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장19절-24절 “올바른 판단” 2021년 1월 8일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에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사람마다 양심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 양심을 믿을 수 없을 때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법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입니다. 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모세 율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했습니다. 십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 규칙이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인 ‘안식일 준수’는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유대인들은 판단했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냐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율법을 어긴 자란 낙인을 찍어 예수님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정면 돌파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비합리적이고 표리부동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모함을 한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고 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그들의 잔인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본문 19절,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는 말씀은 유대인들의 아픈 곳을 날카롭게 찌른 매우 적절한 지적입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죽음에 몰아넣으려는 그들의 간악함을 폭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십니다. 22절,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할례를 안식일에 행해도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온 할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도 그것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정당한 행위라고 그들은 규정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이 되어도 그것을 행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모세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키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는 예수님의 항변은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다면 병든 사람을 고치는 행위도 정당한 것이 아니냐는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과연 이것을 유대인들이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을까요? 이미 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행위를 범법행위로 정죄했기에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특권 의식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는 말씀으로 일침을 가하셨습니다. 판단 기준이 공의롭지 못하고 임의대로 세워진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행위는 절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자가 집행하는 자의 위치에 서게 될 때 가장 위험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공의’가 아닌 ‘외모’로 판단하는 한 법을 제대로 집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가 아닌 공의로 판단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절대 기준으로 삼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는 자와 집행하는 자로서 완벽하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은 항상 옳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분의 판단을 믿고 살아갑니다.  

요한복음7장17절-18절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 2021년 1월 7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생활하는 사람이 자신의 뜻대로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학생이 학교 방침을 어기고 자신의 뜻대로 행동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사회 생활을 통해 자신의 뜻대로만 살 수 없음을 배웁니다. 그럼에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는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자기 실현의 욕망이 강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할까요?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면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 인생에 유익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수정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그릇된 방향으로 고쳐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드러난 계기는 예수님의 교훈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 학자들(서기관들)의 주장과 얼마나 다른지가 드러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행위입니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당시 학자들(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강력히 주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 계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자신의 교훈이 하나님의 뜻에 맞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교훈이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음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이것은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자신에게는 어떤 불의도 없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한 삶을 사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결백을 주장하신 정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깨끗하고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아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불의가 없을 정도로 결백한 자신을 왜 이렇게 미워하고 죽이려 하냐고 억울함을 표출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서 예수님의 교훈을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삶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둘을 분리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신앙은 왜곡되고 어긋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길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현하셨기에 우리는 이 둘을 절대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어긋남에도 성경에 나온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의 교훈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을 지금 교회가 그대로 답습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사실을 우리가 양보하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면서 성경 전체를 이해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한다면 예수님에게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다시 볼 때에 우리는 올바른 방향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7장14절-16절 “설교의 권위” 2021년 1월 6일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유대인의 살해 위협 속에서 예수님은 은밀하게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성전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설교를 하셨습니다. 14절,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설교하셨습니다. 다른 점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설교는 목숨을 걸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유대인들의 심장부에 들어가 설교하셨기 때문입니다. 적대적인 유대인들은 허를 찔리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을 막기 위해 공개 수배까지 내렸는데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설교단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설교자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입니다. 15절,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비난한 것입니다. 배우지 못했다는 점과 글을 모른다는 점을 부각시켜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매우 비열한 방식이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설교자의 권위는 매우 중요한 신뢰의 기준이기에 이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의 설교를 신뢰할 수 있느냐란 이슈를 청중에게 던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복음의 기록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상설교를 들은 후에 보였던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마7:29을 보면, 복음서 저자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고 평가합니다. 이것은 청중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서 당시 성경 교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위가 있음을 인정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서 설교하신 후에도 사람들은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깎아내렸던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설교자의 어떤 설교도 가치가 없다는 전략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통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지 못한 자로 낙인을 찍은 근거로 당시 저명한 학자의 제자가 아니란 점을 든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탁월한 지식인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사회가 인정하는 학자 밑에서 배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권위가 되어 무엇을 가르쳐도 사람들이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배경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은 단정적으로 예수님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로 낙인을 찍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란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누구에게서 배웠느냐로 설교자의 권위를 규정하던 당시 사회에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르킵니다. 