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6-18 “우리가 받으니” 9/11/2020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을 받아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냐 제한적인 사랑이냐를 놓고 의견이 충돌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개인적이고 체험적일 때 매우 강력하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할 것입니다. 사랑이 이론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추상적이면 뜬구름 잡는 기분이 듭니다. 사랑은 관계적이고 상호적이며 실제적이어야 피부에 와닿을 뿐 아니라 마음에까지 전달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저자가 말한 “우리가 받으니”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받고 있느냐에 대한 출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14절에서 저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충만’이란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뜻합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입니다.

저자는 ‘받는다’는 말에 ‘은혜 위에 은혜’란 설명을 덧붙입니다. ‘받음’과 ‘은혜’의 연결은 우리의 오해를 불식시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와 진리는 보상이 아닙니다. 공부를 잘 하면 받는 상장이 아닙니다. 경쟁에서 이겨 취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물과 땀이 묻어난 가치 있는 성과물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는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모세 율법과 비교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 은혜와 진리가 어떤 성격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모세로부터 온 율법의 성격은 어떠한가요?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지키면 그냥 넘어가지만 지키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이 따릅니다. 법의 특성이 원래 그렇습니다. 법이 정해지면 그것을 지켜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은혜의 요소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온 은혜와 진리는 우리의 노고가 전혀 없는 철저히 거저 주시는 선물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우리는 은혜가 선물임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받으니’란 표현에 답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충만함에서 받는 ‘경험’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에게서 은혜와 진리를 받아 누릴 때에 그것이 선물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고 마음이 움직일 뿐 아니라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은혜의 선물을 받는 실제적인 경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저자처럼 ‘우리가 받으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있어야만 우리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은 은혜와 진리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저자가 말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위해 오셨을까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우리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끄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인데 이것을 위해 우리가 은혜와 진리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예수님에게서 온 것이며 하나님을 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삶이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입니다. 이 충만함을 받아 누리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볼 때입니다.

요한복음1:14-15 “우리가 보니” 9/10/2020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을 벗어나 광야 생활로 접어들었을 때 불기둥과 구름 기둥은 보호막 뿐 아니라 안내 역할을 했습니다. 더위와 추위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을 아끼고 사랑하셨는지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이스라엘 백성의 눈 앞에서 펼쳐집니다. 그것은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얼마나 강력히 영광이 임했던지 모세조차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광경을 출애굽 저자는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40:35)라고 묘사합니다. 눈으로 본 광경이 얼마나 장엄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예수님의 오심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오심을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로 설명합니다. ‘거하심’이란 집을 짓고 그 곳에 사시는 것을 뜻합니다. 모세 시대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듯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으로 말하면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강력히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란 말은 아주 강력합니다. 이것은 눈으로 확인한 사실임을 증언한 것입니다. 이것을 저자는 세례 요한의 증언을 덧붙이면서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예수님보다 반 년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이 ‘나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우리가 보니’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입으로 증언하는 이 장면은 독자에게 신뢰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실제 목격했던 그의 제자들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포함하는 놀라운 단어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제자들처럼 ‘우리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것처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인데 저자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곧바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은 성막 위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에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성막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와 달리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은 어떤 흠이 있는 존재라도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마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까지도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은혜와 진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점검할 때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것이 하나도 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요한복음1:9-13 “반응” 9/9/202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회사에 취직한 후 첫 출근부터 냉대를 받는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마음이 상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다면 힘이 더 빠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오심을 환영하지 않는 세상과 자기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불청객이냐란 이슈를 다룹니다. 거절당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존재를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란 표현은 반가울 수 밖에 없는 분이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빛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 없는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는 말로 강력히 드러냅니다.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힌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저자는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란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 감정도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닙니다. 앞 단락에서 세상이 그의 피조물임을 강조했기에 알지 못했다는 진단은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것입니다. 어찌 이런 반응을 할 수 있는지 경악스러울 뿐입니다. 모를 수가 없는 존재를 이렇게 무시할 수 있다니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기가막힐 지경입니다. 저자는 세상이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는 몰랐어. 그러니 어쩌라고’ 식으로 뻔뻔함이 잔뜩 묻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자신의 무지를 핑계거리로 사용할지 몰라도 그것은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무지의 반응은 세상이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더 수치스러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세상의 무지한 반응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장면은 훨씬 더 강렬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로마 황제를 거절하는 로마 백성을 상상할 수 없듯이 이 장면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 가능한 상상은 반역입니다. 반역을 일으켰다면 왕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왕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자기 땅에 왔는데 자기 백성이 거절했다면 백성들이 다른 왕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왕이 잠시 다른 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자기 나라 백성이 이미 다른 왕을 세우고 반역을 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미 이런 장면을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확인했기에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땅인 이스라엘 나라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왕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대제사장들은 빌라도 앞에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19:15)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창조주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자기 왕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창조주와 왕으로 영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혈통과 육정,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새로운 생명들입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땅에서 확인했고, 교회들이 소아시아에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거듭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생명은 계속 태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들은 민족, 인종, 국가, 지역, 신분, 직업을 구분하지 않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창조주와 왕으로 모신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 빛을 받아들인 진실한 반응입니다.

