의 기록을 보더라도 그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무덤을 향해 달리던 그의 마음은 무척 혼란스러웠고 복잡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생각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정말 무덤에 없는지를 확인하고픈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도착한 그는 열린 무덤 안을 들여다 볼 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라면서 그의 행동을 주의깊게 관찰했습니다. 밖에서 허리를 숙이고 무덤 안을 관찰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물론 본문은 그 이유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심정을 추측할 수는 있습니다. 뭔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러 왔음에도 무덤 안으로는 섣불리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의 마음에 뭔가 두려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혼자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심적인 공포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무덤 앞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온 것은 예수님의 시체가 그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지만 자신 안에 스며든 두려움이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있는지를 빨리 확인하는 것이 당장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그것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마음이 얼어붙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따라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무덤에 도착했던 그의 심적 상태는 도저히 혼자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도 곁에서 지켜봤던 ‘그 다른 제자’가 무덤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 하나로 그의 곁을 지켰던 그의 마음이 무덤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덤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체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뒤덮어서 그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무덤과 시체 앞에서 멈추어버린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있지만 어떤 약점으로 인해 그것이 멈출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약점이나 두려움이 우리의 신앙을 옭아매는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사고로 인해 식어버리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갖는 약점입니다. 우리의 숙제는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습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이겨내고 주님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은 그 무엇으로든 막힐 수가 없을 정도로 더욱 강력해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2절 “무덤에 시체가 없다니” 2021년 12월 2일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빌라도 또한 그것을 확인하고서 아리마대 요셉에게 시체를 넘겨주었습니다.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새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이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무덤에 안치된 후에는 아무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생명이 끝난 상태이기에 무덤에 묻힌 시체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읽은 본문은 무덤 이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입니다. 본문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무덤에 와서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본 것입니다. 그녀는 무덤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곧바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어도 시체가 없어졌음을 그녀는 알았던 것입니다. 누군가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쳤던 유대인들로 추정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증오가 너무 커서 시체까지도 가만두지 않으려 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까지도 보존하지 못한 상황이 너무도 가슴아팠을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도 막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의 시체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마음이 먹먹했을 것입니다.

 무덤에서 시체가 사라졌다면 막달라 마리아가 추정하듯이 누군가가 가져갔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체가 알아서 어디론가 가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생명이 없는 몸이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 시체를 가져간 것 외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말한 마리아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반응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첫 번째 목격자로 등장해서 무엇을 본 것인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무덤에 예수의 시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가져갔다고 추정을 했을 뿐입니다. 그녀가 본 것은 무덤에 예수의 시체가 없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무덤에서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 마리아는 근심어린 마음으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를 찾아가 털어놨지만 시체가 무덤에 없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은 부인할 수가 없음을 본문이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고 요셉에 의해 새 무덤에 묻힌 것도 사실이지만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무덤에서 시체가 없어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시체를 누군가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시체 스스로 움직인 것입니다. 시체가 움직이려면 먼저 살아나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만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시체가 다시 살아났을 것이라 상상도 못했기에 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했던 것일 뿐입니다. 그녀가 말한 것은 단지 추정에 불과했습니다. 시체가 없어지자 가장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가져갔다고 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리아가 본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녀가 말한 것은 진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시체는 살아서 스스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가져간 것이 아니라 시체가 살아나 어디론가 이동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인데, 예수님은 직접 살아나 스스로 움직이셨습니다. 마리아도 후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모든 의문점이 풀리게 됩니다. 예수의 시체는 사라졌던 것이 아니라 살아나서 움직였던 것입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목격자의 모습은 부활의 신호탄이기에 우리는 이 사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부활은 시체가 무덤에 없었다는 것에서 출발함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9장 41절-42절 “새 무덤에 묻히시다” 2021년 12월 1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등장으로 안전하게 그의 시체가 보존되었습니다. 장례의 마지막 절차인 무덤에 묻히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볼 때에 요한복음서의 기록은 특색이 있습니다. 무덤에 묻히는 과정을 좀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단락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를 일컫는 말)에 비해 묘사가 매우 상세합니다.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을 언급한 것과 ‘동산’이란 위치는 요한복음서만의 묘사입니다. 또한 ‘새 무덤’을 묘사하면서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이란 수식어를 붙여서 강조한 것도 특색입니다. 