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1절-3절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2021년 11월 8일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존경을 받던 사람이 한순간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쏟아지는 온갖 야유와 멸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조롱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맞는지를 확인하지 않은채 대중 심리에 휩쓸려 비난을 퍼붓는 일이 생깁니다. 한 사람의 인격이 완전히 파괴될 정도로 모욕과 멸시는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낙인찍었기에 그가 무슨 말을 해도 핑계와 변명만 하는 파렴치한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이런 극한의 수모를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가 당한 수모와 모욕이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를 행동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했습니다. 단순히 몇 대만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때렸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학자들은 채찍에 날카로운 것을 덧입혀서 때렸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채찍을 맞음으로 느꼈을 고통이 어머어마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다고 했던 빌라도가 이렇게 가혹한 처벌을 가한 것은 예수로 더 큰 모욕을 느끼게 할 목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상상하면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군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스스로 밝힌 예수를 조롱하기 위해 왕관과 왕의 옷을 입혔습니다. 가시로 만든 관에다 겉모양만 왕의 옷처럼 보이는 낡은 것으로 입혔습니다. 이런 행위가 조롱과 멸시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연이어 나옵니다. 예수의 뺨을 때리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는 상대의 인격을 짓밟는 비열한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도 인정했듯이 예수님은 어떤 잘못이나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합당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했을까요? 유대인의 왕이란 신분 때문에 당한 것이었을까요?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단순히 시대적인 불운을 타고났기 때문이었을까요? 모두 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의 공격을 최대치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죄가 예수님의 인격을 말살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그에게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죄가 없던 예수님이기에 이런 모욕과 멸시를 당하게 되면 그 인격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공격했던 것입니다. 죄의 잔인함이 민낯을 드러낸 순간을 우리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이런 대접을 받고서도 사람이 망가지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를 예수님에게서 보고 싶어한 죄의 비열함이 드러난 것입니다. 과연 어느 누가 이런 수치와 모멸감 앞에서 냉정함을 유지할 수가 있을까요? 빌라도와 군인들은 죄의 하수인이 되어 예수님의 인격을 말살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이 욱하는 마음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그들을 제압했다면 죄에게 지고 마는 것입니다. 죄가 이것을 노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와 군인들을 힘으로 제압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온갖 치욕과 멸시를 온 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억울함과 분노가 치솟아 이성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서 이루셔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억울함과 모욕, 수치와 멸시를 감당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런 고통을 겪었고 그것을 이겨낸 모습들이 나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일들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이로서 묵묵히 모든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왜 이런 대접까지 받으면서 주의 길을 가야 하느냐란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사명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8절-40절 “아무 죄를 찾지 못했음에도” 2021년 11월 5일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행악자로 고발당한 상태에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은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왕으로 태어났음을 밝히셨습니다. 또한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도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와의 차별성을 강조하시면서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들을 것’이란 말을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것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심문을 끝내버립니다.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빌라도는 그에게 죄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점을 그는 유대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알립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행악자로 고발했고 사형에 처해질 것을 요구한 상황에서 빌라도가 이런 선언을 했으니 그들이 반발할 것은 예상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던 빌라도는 노련한 정치인답게 대안을 제시합니다. 그는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유대인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떠넘기는 고도의 정치술을 발휘한 것입니다. 예수에게 죄가 없다고 공식 선언을 해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예수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죄가 없음을 확신했다면 그냥 놓아주면 될 일인데, 예수를 사형에 처해달라고 고발한 이들에게 ‘그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기에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예수가 아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죄가 없는 예수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책임도 회피하고 집단적 반발도 진정시키는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책략을 발휘했지만 진리에 대한 감각은 없었고 무고한 자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었으니 진리가 바르게 세워질 수가 없었다는 점은 너무도 분명해집니다. 이런 사악한 권력자에게 심문을 받은 예수님의 처지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죄를 찾을 수가 없는 예수를 사형에 처하게 하고 강도죄로 감옥살이를 한 바라바를 놓아주게 했으니 그들의 사악함 또한 너무도 컸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 주변에는 온통 다 죄인들 뿐인 것을 보게 됩니다. 죄인들이 모여서 무고한 의인을 죽음에 내몰고 있는 형국입니다. 죄인들이 의인을 사형에 처하려는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런 죄를 찾지 못했음에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잔인함이 죄의 진짜 모습임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교회는 항상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미워하는 줄을 알라”(요15:18)는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반드시 기억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어떤 죄도 찾을 수가 없었던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한 세상의 모습을 교회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점 또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강도였던 바라바가 예수님으로 인해 풀려난 것이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 때문에 죄로부터 풀려날 수가 있습니다.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죽음으로 세상은 살 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고한 자로 억울하게 죽게 된 것에 대한 분노를 교회가 느낄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는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7절 “나라, 왕 그리고 진리” 2021년 11월 4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였습니다. 