요한복음1:5-8 “증언자” 9/8/2020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빛이 비치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빛이 없으면 어둠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렇듯이 빛과 어둠은 동시에 한 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빛과 어둠이 함께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어둠이 빛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만 어둠인 세상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계속해서 세상에 나타내고 계시지만 세상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빛을 거부하는 어둠의 모습입니다. 어둠인 세상은 이렇듯이 계속해서 빛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빛은 계속해서 어둠에 비추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둠은 자신을 비추는 빛을 마주합니다. 거절할수록 빛은 더욱 강렬히 어둠에 다가옵니다. 빛이 그 일을 감당하기 전에 그 빛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존재 이유인 동시에 사명입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의 선택이 아닙니다. 본문 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보내심’이란 말은 하나님의 선택임을 드러냅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된 사람입니다. 그는 그 일을 가장 충성스럽게 해낸 사람입니다. 그는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그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빛이라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는 사람임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빛이 대하여 증언하러 온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둠이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의 저자는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어둠에 갇혀 있는 모든 사람이 빛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일을 세례 요한이 감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빛을 증언하는 궁극적인 사명입니다. 증언을 듣는 이들이 빛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하면 매우 이상한 장면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빛을 증언했는데 증언자를 추종하는 장면입니다. 빛을 깨닫지 않고 증언자의 말만 신뢰하는 것입니다. 증언자로 인해 빛이 가려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증언자의 가장 경계해야 할 모습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증언자임을 세 번이나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저자는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로 온 자”임을 언급하면서 빛이 아닌 증언자로서 세례 요한이 자신의 일을 잘 감당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깨닫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세례 요한은 사력을 다합니다. 그의 증언을 듣는 모든 사람이 그로 말미암아 빛을 믿게 하려 한다는 저자의 강조는 이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로 말미암아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빛을 받아들여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어둠이 빛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요한의 사명은 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빛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빛을 받아들인 사람이 된 이후로 그 빛을 다른 이에게 증언하는 사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따라서 빛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빛의 증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란 말을 이런 각도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개인 뿐 아니라 교회도 빛의 증언자로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교회는 그 자체를 빛내기 위해 일하면 안됩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빛의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도 빛의 증언자로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1:1-4 “생명” 9/7/202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저는 어린 시절에 가끔씩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 전쟁 시기에 공산당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신 조부모 이야기, 네 살의 나이에 고아가 된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몰랐던 기억이 납니다.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훨씬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란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지나간 과거는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대한 바른 관점을 갖고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일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어떤 목적으로 이미 일어난 일을 기술하는지에 대한 시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것은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대한 저자의 말입니다. 이것을 기록할 당시에 예수님은 이미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상태입니다. 그분을 믿고 생명을 얻은 사도 요한은 다른 이들도 자신처럼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은 존재가 되었기에 그분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될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자신있게 그분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됨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확인한 요한입니다. 그는 이 생명을 모든 이들이 갖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책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시간이 시작되기 전 이야기와 연결시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란 시작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태초에 이미 존재하셨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에 있습니다. 만물의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자신있게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생명이 만물 생성에 결정적인 것일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절대적입니다. 요한은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면서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빛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듯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에게 있어야 함을 강력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빛처럼 사람들에게 왔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을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을 살리는데 이것을 거절하는 불행이 세상을 뒤덮고 있음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지금도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이 지금도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체험했다면 요한처럼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생명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의 생명을 세상에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생명만이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임을 자랑해야 합니다.