어떤 학자의 해석을 따르느냐로 권위를 삼았던 이들과 달리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교훈인 점을 강력히 내세우셨습니다. 가르침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두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권위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이렇게 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학자의 권위에 의존했던 당시 모든 성경 교사들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로 설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전하는 모든 설교자는 예수님의 권위에 의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냐로 설교의 권위를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날 모든 설교의 중심이어야 함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설교의 권위는 언제나 예수님에게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의존한 설교가 전해질 때에 교회는 올바른 신앙 위에 서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7장10절-13절 “위축된 신앙” 2021년 1월 5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움직임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초막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모습을 드러낼 것을 예상하고서 유대인들은 그를 찾아다녔습니다. 11절,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면서 마치 공개 수배하듯이 예수를 잡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를 숨기지 말고 발견 즉시 고발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범죄자 취급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악소문을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예수에 대한 좋은 소문이 예루살렘 성 안에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나타나도 잡기 어렵다고 그들은 판단했던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른 시간 안에 예수를 잡고자 했던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고발자가 되도록 권력으로 압박했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느냐’란 말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를 고발할 수 있도록 압박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평소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작은 목소리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각자 예수를 보는 시각이 너무도 달라 논쟁이 되기도 했습니다. 12절,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란 진술은 당시 분위기가 어떠한지를 충분히 느끼게 해줍니다. ‘좋은 사람’ 또는 ‘속이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평가하면서 설전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평가하는 근거를 본문은 제시하지 않고 사람들이 평소 어떻게 생각하는지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당시 여론이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나쁜 사람으로 몰고간 상황에서 그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뿐 아니라 그것을 겉으로 드러낸 것은 인상적입니다. 아무리 여론이 나빠도 예수가 행하셨던 일과 그의 가르침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은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사람은 여론의 영향을 깊이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비록 예수를 ‘좋은 사람’으로 생각해도 여론이 너무 나쁘면 그것을 표출하지 못합니다. 13절,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이것은 12절,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와 대조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여론을 장악했기에 사람들은 무서워서 공개적으로 예수를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에 대해 옹호하는 말을 하면 권력자들의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큰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yes’할 때 혼자서 ‘no’라고 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어떤 불이익도 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 받는 사회적인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보복을 당하거나 권력에 짓눌려 희생을 겪어야 한다면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공개적으로 신앙을 드러내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면 우리는 크게 위축됩니다.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옹호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자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믿음이 약해지면 작은 위협에도 크게 무너지게 됩니다. 조금만 손해를 봐도 신앙의 자리를 삶 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있습니다. 개인의 이익, 평판, 명성이 예수님보다 중요하면 이런 함정에 쉽게 빠집니다. 이것을 이겨내야만 우리는 어떤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7장6절-9절 “미움받는 이유” 2021년 1월 4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예수님은 활동하는 내내 유대인으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5:18에 의하면,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시각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7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은 그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이유는 ‘세상의 일을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이 얼마나 당시 유대인들의 것과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신성모독죄를 지은 자로서 예수님을 처형하려는 유대인들에 비해 예수님은 ‘미움’이란 말로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삐뚤어져 있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기신 것도 아니고 신성모독을 저지른 것도 아님을 ‘미움’이란 단어로 표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미움’을 숨긴채 법집행이라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옥죄었지만 그것을 백일하에 드러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미움받은 이유는 명백합니다. ‘세상의 일을 악하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셨기에 미움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마귀라고 하시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신 것과 같습니다. 열두 제자 속에 숨어서 선한 척 하던 가룟 유다의 이중성을 모든 이들이 알도록 하셨던 것처럼 세상의 악함을 폭로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속셈을 들킨 후에 회개하기는 커녕 더욱 더 예수님을 미워한 것처럼 세상이 예수님을 그렇게 대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검은 속내를 들키자 유대인들은 미움을 극한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기회만 주어지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세상의 민낯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셨습니다. 8절,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마치 예수님이 겁을 내고 있는 것처럼 이해하면 안됩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 피하신 것이 아니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때’란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데, 아직은 그 시기가 되지 않았음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세상의 검은 속내를 꿰뚫어보실 뿐 아니라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셨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를 미워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민낯을 드러내는 한 미움은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미움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괴롭히고 고통을 가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감정적인 미움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삶에 타격을 가할 정도로 셉니다. 