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 (시편98편 묵상) – 6/27/2020

노래 경연 대회는 때론 식상함을 주지만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노래 부르는 것과 듣는 것 중에 무엇을 더 선호하냐에 대해 개인마다 차이가 나지만 노래 자체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노래를 좋아할까에 대한 답도 개인마다 다 다르지만 감정과 정서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노래를 듣고 부르는 사람들은 감성에 호소를 하거나 마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노래를 들으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은 노래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도 부르는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받습니다. 찬양 자체가 감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부르는 이의 감정이 찬양에 반영되기도 합니다. 시인이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송하자”고 하는데 그의 감정이 어떠한지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기이함에 놀란 마음을 찬송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이한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경이로운 역사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 구원을 베푸는 행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알 수 있도록 그의 구원을 나타내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세상이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대표적으로 애굽 탈출과 바벨론 포로 해방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시인은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다”고 표현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절대 잊혀질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시인은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하면서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했음을 강력히 외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작은 국가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퍼져나갈 것을 미리 알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은 온 세상이 맛볼 구원의 예고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라, 인종, 성별, 사회적 지위라는 경계선이 없어지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은 예고편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송하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하자”는 말은 구원받은 이의 감정이 얼마나 감격으로 채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구원을 깨달은 사람은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에게 다같이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놀라운 영적 감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고 우리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찬양의 힘은 구원의 확신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가슴 깊이 새길 때 우리의 찬양도 더 깊어질 것입니다.  

“미소가 가득한” (시편97편 묵상) – 6/26/2020

하나님의 창조는 과학의 시대에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성경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과학 이전의 시대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임을 고려한다면 현대 과학의 지식으로 창조 이야기를 평가절하하는 일은 매우 위험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최고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셨는가를 드러내는 창조 이야기는 그 어떤 새로운 이론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 진리입니다. 창조 이야기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피조 세계의 가장 큰 즐거움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세상은 거역이나 불평이 전혀 없는 온전한 순종만이 있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은 미소가 가득한 채로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땅은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땅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시인은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라고 하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역하는 일이 땅에서 일어나고 맙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 흐름에 제동을 거는 자연의 불순종이 발생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일어난 불행입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저주를 받아 인간의 삶에 고통을 안겨주게 됩니다. 인간의 수고가 결실을 내지 못하는 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멈추지 않습니다. 땅은 여전히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자신을 낮출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신다”고 하며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다”고 묘사합니다. 심지어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면 땅은 기쁨의 미소를 머금은채 환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 사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나야 할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시인이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듯이 우리는 하늘과 땅에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마음껏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으로서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가 다 수치를 당할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심”을 믿기에 하나님만을 즐거이 예배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는” 놀라운 일을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은 우리가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가슴벅찬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뿌리시고” 우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삶이 우리에게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주님을 바라보며 경배할 뿐 아니라 세상을 향해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 사람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거룩한 이유입니다.  

“희망의 찬가” (시편96편 묵상) -6/25/2020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고통이 사라지기를 우리는 소망합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일지라도 따스한 봄날이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듯이 새로운 희망은 우리의 고된 삶을 녹이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꿈을 꾸면서 살아갑니다.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에 대한 간절함은 더욱 커집니다. 새로운 꿈은 우리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하지만 우리의 바램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작은 희망이 더 큰 절망으로 끝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가득하면 흥얼거리게 됩니다. 특정한 노래가 아닐지라도 즐거움을 흥얼거림으로 표현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입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의 즐거움이 찬양으로 표출된 모습입니다. 그는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면서 마음의 즐거움을 마음껏 표현합니다. 자연 세계를 보는 그의 눈이 행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도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도 마음이 행복할까요? 그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니”로 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고 하면서 그분의 위대함을 묘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찬양으로 마음을 가득채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찬양할 수 밖에 없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희망의 찬가를 마음껏 부르는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뢰가 가득함을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 떨지어다”고 자신의 마음이 경외심으로 가득함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경외심은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에 불과함을 세상에 외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이 경외심을 품고 있다면 모든 나라를 향해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신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세상이 멈춘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존재감이 실종된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희망의 찬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시인처럼 “그가 임하실 것”을 확신할 때 찬양의 목소리가 더욱 커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노래는 절대 물거품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희망의 찬가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에 둘러쌓여 신음하는 자신의 백성에게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어주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우상들의 위협 앞에서 당당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분이심을 우리는 확신하면서 더욱 더 힘찬 목소리로 그분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로의 부르심” (시편95편 묵상) – 6/24/2020