당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중죄인을 일반인들이 묻히는 무덤에 두는 일을 유대인들은 싫어했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무덤에 예수의 시체를 묻은 것을 유대 지도자들은 만족했을 것이라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아우성을 쳤던 유대 지도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예수를 위한 새로운 무덤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동한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일반 범죄자들이 묻히는 곳에 얼마든지 예수의 시체를 둘 수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또한 안식일이 곧 다가오는 시간에 예수의 시체를 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아무 곳에나 묻을 수도 있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손길로 해결이 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그 안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무덤이 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에 두니라”는 본문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상황이 마치 퍼즐이 맞춰지듯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이 하나님의 섭리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새 무덤’의 주인은 아리마대 요셉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서는 무덤의 소유권이 누구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준비한 것이 아님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무덤이 기다렸다는듯이 그 곳에 하나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본문 저자는 하나님의 내밀한 섭리를 강하게 드러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는 성경의 방식이 다양함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행동하시는 장면을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개입을 전혀 언급함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도록 상황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목숨이 끊긴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고 모든 것을 누군가의 손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시간과 장소, 환경을 다 조성하셔서 예수의 시체를 안전하게 새로운 무덤에 묻히게 하셨음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삶에도 그분의 섭리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정황을 보면서 느낄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전체를 관망하시면서 적절하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섭리가 멈춘 것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쪽으로만 맞추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우연의 일치로만 보는 것도 신앙적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한 가운데서는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뒤돌아보면서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삶에 남기신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너무도 귀한 신앙적 유산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9절-40절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 2021년 11월 30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허락받은 아리마대 요셉 이야기는 사복음서 전체가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니고데모의 등장은 요한복음서만이 다루고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란 언급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인물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주요 인물로 니고데모가 등장한 것을 비롯해서 7장50절에서는 예수님을 옹호하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사람을 세 번에 걸쳐 언급할 정도로 비중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았을 때에는 그의 호기심에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7장50절에서는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예수님을 찾아와 그의 시체를 소중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에서 그의 마음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등장한 것을 볼 때에 그의 예수님을 향한 신앙심이 확실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에는 밤에 몰래 찾아왔지만 이제는 다른 이들이 다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치룬 것은 그의 변화가 얼마나 확실한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백 리트라(약30킬로그램)나 되는 향품을 가져와 예수님을 위해 사용한 것과 유대인 장례법을 따라 세마포로 예수의 시체를 감싼 것을 볼 때에 그의 신앙심이 매우 돈독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그의 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모습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고위층에 속한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니모데모에게는 예수님이 존귀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존경을 표현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중죄인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의 시체를 돌보는 그의 모습은 이런 아쉬움까지도 느끼지 않게 할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로마 군인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고 유대인들에 의해 철저히 버려진 예수님의 시체를 이렇게 존귀하게 다루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그의 신앙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물론 니고데모가 부활을 믿고 이렇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사건 뒤로 그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장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 그였기에 이 뒤로도 예수님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는 그의 모습은 신앙적으로 큰 교훈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의 행위를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르게 행동합니다. 니고데모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긴 것처럼 우리의 태도 또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존귀히 여기는 마음이 진실하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 크게 변화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 주님을 존귀하게 여기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란 고백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라 삶에서 이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과연 예수님이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완벽한 삶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갖고 주님을 높이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 “예수의 제자임을 밝히는 신앙” 2021년 11월 29일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십자가 처형을 당한 예수의 시체를 치워달라는 요청을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했습니다. 당시 로마 법에 의하면 사형당한 사람의 시체를 그의 친족들이 가져갈 수 있게 했지만 예수님의 경우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처형될 때에는 시체가 제대로 처리되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 시체가 매우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전적으로 총독인 빌라도의 결정에 달려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리마대 사람인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합니다. 그의 허락을 받고나서 요셉은 시체를 가져갑니다. 