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 9절-10절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 2021년 10월 1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도 가족 중 누군가가 중한 병에 걸리면 기도하게 됩니다. 신을 믿지 않지만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막연한 대상에게 기도합니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싶지만 그것을 해낼 수가 없기에 어떤 신에게라도 매달리고 싶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연약하기에 기도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지킬 수가 없기에 신의 능력을 통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기도는 무언가를 지키고 싶을 때에 더욱 간절해진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에서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기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것을 지킨다는 생각보다는 상대가 소중하기에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다음에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란 기도의 이유를 제시하셨는데, ‘그들’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소중한 이들인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내게 주신 자들’이란 표현에서 그들의 소중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이들을 가리킵니다. 원래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아들이신 예수님의 것이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에게 소중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것인 동시에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이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버지의 것이면서 예수님의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유인 동시에 예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이에 대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란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를 소유한 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무척 소중하게 대하십니다. 그 증거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고 묘사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장면인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듯이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다니 이보다 더 큰 위로도 없을 것입니다. 어디 그것 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성령의 역할에 대해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성령의 기도는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고 하십니다. 부족한 제자들만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까지도 품으시고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것처럼 우리도 사는 동안 신앙적으로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의 것’인 동시에 ‘예수님의 것’인 점을 고려한다면 여전히 우리를 소중히 다루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이런 애정을 우리가 충분히 인식한다면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을 위해 우리 또한 헌신을 다짐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주를 위하여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것이기에 지금도 주님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삶을 우리가 산다면 주님은 우리를 더욱 더 소중히 여기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7절-8절 “성경을 이해하고 믿는 신앙” 2021년 9월 30일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누군가를 알지 못함에도 신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맹목적 신앙인데, 어떤 경로로 이런 절대적인 신뢰를 하게 되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질문을 불쾌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마치 상대에 대해 불손한 마음을 품은 것 같은 죄책감까지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이 이런 모습일까요? 믿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되는 신앙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을 것을 요구하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이를 보여주는데,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라고 예수님 스스로 밝히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무엇을 알고 배워야 하는지를 아셨습니다. 그 내용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자 한 진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성경책이 복음서이며 이는 구약 성경의 완성자로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복음서에 근거해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교회를 위해 쓰여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책은 이처럼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담고 있는 보물창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전했을 때에 그들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행위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들은 알았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란 말씀도 하셨는데, ‘그들은 아오며’란 문구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제자들이 알아들었다는 점을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이야기를 제자들이 이해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고 하면서 ‘믿음’과 연결시켜 제자들의 반응을 설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믿었다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신뢰를 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해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알고 믿는 태도입니다. 알기 위해서는 질문을 던져야 하고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 함을 기독교 신앙은 무척 강조해왔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그냥 믿으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그가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또한 알고 믿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해줍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고 믿는 신앙은 우리가 계속해서 추구해야 할 건강한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완전히 이해해야만 믿는 것도 아닙니다.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서 믿음으로 반응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고 믿는 신앙 방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믿는 행위에는 이렇듯이 이해하는 지적 능력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성경책을 읽고 묵상할 것을 교회는 강조해온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믿음은 철저히 성경에서 나와야 하기에 이것을 끊임없이 외친 것입니다. 우리 시대 교회는 감각과 경험을 중시하면서 이해와 믿음을 도외시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정서적인 반응을 유도하면서 지적인 깨달음을 약화시키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려는 노력이 이를 방지할 수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경을 포기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경 속에서 배우고 익히는 훈련을 계속해서 쌓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지식에서 출발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믿음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오늘도 성경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6절 “무엇이 최우선인가?” 20201년 9월 29일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은 사역하시는 동안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아 쉬기도 하셨고 기도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람들 속에 계셨습니다. 그의 도움을 받기 위해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왔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도 하셨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한 것을 말과 행위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본문에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고 하신 것처럼 그의 주된 사역은 언제나 이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예수님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먹을 것을 제공해주는 모습 속에서 그들은 삶의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그들은 고민과 갈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그를 따르는 것이 옳은가란 회의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제자들도 품었을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도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지만 ‘내게 주신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실제로 이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따로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들이 누구냐에 대해 그는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란 답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이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특징에 대해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가 적절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을 찾아온 모친과 동생들을 두고서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50). 