그는 또 다시 질문하면서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내가 왕이니라’고 답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왕이 곧 예수님이란 뜻이 됩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 이야기를 했고 그 나라에서 자신이 왕이라는 것인데 설득력이 전혀 없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입니다. 빌라도 입장에서 그의 말은 허무맹랑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서 헛된 꿈에 사로잡혀 사는 이상한 사람 정도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실한 말을 계속해서 빌라도에게 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란 언급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것이 틀림없음을 강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나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이나 유대 나라 같은 모양은 아니지만 분명히 예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존재했습니다. 그 실체가 예수님 자신이었고 그가 왕으로 이 나라를 이 땅에 이식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모든 말과 행위들은 다 자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실현하기 위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왕으로 오셨고 왕으로 사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행악자로 고발당한 상태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빌라도에게 넘겨져 취조를 받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유대인들에 의해 버려진 상태이고 왕으로 세상에 왔다고 하지만 세상이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저히 왕이라 여길 수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예수님은 왕이시고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는 말로서 답을 주셨습니다. 또한 그는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면서 설명을 덧붙이셨습니다. 나라, 왕, 그리고 ‘진리’가 하나로 묶여져 있습니다. 예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는 이 나라의 왕이시며 ‘진리’로 이 나라가 세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하시면서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진리’이고 성령이 오셔서 이 진리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깨우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나라가 어떤 식으로 이 세상에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며 진리 그 자체로서 이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진리로 세워진 나라에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그 열매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성령은 이 사람들이 예수의 나라에 들어와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도록 이끄시는 일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아름답게 드러난 현장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초대 교회 위에 임하셔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셨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변호하고 증거하는 일에 생명까지도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사람들에게 심어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곳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의 나라를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에 실현하도록 부름받은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알리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이며 선교임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통해 성령은 진리로 예수님의 나라를 지금도 세우고 계심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6절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2021년 11월 3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이 활동하실 당시 로마 제국은 세계 최강국이었습니다. 유대를 비롯한 주변 모든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유대는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가 임명한 유대 총독에 의해 통치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 총독인 빌라도는 유대 사회에서는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예수란 사람이 죄인의 신분으로 자신의 법정에 끌려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바로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서 있자 빌라도는 매우 의기양양해졌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너의 동족이 너를 이렇게 고발했느냐’고 조롱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왕 대접도 못받을 뿐만 아니라 죄수가 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형편없이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말로 빌라도의 거만한 태도에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는 것은 힘이 없거나 약해서 이렇게 끌려온 것이 아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세상 나라 방식으로 싸우지 않았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시 세상 나라들은 군사력으로 남의 나라를 점령했습니다. 로마 제국도 같은 방식으로 수많은 나라들을 지배했습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집어삼키는 일이 빈번했던 시대였지만 예수 나라는 그렇게 세워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가져오신 나라는 세상 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이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말로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속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요15:19)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세상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이 자기 편이라 여기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을 때에는 그의 나라가 세상의 것이 절대 아님을 보여 주려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의 나라가 어떠한 것인지를 세상 나라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의 나라가 절대 자기 편이 아니란 사실을 세상 나라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 나라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나라를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 결정체가 예수 공개 처형입니다. 세상 나라가 총공세로 예수와 그의 나라를 없애겠다고 달려들었는데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그것이 뚜렷이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예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나라의 실패가 아니라 세상 나라의 무기력함을 알려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모든 방식을 다 동원해서 예수와 그의 나라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에 살고 있었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나라에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편에 섰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 편에 선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나라에 속한 자가 되었다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 나라 방식과는 다른 예수 나라 방식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배우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하지만 이런 신앙 생활이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합니다. 세상 나라 방식대로 사는 것이 더 편합니다. 하지만 예수 나라에 속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방식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무엇을 익혀야 할까요? 