그런데 본문은 요셉이 예수의 제자란 사실을 언급하면서 다른 복음서와 달리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란 설명을 덧붙인 것입니다. 의도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인상을 풍깁니다. 예수의 제자였지만 그동안 그 사실을 숨겨왔던 요셉인 점을 강조한 것은 그의 달라진 모습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확실히 달라졌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의 시체를 가족들이 가져갈 수 없었고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앞장선 것은 그의 신앙에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이 두려워 예수의 제자됨을 숨겨왔던 그가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었다는 점이 놀라울 뿐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 유대인들은 공포 정치를 펼쳤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요9:22)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출교란 유대 사회에서 축출당하는 것으로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처벌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이들이 이를 무서워해서 공개적으로 예수의 제자됨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요12:42)는 장면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출교를 당하는 일이 어느 정도로 두려운 일인지를 당시 사람들은 잘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내면 출교를 당하게 되기에 이를 숨겼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같은 이유로 예수의 제자됨을 숨겼던 것입니다. 출교라는 엄청난 압박에 짓눌려 신앙이 질식당할 정도였습니다. 출교까지 감내하면서 예수의 제자됨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요셉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출교도 두렵지 않을 정도로 담대해졌습니다.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이 변화에 본문이 주목하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면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하지만 이를 드러내는 순간 상당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환경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압박을 가합니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쉬울까요? 아리마대 요셉처럼 두려움으로 인해 이를 숨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셉처럼 우리도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위축된 신앙 생활을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의연하게 예수의 제자됨을 밝히고 모든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갑자기 이렇게 달라진 모습을 보인 이유를 본문이 설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다양한 이유로 사람을 변화시키실 수 있음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함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론 위축되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임을 숨길 수 있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를 변화시켜 당당히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항상 품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임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6절-37절 “이 일이 일어난 것은” 2021년 11월 26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을 기독교 신앙은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 죽음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고 외쳤고,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2:38)고 촉구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세상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어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군인들은 이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채 자신들의 임무에만 충실했습니다. 예수가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알지 못한 그들은 그저 하나의 행악자로만 그를 대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될 정도로 극악한 죄를 지은 죄수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시체를 치우라는 명령을 받은 그들은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의 다리를 꺾어 죽음을 앞당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죽은 것을 확인한 그들은 그의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의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는 이를 구약 성경의 예언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아니한 것을 구약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에는 또 하나의 장면이 포함됩니다. 한 군인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일입니다. 피와 물이 나올 정도로 깊이 찔렀던 그 장면을 요한복음서는 구약 성경의 또 다른 성취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고 예언한 스가랴12:10의 성취로 해석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 일이 일어난 것’이 단순히 로마 군인들의 의지와 임무 수행으로 벌어진 것이 아님을 피력한 것입니다. 한 군인에 의해 예수님의 옆구리가 창으로 찔렸지만 이 또한 우연히 일어난 것이거나 군인의 의지로 행해진 것으로 이해하면 안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죄수의 다리가 로마 군인들에 의해 꺾였던 것처럼 예수님에게도 그 일이 일어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한 군인들이 그의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미 죽은 상태였기에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과연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요한복음서는 하나님의 예언 성취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어떤 사소한 일도 하나님과 무관하게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이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언급 자체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도 요한복음서가 ‘이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기록한 것은 예수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철저히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드러내려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약해져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군인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이 단지 사람의 결정과 의지로만 발생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동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때론 우리에게 고통과 상처가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고 계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비참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도록 하나님이 하셨음을 우리가 믿는다면 비록 우리의 환경이 열악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소한 영역까지도 돌보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셨듯이 우리의 삶도 세밀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인도하심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능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5절 “믿을 수 있는 증언” 2021년 11월 25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로마 군인에게 붙잡혀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되었고 사형을 언도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세세한 이야기들을 자기만의 색깔로 그려낸 것을 우리는 요한복음서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당시 그 옆에서 지켜보던 여인들과 사랑하시는 제자 이야기는 이 복음서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시각입니다. 