혈육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당시 사회에서 이 말씀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혈육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이들은 이처럼 아버지의 뜻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꺾일 수가 없는 신앙 가치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신앙인에게는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임을 아는 신앙인은 누구 앞에서도 이것을 당당히 내세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이런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면서 당당히 맞섰습니다. 신앙인에게 무엇이 삶의 최우선 순위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이렇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최고의 자리에 둘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위축될 수가 있고 이번 위기만 벗어나자면서 후퇴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세상은 예수 이야기를 유대인의 옛날 인물 정도로 치부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지만 예수님에게 속한 이들이 지금도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런 사람들인지 반문해 볼 때입니다.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사람들로서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5절 “동행의 즐거움” 2021년 9월 28일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연예인으로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행복하게 지내던 사람이 어느 순간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더 이상 대중 앞에 서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자체가 힘들 정도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때에는 전혀 몰랐던 외로움이란 고통을 온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누군가와 함께 했던 지난 일들의 소중함을 비로소 알게 되기도 합니다. 대중의 인기에 심취한 나머지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산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런 유혹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를 추종했으며 그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중의 인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철저히 혼자 버려질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제자들마저도 그를 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절망에 빠지거나 인생을 후회하며 자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중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도 한 가지만은 반드시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동행하는 시간을 잃지 않았습니다. 항상 아버지와 함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아버지와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셨는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거나 추앙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공유하고자 하셨습니다.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거나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지켜졌는지를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여기서 ‘전에’와 ‘지금도’란 시간 부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가장 좋아하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이 점을 무척 강조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16:32)와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는 말씀에서 이를 드러내셨습니다. 아버지와의 동행이 예수님의 인생에서 어느 정도로 귀한 일이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제자들마저도 그의 곁을 떠날 것을 아심에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붙들고 계시는 모습은 신앙적으로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사는 것에만 마음을 쏟다가 하나님과의 동행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란 예수님의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홀로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함으로 얻게 되는 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나를’이란 표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선이 되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도 ‘아버지와 함께’를 우선시 여기는 모습은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영적인 자산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기도에 익숙한 우리가 이렇듯이 ‘아버지와 함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기도를 할 수 있다면 큰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의 동행이 주는 즐거움을 아는 자로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 복을 우리가 지금 여기서 누리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 “투철한 사명 의식” 2021년 9월 27일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란 옛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분에서 맞는 말은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 공감이 가는 격언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식과 부모는 절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인 점은 확실합니다. 자식이 잘나든 못나든 부모는 사랑으로 대합니다. 자녀가 잘 될 경우 부모는 큰 보람을 느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게 됩니다. 물론 부모의 개인적 욕심을 위해 자식을 출세시키려 하는 것은 볼성사나울 수 있지만 자식의 형편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부모의 영예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12:27-28)란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버지의 영예를 지키려 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예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히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만 주력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아버지를 향해 표현한 것인데 그의 삶이 얼마나 아버지에게 맞추어져 있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란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해지도록 기도하라는 것은 그들의 삶의 초점이 무엇에 맞춰져야 하는지를 교정해준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렇게 살았기에 그들에게 이런 요구를 하실 수가 있었음을 놓치면 안됩니다. 예수님 자신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삶도 언제나 아버지의 영예를 위해 재조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가장 올바른 방식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불완전하고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셨지만 우리는 그 일을 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이들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우리의 삶으로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하라”(마5:16)고 하신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삶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성품과 인격을 앞세워서 마땅히 해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외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투철한 사명 의식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사명 의식을 고취시켜야 합니다. 약해질 때마다 예수님처럼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도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작은 돌부리에도 쉽게 꺾이는 것을 아심에도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라는 사명을 부담스럽게만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홀로 이를 감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삼위 하나님의 돌보심이 허락되었습니다. 지금도 성령의 세밀한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명 의식을 더욱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더욱 철저히 우리의 삶을 재조정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예를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이란 무엇인가?” 2021년 9월 24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서를 읽다보면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단어 중 하나가 ‘영생’일 것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의미로 이해되지만 과연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가를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도 영생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만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선언합니다. 