“주만 바라봅니다” (시편150편 묵상) – 8/27/2020

시편의 첫 시에서 시인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축복하면서 시작합니다. 시편 마지막 시에서 시인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시편은 오롯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편이 이 땅의 삶에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며 불안과 걱정, 슬픔과 고통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삶에 드리워진 빛과 그림자를 묘사하는 시인의 탁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럼에도 시편 전체에 흐르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마지막 시편에서도 강렬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시인은 삶의 아픔과 행복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하나님만을 예배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로 첫 포문을 엽니다. 예배자로서 누구만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신앙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느냐입니다.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시인은 “그의 능하신 행동”과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찬양하자고 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앙 지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의 위대함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 죄로 물든 세상 속에 은혜로 임하신 모습, 죄의 사슬을 끊어내고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놀라운 섭리 등을 성경은 풍성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홀로 안전한 곳에 계시고 우리는 전쟁과 기근이 난무하는 불안한 세상에 버려진 것처럼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죄와 죽음으로 뒤덮인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울고 웃으시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은 단순히 기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들어오셔서 함께 지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가 하신 일을 기억하는 우리는 온 맘과 온 힘을 다해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나팔 소리로… 비파와 수금으로… 소고 치며 춤 추어… 현악과 퉁소로…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독려합니다.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경배하자는 이러한 외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다 쏟자는 것입니다. 악기 다룰 능력과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경쟁이 아닌 협력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할 때 주님은 우리 안에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자로서 주님 앞에 서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서로 다른 기질과 성격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으로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자로서 우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평생 주님만을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우리는 함께 주님을 바라보며 예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예배를 통해 이 축복을 더욱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영광” (시편149편 묵상) – 8/26/2020

교회는 거룩함을 포기할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거룩함을 닮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이것보다 다른 것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듯 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성도’란 단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란 경건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의 시편도 이 단어를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성도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고 하면서 거룩한 이들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합니다. 거룩함이 단순히 도덕적 행위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상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거룩함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거룩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 위에 임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거룩함이 우리 안에 가득하면서 우리의 지성, 감성, 의지에 묻어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사회 생활 속에서 여러 관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거룩함이 우리의 인격을 통해 사회로 퍼져 나가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의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찬양을 통해 우리 위에 임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로다”는 시인의 찬양에 깊이 동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즐거움에 깊이 젖어 있다보면 우리의 내면이 새로운 은혜로 가득찰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이 마치 옷을 입듯이 우리에게 입혀질 것입니다. 그 옷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거룩해졌는가란 자긍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더욱 깊이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룩해지는 자신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를 실제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에 진정한 만족을 느끼며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낮출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인의 고백처럼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를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삶이 계속될 때 우리의 거룩함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의로운 행위를 하나 더 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녹아드는 찬양과 즐거움이 우리 안에 더욱 커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가득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영광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거룩한 모습입니다. 성도의 영광은 이 땅에서 누리는 물질적 풍요나 만사형통에 있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성도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이 영광을 우리가 포기하는 것은 너무도 큰 불행입니다. 우리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로서의 영광을 우리는 찬양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찬양을 통한 영광은 교회가 맛보는 영적인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누린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단 하나도 예외없이” (시편148편 묵상) = 8/25/2020