그 제자가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그의 증언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라면서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십자가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보았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보았느냐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것의 확실함입니다. 예수님은 기절하셨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으셨다는 점을 ‘이를 본 자가 증언’하고 있다는 것으로 강화시킨 것입니다. 증언하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그 증언이 참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습니다. 증언했다는 객관적인 사실과 그 증언이 참이라는 주관적인 확신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목격한 자로서 증언했고 그 증언의 진실성을 강조한 것을 볼 때에 증언하는 내용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이에 대해 한 번 더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라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 자로서 증언했고 그 증언이 참되며 자기가 말하는 것이 참인줄 스스로 알았다고 하면서 증언자의 진실성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이 교회 공동체에 너무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이 요한복음서를 쓴 사도 요한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크게 받았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증언자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증언이 얼마나 참된 것인지를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면서 자신을 객관화시켜 더욱 더 자신의 증언의 진실함을 부각시키려 했습니다. 소문을 들은 자로서 증언한 것이 아니라 본 자로서 증언했기에 이를 훼손하거나 왜곡시키는 어떤 시도와도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저자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로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드러냈습니다. 그의 증언을 듣는 이들이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증언의 진실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보았고 그것을 이렇게 하나의 글로 기록한 것을 후대의 사람들이 듣고 읽으면서 믿음의 반응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목격자로서 이것을 쓴 저자의 심정은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는 개인적인 호소가 아니라 자신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믿고 따르도록 하려는 간절함이었습니다. 참된 증언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사실성을 객관적으로 남긴 글이지만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믿음으로 반응해야만 한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객관적인 일을 기록했다면 그것을 읽고 이해하면 될 일인데도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한다고 밝힌 것을 볼 때에 이것이 단순한 정보 차원이 아니라 신앙 문제임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증언자의 진실함을 강조하면서 믿을 수 있는 증언을 하고 있음을 독자에게 호소하는 것은 믿음의 반응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고 수긍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증언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려는 본문 저자의 열정을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는 저자의 열정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예수님의 증언자로서 세상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믿는다면 이제부터 그분의 증언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증언자처럼 우리도 ‘본 것을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열정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이 열정이 우리로 더욱 더 예수님의 증언자로 서 있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1절-34절 “죽음이 확실해야 하는 이유” 2021년 11월 24일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우리는 요한복음서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부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만큼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만약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면 그의 부활도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부활에 죽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도 사역하시는 동안 자신이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자신이 육체적으로 죽을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는 묘사처럼 육체적으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미 죽은 예수님을 놓고서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는 요구를 빌라도에게 했습니다. 죽지 않을 수 있었기에 다리를 꺾어서라도 빨리 죽게 만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오랜 시간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런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렇게 서둘렀던 것은 예수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선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안식일이 겹치는 가장 큰 날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그들은 빨리 그 상황을 정리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는 안식일과 십자가 죽음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들이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군인들을 시켜 십자가에서 시체를 치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군인들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있던 세 사람의 죽음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양 편의 죄수들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고서 그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즉시 그들은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차례가 되어 그의 다리를 꺾으려 했지만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그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어느 정도로 깊이 찔렀는지 알 수 없지만 피와 물이 나왔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확인사살을 하듯이 잔인하게 시체를 훼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하냐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여러 번에 걸쳐 보여주고 있기에 이 점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영혼이 떠나가셨다는 설명과 이미 죽은 것을 군인들이 보았다는 점, 그리고 창으로 그의 옆구를 찌른 행위를 종합해보면 요한복음서 저자가 예수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했느냐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너무도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죽음이 확실해야 부활도 더 확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불확실해지면 부활도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지어낸 것이 절대 아님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이 사실에 무척 강조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행13:28)란 역사적인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분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했는지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훼손하려는 어떤 주장도 우리는 멀리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 죄를 지시고 육체적으로 죽으신 예수님을 교회는 