멸망이 아닌 영생이라 합니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영생은 죽음이 아닌 멸망과 연결된 중요한 신학적 용어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 주어지는 영생을 멸망의 반대어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심판이 아닌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고 선언하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데 그를 믿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하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란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며 멸망에서도 자유로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여기서도 심판의 반대어로 영생이 쓰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영생을 얻었다면 심판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심판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영생을 얻는다는 실제적인 의미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이 아닌 영생을 얻은 자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해주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은 곧 아는 것’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영생을 얻은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면 그 이후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지를 ‘앎’이란 단어가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었다면 그를 알아가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앎’이란 단순히 지적인 축적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앎이란 인격적인 신뢰가 쌓여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인 신뢰가 갈수록 더 깊어지고 두터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앎’이 함축하고 있는 실제적인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영생을 얻었으니 지옥에 가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만 키우면 안됩니다. 이제는 무슨 잘못을 해도 지옥에 갈 일은 없다는 것에만 함몰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바울인데, 그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란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영생을 얻은 자로서 우리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 달라질 수가 있는지를 이 말씀에 기준해서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다면 이제는 그를 위하여 평생을 바친 자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영생은 단지 죽어서만 누리는 것이 아닌 이 땅에서 실제로 예수님을 체험하는 신앙의 여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은 자라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을 위해 지금 여기서 헌신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 “다스리는 권세” 2021년 9월 23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 당시 로마 황제는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권세에 대항한다는 것은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어야만 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예수님이 갖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만이 누릴 수 있는 권세를 쥐고 있다는 이 말은 정치적으로 보면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올만한 것입니다. 예수란 유대인 청년이 로마 황제에 대항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권세를 그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일까요? 로마 황제만이 줄 수 있는 권세인데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로마 황제가 주지 않은 것을 아버지가 주었다는 이 주장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닐 수 있는 길은 ‘아버지’의 존재를 밝히는 것 뿐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유대인의 하나님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진짜 주인입니다. 따라서 이 분은 아들인 예수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수 있는 권한을 쥐고 계신 유일한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권세를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셨을까요? 당시 로마 황제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방식으로 이것을 행하신 것을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백성과 동떨어진 궁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며 자기 삶을 즐기던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병들고 절망에 빠진 이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권세를 사람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소외된 이들을 품어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인생 역전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막힌 담을 헐고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통로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이를 위해 죄와 싸우셨고 죄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가 쥐고 있던 권세를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에 사용하지 않으시고 죄의 권세를 제거하는 일에 사용하신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당시 어떤 권력자도 보이지 않았던 권력 행사였습니다. 절대 권력을 쥔 자로서 이렇게 자기 희생적으로 권세를 사용한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셨습니다. 그의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유일한 방식의 권한 행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기 위해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사용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쥐고 있는 분이었지만 우리에게 영생을 값없이 주시기 위해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내놓는 방식으로 권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이 원하셨던 길이었습니다. 또한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발적으로 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를 따르는 이들의 삶의 방식은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다스리는 권세가 있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남을 살리는 일에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며 섬김의 모습입니다. 다스리는 권세를 쥐고 있음에도 섬김의 자리에 계셨던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비록 약하지만 작은 섬김으로 그의 뒤를 따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더 큰 섬김을 위해 더 큰 권세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권세라도 다른 이를 살리는 일에 사용한다면 주님이 이것을 더욱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다스리는 권세가 아닌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주님은 부족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 “반드시 해내야 할 일” 2021년 9월 22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2:27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라면서 내적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란 기도를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면서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셨습니다.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의 심적 고통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는데, 가장 먼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란 간구를 하셨습니다. 