누군가의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물론 초대하는 사람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초대를 받으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그 즐거움은 초대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얼마든지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로부터 초대를 받는다면 떨리기도 하지만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이제는 허락을 해준다는 의미로 초대를 한다면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시인은 그의 독자들에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함께 예배드리자고 초청한 것입니다. 시인은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일이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혼자 드릴 수도 있지만 함께 드릴 때 훨씬 더 힘이 생깁니다. 시인은 혼자 예배드릴 수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즐거이 외치자”고 말합니다. 혼자 드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고는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함을 시인은 깊이 체험한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그는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고 하면서 예배가 철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거룩한 행위임을 강조합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행위는 이렇듯이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품고 경배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혼자만이 누릴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나눌 때 그 행복은 차고 넘침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함께 예배드리는 일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혼자 예배드리지만 공동체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까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시인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인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답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비교 불가한 분이신지를 매우 명확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인정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안다면 시인처럼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자로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면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하나님이 주관적인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크신 왕이라 말하지만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란 믿음이 없다면 참된 예배자의 모습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냉랭한 예배자가 되는 길은 하나님의 구원 체험 없이 형식에만 얽매일 때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체험한 자로서 예배할 때 예배의 감격은 되살아납니다. 예배의 감격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다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로 부르신 하나님을 마음껏 즐거워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정의를 외치는 기도” (시편94편 묵상) – 6/23/2020

우리는 보복을 금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인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면서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편 전체를 보면 악인을 심판해달라는 기도가 의외로 많습니다. 과연 신약과 구약은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은 스스로 복수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인의 편만 들어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공평함을 시인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판단에 맡긴 것입니다.

시인은 개인의 복수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께 복수해달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고민은 악인의 횡포가 너무 길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란 절박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악인의 질주는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만듭니다. 악인의 횡포에 신음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합류하여 정의를 무너뜨리는 이들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이 유예되거나 실행되지 않으면 사회를 뒷받침하는 정의는 얼굴을 감출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나서달라고 간청하는 시인의 마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란하게 한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 중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협박을 받고 물질적 피해를 당하며 심한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에도 정의가 무너진 사회는 전혀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악인의 횡포 사이에 낀 존재로서 신앙인은 깊은 신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무신론자에 의해 하나님은 심각한 모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분개한 것입니다. 그는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면서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시지 아니하시랴”고 강한 어조로 하나님의 심판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시인의 말처럼 하나님 편에 서서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라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을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가 갖는다면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실”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다스림” (시편93편 묵상) – 6/22/2020

민주 사회에서 모든 주권은 국민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물러설 수 없는 헌법적 가치입니다.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일지라도 하나의 국민으로서 존재하며 국민을 위해 나라를 이끌어가는 책임을 맡았을 뿐입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다스린다는 개념은 현대 민주 사회에서는 매우 낯선 개념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왕정 시대의 개념인 ‘다스림’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왕은 백성이 뽑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왕이 백성 위에 군림해서 다스리는 일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왕정 시대에 맞는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왕으로 선출해서 통치할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세워진 존재가 아니십니다.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다”고 시인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스스로 왕으로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시인은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셨다”고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왕의 권위를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세상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을 신뢰하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하는 민주 사회에서도 하나님은 왕으로서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짜왕으로 공중의 권세를 잡은 존재가 있습니다. 마귀라고도 하는 사탄이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진짜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왜곡시켜 세상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하고 헛된 것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한 곳에 우상이 왕처럼 군림합니다. 그 형태와 모양은 다양할지라도 우상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온갖 헛된 욕망을 미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거절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할 때 생깁니다.

시인은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서 있다”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그것은 “주는 영원부터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하는 우상들이 많다해도 주의 보좌는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십니다. 이것이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다”고 시인이 말한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는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심”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누군가의 다스림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비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소유한 자로서 우리는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알아간다는 것” (시편92편 묵상) – 6/20/2020

시편을 읽다보면, 자주 보게 되는 표현 중 하나로 “주께서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에서도 이 표현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의 감탄은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에서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의 위대성을 매우 깊이 깨우치고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시인의 안목입니다. 그는 무엇을 근거로 주의 행하심을 이해한 것일까요? 시인은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시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행하심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대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인자하고 성실하신지를 깊이 깨달은 시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지식으로만 이해한다면 시인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보 차원에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는” 모습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시인의 모습이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수학공식 외우듯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뉴스를 통해 어떤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의 생각의 깊이를 깨달을 때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높이고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갖고 있는 사람을 시인은 ‘의인’으로 규정합니다. 행동 차원이 아닌 관계적인 측면에서 의인을 규정합니다. 진정한 의인은 하나님의 행적을 크게 여기며 주의 생각의 깊이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의인을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는”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여호와의 집에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나무라면 하나님이 돌보실 것이며 풍성한 열매가 열릴 것은 너무 자명한 것입니다. 심지어 시인은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사람은 세월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인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그를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정보와 지식으로만 알아가는 것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앎이란 우리 삶을 새롭게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마음 깊이 헤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간다면 우리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는’ 삶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 불의가 없음”을 세상에 선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마음을 쏟는다면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중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시편91편 묵상) – 6/19/2020