예수 나라의 속성이 무엇인지, 세상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예수 나라에 속한 자다운 것인지를 하나씩 알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5:17)는 말로 하나님 나라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 속한 자로 살면서 먹고 마시는 의식주 문제까지도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에 속하지 아니한 신앙인으로 사는 실제적인 방식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33절-35절 “누가 내 삶의 중심인가” 2021년 11월 2일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한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님을 심문하기 시작한 빌라도가 처음으로 던진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였는데 그가 평소 가장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정치를 너무도 잘 아는 빌라도 입장에서 만약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이 사건은 정치적인 이슈가 된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에 왕이 있었기에 왕의 자리를 놓고 세력 간의 파벌이 있었고, 왕권을 빼앗는 일에 실패한 예수가 처형 위기에 처해졌다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왕처럼 따랐기에 이런 시각이 가능했습니다. 물론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냐란 사실이 빌라도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왕이라 해도 이미 실패한 자로서 이렇게 공개 처형을 당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예수란 인물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은 것을 볼 때에 예수의 입에서 답을 듣고 싶었던 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의 질문을 들은 후에 예수님은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한 말이냐”고 되물으셨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란 사실을 인정했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내가 유대인의 왕이 맞는데, 이를 네가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가 진짜 왕이라면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란 일종의 기대심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끼리 벌어지는 권력 다툼을 구경하고 싶은 그의 기질이 작동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네가 스스로 한 말이냐 누구에게 들은 말이냐’란 질문을 할 것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단지 예수가 ‘나는 유대인의 왕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사람인데 이렇게 억울하게 끌려왔다’고 하면서 살려달라고 매달리지 않을까란 생각을 그가 했다고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자기 앞에서 애걸복걸할 줄 알았는데 너무도 당당하게 ‘내가 유대인의 왕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짜증이 났습니다. 그는 “내가 유대인이냐”면서 그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면서 조롱섞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네 나라 사람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너의 꼴이 한심하다’면서 조롱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이런 꼴로 끌려오다니 별볼일 없다’는 뉘앙스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빌라도의 우월 의식과 권력에 취한 탐욕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빌라도는 보석을 돌맹이로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이가 어떤 분인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력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그의 눈에는 예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했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으면 육신을 따라 판단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예수’로만 알았던 당시 유대인들의 시각 또한 비슷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8). 보석을 보석으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시각이 없다면 보석이 그저 돌맹이로만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석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흔한 돌맹이로만 보이는지를 우리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유일한 구원자로 예수님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항상 예수님이 계실 수 있도록 만들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29절-32절 “어떤 상황에도 말씀은 이루어집니다” 2021년 11월 1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빌라도와 유대인들은 서로를 꺼려했습니다. 빌라도는 비유대인으로서 로마 총독으로 유대 사회를 통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이방인 총독을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빌라도 앞에는 서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빌라도 법정에 행악자를 세워야 되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를 고발한 그들의 처지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자 유대인들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고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지만 목적을 위해 잠시 휴전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유대인 법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예수를 죽일 수가 없었기에 유대 권력자들은 빌라도의 힘을 빌어서 예수를 제거하려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평소에 원수라 생각했던 빌라도와 손을 잡는 이 비열함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행악자’로 정죄하고 빌라도 법정에 세우려 했지만 그들 자신들이 ‘행악자’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를 죽음에 처할 정도로 나쁜 죄질을 갖고 있는 파렴치한으로 몰아갔지만 그들이 이미 더 악한 일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감히 정죄하는지 너무도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와 손을 잡고 예수를 공개적인 사형수로 만들려는 유대인들의 이 잔인함을 단순히 감정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저자는 모든 감정을 다 빼고 매우 차분한 어조로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적고 있습니다. 악과 악이 손을 잡고 선한 사람을 사형수로 만드는 최악의 장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린 것입니다. 감정적인 분노를 자아내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이 오기 전부터 이미 이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 비유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 12:33)라고 설명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처형될 것을 이미 아셨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공개 처형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가 드러나면서 인간의 비열함이 극명하게 도드라졌던 것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잔인함과 냉혈적인 태도가 예수 공개 처형 과정에서 여과없이 표출되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비열함과 정치적인 야비함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공개 처형하겠다고 작정하고 빌라도와 손을 잡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당시 사회에서 아무리 존경을 받았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잔혹한 죄를 지은 죄인이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야망이나 종교적인 이익을 숨긴채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잔혹한 행위를 함에도 하나님의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 것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당한 억울한 일에 우리가 분노하고 인간의 비열함과 잔인함에 치를 떨 수는 있지만 그것만을 보면 안됩니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신앙의 눈으로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 부족과 