자신을 객관화시켜 ‘아들’로 표현하시면서 ‘영화롭게 해 달라’는 요청을 아버지 하나님께 하신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명성을 드높여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달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는 ‘때가 이르렀다’는 말과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죽음을 피하지 말고 완수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에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려는 굳은 의지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가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요한복음12:23-24에서 다시 확인할 수가 있는데, 그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하신 후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비유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한 알의 밀이 죽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영생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영화롭게 된다’의 바른 이해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기도를 통해 이것을 다시 한 번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의 사명 완수에 모든 것을 내던지셨는지를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한시도 잊지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한 그는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곧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아셨기에 더욱 더 이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다 ‘영화롭게 된다’는 것에서 온전히 하나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렇듯이 아들이지만 목숨까지도 내던지면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굳은 의지를 품었다가도 손해를 입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아침 안개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우리의 의지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도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굳은 의지를 갖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요? 이 사명은 단순히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목표를 달성해야 할 사안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으로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은 기도를 통해 불타올라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전적으로 기도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기도를 통해 재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 주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2021년 9월 21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원합니다. 적어도 평화가 보장된 곳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너진 사회에서 살 수가 있습니다. 지금 미얀마는 평화가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군부 독재가 시작되면서 자유를 외치는 일반 시민들은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은 평화가 깨진 사회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간 권력자들은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같은 사회 속에서 평화를 잃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더라도 비슷합니다. 어떤 이는 평화가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다른 이는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평안을 누리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누릴 평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는 말에서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려는 그의 결심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어떤 장소나 환경을 통해서 평안을 주신다고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고 하신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린다는 것은 평안의 주체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평안을 보장해 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만든 평안의 울타리 안에 제자들이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벗어나 예수님이 건설한 새로운 곳에서 평안을 누린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누린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게 해주신다는 것일까요? 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평화를 깨뜨리는 주된 환경입니다. 사람이 환난 중에 있으면 평안을 잃게 됩니다. 당장 어떤 불행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한다는 것은 평화를 누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환난을 주는 세상에서 어떻게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환난이 없는 세상에서 살게 되기에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없는 세상 한 가운데서 평안을 누린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이것이 가능하기에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담대하라’는 말로 우리가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기죽지 말고 세상 앞에서 당당하라는 것입니다. 환난을 제공하는 세상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보장받았기에 우리는 가슴을 활짝 펴고 살아갈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선언에는 세상이 어떤 환난으로 제자들을 공격하든 그것을 막아낼 힘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세상이 약속한 평안에 속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훈련을 쌓으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평화롭다고 외쳐도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갈망하고 그것을 삶에서 실제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면 환난을 당할 때에도 예수님 때문에 담대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 담대함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신뢰하기에 더욱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거짓된 평안에 속지 말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 “혼자가 아님을” 2021년 9월 20일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을 아시고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그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아버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돌보시는지, 성령이 오셔서 어떤 식으로 그들을 위해 사역을 하실지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다 그의 사랑이 어느 정도로 크고 깊은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길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외롭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외로운 여정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요13:36)라는 말을 하실 정도로 철저히 혼자만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얼마든지 따를 수 있는데 자꾸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에 서운한 감정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이런 감정을 느낄 정도로 예수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함께 했으며 무엇을 하든지 가장 먼저 눈으로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요15:27)라고 말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그 점을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오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고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가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홀로 감당해야 할 죽음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였고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었습니다. 아무도 이 사명에 힘을 보태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홀로 짊어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예수님은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은 그를 혼자 두고 흩어질 것이지만 오직 한 분만은 끝까지 그와 함께 하실 것이란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하나님만은 예수님을 홀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앞으로 행할 배신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도드라지게 하려는 의도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믿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만 믿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신 것도 아닙니다. 물론 사람들은 배신할 수가 있으며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힐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이런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이 있는데 그 순간에도 하나님만은 함께 하실 수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압니다. 가족과 친구, 회사 동료, 지인 등을 통해 위로를 받으며 새로운 힘을 내기도 합니다. 물론 배신을 당하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모든 관계를 끊고 혼자서만 살아갈 수가 없음을 잘 압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철저히 혼자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입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으며 나눠질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약속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동행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토록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이 부분에서 확인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지탱해주던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가장 외롭고 비참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허락받은 우리이기에 가장 어려운 순간이 와도 능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