인간 관계를 난로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람을 너무 가까이하면 실망과 상처가 생기기 쉽고, 너무 멀리하면 매정하고 기계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좋습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분을 향한 경외심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가까워지면 편해지기는 하지만 말실수를 해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그분을 더욱 우러러보게 만듭니다. 오늘의 시편은 이같은 마음으로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인의 목소리에 신뢰와 경외심이 잔뜩 묻어납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는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물론 이것을 단지 말로만 할 수 있습니다. 메마른 감정 상태에서 지식으로만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가까이한 경험으로 이렇게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자손”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를 가까이 하는’ 신앙인이 되면 높고 뛰어나신 그분의 위엄 앞에 서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시인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강력히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는 그의 신앙관 때문입니다. 하늘이 아무리 높다해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해와 달이 인류에 주는 유익이 아무리 대단해도 하나님의 작품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시인은 더 깊이 들어가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주 만물의 운행과 법칙, 위치와 활동 등에 하나님의 손길이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해의 위치가 조금만 바뀌어도 우주에 어떤 재앙이 미칠지 과학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구 중력이 조금만 줄어도 세상은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에 이 세상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우리는 얼마든지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자연 만물과 세상의 모든 생물체를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말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단 하나도 예외없이 온 세상은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이들로서 더욱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생물들이 우리처럼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 위에 계시는 가장 위대한 왕이십니다. 그분을 섬기며 따르는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며 기뻐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 (시편147편 묵상) – 8/24/2020

시편 전체를 흐르는 강력한 에너지는 ‘찬양’일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찬양의 목소리는 자연과 인간 세계를 뒤흔들만큼 우렁찹니다. 시인은 과녁이 없이 허공에 화살을 쏘듯이 찬양하지 않습니다. 막연하고 불분명한 어조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감정으로 하나님을 높이지 않습니다. 찬양할 이유가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풍성한 감성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고 말합니다. 찬양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마음에도 없는 포장된 감성은 조금의 흔적도 없습니다. 찬양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시인의 마음을 휘감고 있기에 그의 찬양의 폭은 넓고 풍성합니다. 특히 오늘의 시편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연과 인간 세계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선명한 어조와 깊은 감성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자연 세계에 펼치신 하나님의 행적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와 “그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준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입니다. 과학의 눈으로만 보면 시인의 감흥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구름의 생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시대에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시인의 감성에 녹아들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행동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시인의 영감어린 표현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시인처럼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이 풍성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최첨단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자연 세계와 하나님을 분리하려는 모든 시도에 우리는 강력히 저항해야 합니다. 자연의 법칙에 모든 것을 맡기고 손을 놓고 계신다고 함부로 단정지으면 안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연 세계에 깊이 개입하실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사람의 삶에 깊숙히 들어와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을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고 합니다. 세상은 이 말에 콧웃음을 칠지 모르나 우리는 진심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란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삶에 실제로 개입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기쁨의 찬양이 넘치는 가운데 우리의 기도는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 주님은 우리를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불안할 때 평안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굶주릴 때에 배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행동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활동 앞에서 우리는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더욱 깊이 신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헌신” (시편146편 묵상) – 8/22/2020

한 평생 변함없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지 모릅니다. 죽음을 앞두고 후회없이 살았다는 말을 남기는 차원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정한 대상을 위해 산 것이 전혀 후회스럽지 않았다는 자기 고백 차원입니다. 오늘 시편에서 시인은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고 고백합니다. ‘생전’과 ‘평생’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이런 다짐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나 지금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감정으로는 평생동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난제들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식어가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과거의 뜨거웠던 찬양이 얼음처럼 차가워져 입 밖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말을 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시인이 말하는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신앙 고백은 멀리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굴곡 속에서 얼마든지 소망을 다른 곳에 둘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의지하자고 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상처입은 우리의 감정은 다른 소망으로 가득채워질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에게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시인은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하지만 권력과 물질을 쥐고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많은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을 경계하는 것일까요? ‘의지하다’는 말이 중요한데, 서로 돕고 살아가는 삶 자체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는 삶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것은 사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은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를 칭찬하는 시인의 말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삶을 강조하면서 시인은 하나님이 얼마나 진실하신지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라고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단순히 우리의 열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헌신의 대상인 하나님이 얼마나 신뢰할만한 분이신지를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함을 영원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의 헌신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시인은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고 말합니다. 정말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불의와 불공평함으로 뒤틀린 사회 구조 속에서 실망하지 않고 주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계심을 믿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공허한 대상이 아닌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을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영원하기에 우리의 헌신도 변함없이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