감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말씀에 비추어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으면서도 긴 안목을 갖고서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28절 “헛된 경건을 피하려면” 2021년 10월 29일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고 난 후 예수님은 빌라도 관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로마 황제가 심어놓은 유대 통치자인 빌라도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유화 정책을 쓰고 있었던 그는 가급적 유대 종교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을 최대한 보장해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유대 사회를 통치했기에 유대인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 관정에 들어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유월절 같은 명절에는 더욱 더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는 행위가 자신을 더럽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 점을 부각시키는데,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세우려 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경건을 지키고자 그 곳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갖는 역사적, 신앙적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 매년 그들은 최선을 다해 이 명절을 지켰습니다. 타국에 살던 이들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올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그들의 열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열정으로 유월절을 지키려 한 그들의 모습은 당시 사회에서는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면 그들의 경건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가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로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시기 위해 지금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에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 했는데, ‘어린 양’이란 구약에서 희생 제사를 위해 쓰이던 제물 개념입니다. 유월절에 제물로 ‘어린 양’을 바쳤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죽음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분을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법정에 고발했고 자신들은 유월절을 경건하게 지키고자 그 법정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버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경건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유월절을 지키려 했던 그들이 정작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배척했던 것입니다. 과연 이들의 경건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자 했던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죽음에 내던지고 있으니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한 열정으로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려 한 것을 볼 때에 지금 우리의 경건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고 말했습니다. 이는 당시 신앙인들의 약점을 들춰낸 것으로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으면서도 경건하고자 했던 모습을 꼬집은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 했지만 힘없고 불쌍한 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신앙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했던 잘못된 경건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처럼 경건하고자 하는 열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 전체에서 어떤 신앙을 가르치셨는지를 골고루 이해하지 않음으로 인해 헛된 경건을 추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구약 유월절을 지키려 했던 유대인들처럼 특정 구절만을 신봉하다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외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경건이 헛되지 않기 위해 항상 성경 전체를 골고루 섭취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25절-27절 “신앙이 확고해져야” 2021년 10월 28일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에 걸쳐 부인하는데, 그 과정을 요한복음서는 좀 색다르게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장면은 베드로를 가장 모를 것 같은 대제사장 집에서 문을 지키는 여종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는데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요18:17)는 질문을 던집니다. 뒤이어 나온 장면은 여러 사람이 동시에 베드로를 향해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종과 같은 질문이지만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확신에 차서 베드로를 향해 예수의 제자 중 하나라고 했기에 이를 부인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아니라’면서 그 사실을 부정해버립니다.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그 옆에 있었던 사람의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내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한 것입니다. 말고의 친척이란 점과 현장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임을 그가 얼마나 확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는 상황에까지 몰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부인해버립니다. 그리고 곧이어 닭이 우는 소리를 그가 듣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할 수가 없음에도 그렇게 했다는 점을 요한복음서는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신앙적으로 흔들렸었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얼마 전에 그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했던 진심은 다 사라지고 이제는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려는데에만 급급한 그의 약한 모습이 도드라지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확고했던 신념이 한 순간에 이렇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이 갖고 있는 한계인 것을 놓치면 안됩니다. 주를 향한 확신이 아무리 강해도 언제 어디서 그것이 무너질 지 우리는 장담할 수가 없음을 베드로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그가 예수의 제자란 사실을 수많은 이들이 증언해도 자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 사실을 부정해버렸던 것처럼 우리도 언제든지 불리해지면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숨겨버릴 수가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주변에서 칭찬해주고 인정해주면 우리는 이 사실을 자랑할 것입니다. 이런 환경이 조성된다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긍지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모욕을 당할 일이 되면 그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집니다. 과연 이것을 이겨내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가 있을지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파송하시면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마10:22)이라고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제자됨이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입니다. 또한 그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3)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 앞이든 그의 제자임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이미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것은 베드로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겪을 수 있는 현실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의 실패를 보면서 우리가 마음에 다짐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확고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바위처럼 단단해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2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어려운 과정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강인한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22절-24절 “바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2021년 10월 27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등산을 하다보면 갈림길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미 아는 길이면 고민없이 바른 결정을 하지만 모르는 경우에는 매우 난처해집니다. 