조금도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향해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우리는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강력히 외쳐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세상에 구원을 알리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이 사실은 증명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임을 교회는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확실함을 우리는 누구 앞에서든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9장 28절-30절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2021년 11월 23일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죽음 앞에서 사람은 한없이 나약해집니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감정 상태는 복잡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묵묵히 죽음을 수용하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에 대해 성경은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예수님의 죽음을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주목하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그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마디 말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말을 하셨는데,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어떤 상황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이 그에 대해 예언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이 말을 하셨던 것입니다. 목마르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님의 입에 대주었습니다. 목마름을 해결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수를 끝까지 경멸하려는 행동을 사람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구약 성경의 성취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란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갖고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경멸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말과 함께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란 설명과 함께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란 말을 연결한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이 무엇을 담아내고 있느냐면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성취하셨다는 그의 만족감입니다. 죽음의 그늘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만족감으로 이겨내셨던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당당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만 집중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이 주는 암울함, 공포,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으시고 그것에 맞서 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신 예수님은 죽음의 어떤 횡포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호흡이 끊기는 순간까지 그는 오직 하나에만 가치를 두셨습니다. 하나님을 뜻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란 말을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란 부분이 매우 인상적인데 죽는 순간까지도 이를 마음에 새겨두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볼 수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담대하게 해낼 수가 있습니다. 죽으면 과연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하나님의 뜻도 소용이 없다는 잘못된 허무주의에 맞서 싸우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조차도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해결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전력을 다하셨던 예수님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해도 이 마음을 붙들고 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이 땅을 살아간다면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좀 더 당당해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27절 “새로운 가족 관계” 2021년 11월 22일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사랑하는 아들이 누명을 쓰고 국가 권력에 의해 비참하게 목숨을 잃게 된다면 부모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다는 자책감과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가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채 죄도 없는 아들이 당시 가장 비참하고 모욕적인 십자가 형벌을 당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은 감정 상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이 건조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로서 느꼈을 아픔을 짧은 문장 하나로도 표현할 수가 있었음에도 의도적으로 감정 상태를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인간적인 감정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아들과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를 기록한 것인데, 그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어머니를 걱정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아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달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형제들이 아닌 자기를 믿고 따르던 제자들 중 하나에게 어머니를 맡긴 것은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 관계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삶의 가치입니다. 예수님도 이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혈육을 넘어 신앙으로 맺어질 새로운 가족이 형성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요17:12)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란 곧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을 지키셨다고 합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신 것도 그들을 지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들이 곧 예수님이 지켜야 할 새로운 가족이었던 것입니다. 이 새로운 가족 안으로 어머니가 들어올 수 있도록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기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또 다른 아들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기를 따르는 제자에게 맡기셨습니다. 혈육이 아닌 믿음의 가족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머니도 새로운 가족 안에서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혈육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생명의 주로서 믿고 따라가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육신의 어머니일지라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혈육 관계가 믿음의 가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안됨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초대 교회를 형성했던 사람들 중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행1:14)도 있었음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혈육 관계가 예수를 따르지 못하게 막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맡기셨던 예수님의 의도가 사도행전에서 명백히 밝혀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일지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믿음의 가족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새로운 가족들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6:25)면서 남편의 아내 사랑도 신앙 가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혈육 관계까지도 신앙으로 맺어진 새로운 가족 관계 속에서 봐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