이것이 교회 핍박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국가적인 박해 또는 조직적인 압박 등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힘 있는 이들에 의해 심리적으로, 관계적으로 짓눌리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세상의 미움은 교회가 올바로 서 있는 한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처럼 세상의 일을 악하다고 증언하는 한 세상은 끊임없이 교회를 압박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무리 세상이 교회를 미워해도 교회의 입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자들로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살지만 그 악함과 손을 잡지 않고 예수님의 의를 따른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놀라운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오늘도 세상의 일이 악하다고 담대히 외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7장1절-5절 “불신앙을 이기려면” 2021년 1월 1일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혈육으로 맺어진 관계가 얼마나 깊고 끈끈한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물론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만 혈육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한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부모의 심정을 떠올린다면 얼마나 혈육이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혈육 관계가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혈육인 형제들이 매우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예수님을 더욱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1절,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5:18에서도 이미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소개되었는데, 험악한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 상황입니다. 특히 유대에 사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갈등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며 예수님의 목숨도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혈육인 예수님의 형제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친형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친형을 더욱 위기에 빠뜨리는 위험천만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유대 예루살렘에 지금 공개적으로 올라가면 예수님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밖에 없음에도 형제들은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라’고 독촉합니다. 명분은 “당신이 행하신 일을 제자들도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에 있는 제자들이 흩어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기적을 보여주면 다시 응집할 것이란 기대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을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란 말로 부추깁니다. ‘묻혀서’란 말은 비겁하게 이렇게 숨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란 말로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기 위한 계략을 꾸민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면 어느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흩어진 제자들을 하나로 모을 뿐 아니라 세상이 얕잡아보지 못하게 위대한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이려 하지만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그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을 형제들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 능력을 나타내어 존재감을 과시할 뿐 아니라 지배자의 위치에 서라는 형제들의 말에 대해 본문은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고 평가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의 잣대로만 살아가는 형제들의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어떻게 그 일을 이루실지를 수없이 말했어도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 바로 불신앙의 실체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지 않고 세상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려는 것은 언제나 불신앙으로 이끌 뿐입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세상을 살 때에 부딪히는 유혹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가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의 능력까지도 사용하고 싶어한다면 이미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세상의 시각이 아닌 예수님의 눈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6장70절-71절 “깨어 있는 신앙” 2020년 12월 31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님께 실망해서 그의 곁을 떠난 수많은 제자들 속에서 베드로는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물질적인 욕심, 권력에 대한 야망, 출세에 대한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신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으시고 매우 심각한 경고성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이것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선택이 완벽하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일까요? 예수님도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일까요? 선택을 받았어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이 선택할 당시에는 괜찮았는데 도중에 마귀로 변질된 것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제자 중의 한 사람은 마귀였을까요? 사람을 마귀라고 지칭하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이런 질문들이 쏟아질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강력합니다. 위의 질문들 중 어떤 것은 쉽게 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학적으로 논쟁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입니다. 신앙 고백은 칭찬을 듣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앙 고백이 만병통치약처럼 작용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 고백이 아무리 훌륭해도 언제든지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선택받은 제자들 중에 마귀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경고가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 본문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라고 구체적으로 실명을 공개합니다. 심지어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고 예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마귀 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마음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으면서 몸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이러한 이중성을 우리는 얼마든지 비난할 수가 있습니다. 배은망덕하게도 이렇게 사악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느냐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깊은 회의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거두어 키워도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못된 성품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 강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선택 받고 신앙 고백을 훌륭하게 해도 얼마든지 마귀의 편에 설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라는 이 울림이 우리에게 작게 들린다면 우리의 영성에 이미 빨간불이 켜졌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울림이 크게 들린다면 우리는 지금 깨어 있는 신앙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성장과 쇠퇴를 거치면서 형성됩니다. 잘 자라고 있는 듯이 보이다가 어느 순간 확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제는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확신했다가도 갑자기 의심에 사로잡혀 뿌리까지 흔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 생활에 깊은 회의가 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에 은혜를 받아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렇듯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여러 굴곡을 경험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안주하거나 불안해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깨우는 자각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깨울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6장67절-69절 “떠나지 않는 이유” 2020년 12월 30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만남과 헤어짐은 모든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만날 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불행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헤어짐이 슬픔을 주지만 행복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만남은 축복이지만 헤어짐은 비극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는 것이 행복입니다. 중간에 끊어지거나 완전히 헤어지는 것은 불행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것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행복을 느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루하고 따분해질 뿐 아니라 귀찮고 거추장스러워진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나빠지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 비난과 모욕이 쏟아지자 관계를 끊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상당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고 다시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더 이상 함께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고 말입니다. 어떤 뉘앙스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문맥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떠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매달리는 심정으로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의 본심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앞장서서 ‘절대 가지 않습니다’란 답을 내놓습니다. 