어느 길을 선택해야 옳은지를 놓고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옳은 길을 선택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옳은 길인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곁 길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 너무도 강력해서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유혹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바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유혹에 맞서서 싸우셨습니다. 대제사장인 안나스가 예수를 취조하면서 그의 교훈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려 했을 때 자신이 옳다는 점을 강력히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친 모든 것이 공개적으로 들려졌고 그것을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면 다 알게 될 것이라는 답을 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가르침에는 어떤 문제도 없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 때에 옆에 있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의 얼굴을 쳤는데, 그 이유를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대답하느냐’란 것은 그런 식으로 답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랫사람은 손으로 예수의 얼굴을 때리면서 모욕을 준 것입니다. 무례를 범한 대가로 예수의 얼굴을 손으로 때려 되갚아준 것입니다.

취조를 당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얼굴을 손으로 맞는 모욕까지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이 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감정이 폭발하면 이성이 마비되고 바른 판단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매우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정리하셨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고 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얼굴을 손으로 때려 모욕을 준 상대에게 감정을 싹 빼고 논리로 접근하는 냉철함을 보이신 것입니다. ‘내가 말한 것이 잘못된 것인지, 바른 것인지를 판단해보라’는 이 도전적인 표현은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모욕하고 그의 말을 트집잡으려해도 되지 않을 것을 당시 취조하던 대제사장인 안나스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안나스는 더 이상 취조를 하지 않고 그를 결박한채로 가야바에게로 보내버립니다. 그는 예수에게서 어떤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를 풀어줄 마음 또한 전혀 없었음을 이런 식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무고한 예수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권력자의 만행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옳다해도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다른 이유를 만들어 그를 괴롭히는 악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아마도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모종의 타협을 시도했을 것입니다. 죽음만은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 예수님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자신이 공개적으로 가르친 모든 것을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도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제자들의 삶에 그대로 나타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보게 됩니다. 권력자들이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그들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권력 앞에서, 손으로 얼굴을 맞는 굴욕 앞에서도 의연했던 것처럼 그들도 권력자들의 횡포 앞에서 당당했던 것입니다. 바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바른 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때론 고단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른 길을 걸어가야 하기에 그것을 능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8장 19절-21절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다” 2021년 10월 26일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던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를 취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없는 죄까지도 만들어 사형시킬 목적을 갖고 있던 그들은 어떻게든 근거를 찾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대제사장인 안나스가 그 근거를 찾아내기 위해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다고 하는데, 지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아셨기에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도다”라고 하면서 이 자리에서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말을 알고 싶다면 대제사장은 얼마든지 다른 이들로부터 들을 수가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하신 후에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고 질문하신 것은 대제사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지금 함정을 파놓고 예수의 입에서 무슨 말이든 나오면 트집을 잡아 옭아매려는 대제사장의 속내를 들춰낸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억울한 마음에 자신이 틀리지 않음을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방어는 아무 소용이 없었기에 ‘왜 나에게 묻느냐’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당시 유대 사회에 널리 퍼져나갔음을 아셨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고 하실 정도로 그의 교훈은 유명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교훈에 영향을 받았고 그를 추종할 정도로 그의 메시지는 강력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려워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든 그의 교훈이 확장되는 것을 막으려 했고, 이번에 완전히 그를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계략을 아셨지만 순순히 붙잡히셨고 그들 앞에서도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당하더라도 이 함정에서 빠져나가기는 어려워보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서 예수님이 빠져나가려고 하지도 않으셨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기꺼이 그들의 계략에 빠지셨고 그 속에서 여유를 보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예수님의 교훈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노라”는 것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교훈에 흠집을 내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음흉한 계략은 성공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에게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 씌웠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거절하는 이들 또한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사회에서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전히 교회를 통해 세상에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모든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달할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아무리 이 가르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교회는 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 어디에 있든지 드러내 놓고 그의 가르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