우리는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주는 기쁨도 있고 받는 행복도 있습니다.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우리는 느낍니다.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임을 확인하는 순간이 도움을 주고 받을 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위치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려워서 도움을 받지만 다른 방식으로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남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장애를 입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평생에 걸쳐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평생 돌봐준다면 엄청난 축복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무능입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의 처지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품으시고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평생에 걸쳐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실체입니다. 시인은 구원을 받은 이에 대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전능자의 그늘’이란 곧 “피난처요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의 보호를 뜻합니다. 시인이 부러워하는 것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놓인 인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사는 것을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으로 구체화시킵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서 피하리로다”고 묘사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인생의 행복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최선을 다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로 하여금 전능자의 그늘을 부러워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인생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사모하고 그것을 체험하고픈 마음을 먹게 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있으면 얼마나 담대해지는지를 우리는 시인의 말을 통해 체감할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고 신앙인의 담대함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공포, 전염병, 재앙’ 등은 우리가 피하고 싶은 삶의 어두운 면들입니다. 개인 뿐 아니라 가족, 사회, 국가에 전염병이 돌 때 얼마나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는지를 우리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담대함을 표출합니다. 이것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보호를 받는 신앙인이 세상에 나타내야 할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전능자의 보호를 받는 우리는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시인은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할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습니다. 전염병이 세상을 덮을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축복입니다. 우리 주님의 그늘은 평생을 넘어 영원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지혜로운 마음” (시편90편 묵상) – 6/18/2020

우리는 실용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 쓸모 있느냐로 가치를 판단합니다. 진리일지라도 유익을 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뭔가를 희생할 수 있지만 더 큰 유익이 주어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도 유익하냐로 판단합니다. 내 삶에 유익하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려야 합니다. 물질적인 유익을 주든가 마음의 평안을 주든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나에게 유익하냐로 판단합니다. 나에게 도움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며 어려움을 미리 예방해주는 하나님일 때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더라도 나에게 유익이 될 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할 때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마치 힘 센 친구를 옆에 두는 것만으로 든든해 하는 심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셔야만 된다는 심리가 강합니다.

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아 돌아가라 하셨다”는 시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어떤 시각으로 보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이지만 불편하게 들립니다. 시인은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라 하면서 우리 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 말합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생의 차이를 확실히 드러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평가할 때 시인은 “우리의 연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는 인생임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날카로운 평가입니다. 유익이 되느냐로 하나님의 존재를 판단하는 모든 시각을 부끄럽게 만드는 놀라운 묘사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이란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이 들의 풀 정도에 불과함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마음인데, 시인은 이것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풀에 불과한 인생임을 아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식 차원에서 어떤 이야기를 아는 정도로 만족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수준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며 오직 그 분에게만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라면서 우리가 지혜로운 마음을 얻을 때 가능하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우리의 모든 실용적인 사고 방식을 뒤집어놓습니다. 결과로 진리를 판단하거나 유익함으로 하나님을 접근하는 모든 태도를 바꿔놓습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놀라운 사랑” (시편89편 묵상) – 6/17/2020

성경은 하나님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성격을 갖고 계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그분의 능력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만해도 그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애굽 치하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능력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불치병을 치유하셨고, 물 위를 걸으셨으며, 한 아이의 식사 분량으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가장 놀랍고 위대한 일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가를 증명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놀라는 또 하나의 대목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깊이를 성경은 여러 각도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에 사랑으로 옷을 지어주신 모습을 시작으로 죄인을 향한 그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차고 넘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유명한 말씀처럼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벽히 드러내셨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죄인 취급받던 이들을 품으시고 제자로 삼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위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과 놀라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시인은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인자하심’은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놀라운 이유는 그의 성실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하십니다. ‘신실하심’이란 ‘변함없이 약속을 지키신다’는 뜻인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떤 환경에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시인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란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그는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고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 그의 성실하신 사랑이 가장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무능한 사랑이 아닌 비교할 수 없는 능력으로 사랑을 펼치십니다. 변덕스러운 사랑이 아닌 성실하심으로 그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다”고 시인이 말한 것처럼 그분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환희의 함성을 지를 수 밖에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음에도 우리는 곁 길로 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