예수님 곁을 떠날 일이 없다는 확답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답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체험한 수많은 기적들을 언급하지 않고 ‘영생의 말씀’을 콕 집어 답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기에 떠나지 않겠다는 이 고백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이것은 교육을 받아서 앵무새처럼 정답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신앙 고백입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고 한 것처럼 체험적 신앙 고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많은 수의 제자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도 동요하는 분위기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무척 귀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의리로 한 말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터운 신뢰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불빛이라도 크게 빛나듯이 한 마디의 말일지라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진솔한 신앙 고백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신 줄 믿고 알았다’고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신앙이 있다면 조금 손해보고 희생해도 감수할 수가 있습니다. 당장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도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려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교회를 폄훼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진실한 신앙을 지키려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것이 뭐가 있냐란 소리를 들어도 우리는 주님에 대한 신뢰를 더욱 견고히 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비난의 표적이 되고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시대일수록 이 질문은 더욱 자주 들려져야 합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란 질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매순간 돌아보게 만드는 보약같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확신하기에 그분을 절대 떠날 수 없다고 우리는 오늘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6장66절 “중도 포기” 2020년 12월 29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100미터 달리기와 달리 금방 끝나지 않는 인생의 특징을 잘 드러낸 비유입니다. 마라톤 경기 도중 부상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지만 끝까지 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도저히 뛸 수 없음에도 기어코 완주를 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관중들이 떠난 자리에 홀로 골인지점을 통과합니다. 우수한 성적을 낸 선수들에게 주어진 환호는 없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모습에 박수를 보내는 소수의 관중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에 대한 뿌듯함이 선수에게 주어집니다. 인생은 이처럼 길고도 험난할 수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마라톤에 비유한 인생의 길은 신앙의 여정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신앙도 인생처럼 수많은 굴곡을 겪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 것이 과연 인생에 도움이 되느냐란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이런 고민을 안고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상당수가 예수님 곁을 떠난 장면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란 장면은 예수님을 떠난 이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실망해서 떠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신뢰가 쌓이면서 적극적으로 따르던 제자들인데 이제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그의 곁을 떠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물론 일시적으로 방황해서 예수님 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는 본문의 묘사처럼 그들은 영구히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가 생겼다거나 마음은 예수님을 따르지만 물리적으로만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떠나게 만들었느냐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란 말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들은 후일 것입니다.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기대를 접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던 메시아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되면서 따를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다가 이렇게 식어버릴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따르게 했는지, 왜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지를 냉철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것은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따르고 싶으면 따르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면 되지 않느냐란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은 개인의 선택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개인의 결정만으로 신앙을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동안 우리는 개인의 의지가 아닌 믿는 대상인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지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예수님을 떠나면 그만이라 생각한다면 이미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두지 않고 손님처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신앙 생활을 한다면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시간 문제입니다.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신앙은 우리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구석 자리에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심 자리를 예수님이 차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가르침을 듣든, 어떤 삶의 위기를 만나든 예수님이 언제나 삶의 중심이라면 우리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꿋꿋이 버텨낼 것입니다.

요한복음6장64절-65절 “흔들리지 않도록” 2020년 12월 28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으로 자신을 소개하신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가 영원히 살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 여럿이 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빠르게 퍼져나가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맑은 물에 잉크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전체를 검게 만들듯이 불신은 굉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평소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도 불신의 소리에 얼마든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 하나로 뭉쳐 있던 사람들은 불신의 그늘이 드리워지자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찻잔 속의 폭풍이 아니라 토네이도처럼 집 전체를 붕괴시킬 정도로 불신은 파괴력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 그룹이 동요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으신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정체가 누구냐에 대해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저자는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대목입니다.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면 미리 예방하지 않으시고 방치하신 것이 아니냐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불신과 배신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아심에도 그들을 내치지 않으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그들을 품으실 수 있어도 다른 제자들은 나쁜 영향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불신의 말이 공동체 전체에 퍼져나가면 마음이 크게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이신데 단지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만 주고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으시고 바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란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오게 하지 않은 이들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 그룹에 불신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오게 하지 않은 이들이란 이 메시지는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까요?

예수님은 불신을 거둬내고 믿음을 심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이들은 불신과 신뢰 사이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우리 자신도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지 미처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인해 근본적인 회의감에 빠지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불신인지, 신뢰인지가 드러납니다. 감춰졌던 불신이 어떤 사건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불신이 드러났다고 끝이 아니란 점입니다. 예수님 곁을 떠나는 빌미로 삼아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더 불신하는 쪽으로 방치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정직한 마음으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일시적으로 흔들린 마음을 붙드는 신앙 자세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불신하는 마음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옹호하거나 방치하지 말고 냉정하게 자신을 채찍질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불신을 신뢰로 바꿀 뿐 아니라 더욱 더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