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14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2022년 1월 5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을 만나신 예수님을 요한복음서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세 번째’란 숫자를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숫자 표기는 물고기 잡은 숫자를 ‘153’이라고 기록한 것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기록의 정확성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이는 기록의 신뢰성을 중요시 여기는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들어간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란 표현은 다른 두 번의 나타냄에는 없었던 것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확실성을 최고 수준으로 강조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난 후에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요소를 원천 차단한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도둑질해갔다는 음모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복음서 내용을 보면 실제로 그런 음모설이 유대 사회에 퍼져나갔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 것은 모든 헛된 소문들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것이 확실했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 또한 확실했습니다.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부활의 증인들이 지어냈다거나 거짓 증언을 하고 있다고 음해하는 잘못된 주장들을 반박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임을 또한 놓쳐서는 안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에 대해 요한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것은 자기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나타내셨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의 증언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들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부정되면 교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간과하는 어떤 주장도 용납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부활의 몸을 나타내셨다는 사실 하나로 교회는 부활을 세상에 증언해야 하기에 이를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란 저자의 서술을 단순한 기록 정도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기록했다는 정도로 이 서술을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이 진술은 교회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는 생명과 같이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요한복음서에 나온 이 진술 하나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정도로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단어 하나 하나에 생명을 불어넣어서 읽어야 할 정도로 귀한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지난 이 천년 동안 세상에 알렸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부활의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부활을 치부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적인 증명도 없이 몇 사람의 증언만으로 부활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미개한 짓인 것처럼 호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요한복음서가 기록한 부활의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향해 당당히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씩이나 부활의 몸을 자기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이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의 확실성을 흐릿하게 만드는 세상의 목소리에 우리는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셨고 모든 시대 모든 교회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세상에 증언하고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한복음 21장 13절 “사랑으로 돌보시는 주님” 2022년 1월 4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맞이하신 예수님은 손수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부활의 몸으로 친히 음식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떡과 구운 생선을 마련해놓고 제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신 예수님은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직접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생선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을 가져다가 먹을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이 직접 챙겨주시는 모습을 본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에 보여준 장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의 성인들을 먹이셨던 모습과 죽음 직전에 제자들과 나눴던 만찬 장면이 그것입니다. 한 번은 허기진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셨고, 다른 한 번은 자신의 죽음을 기리는 차원에서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직접 떡과 생선을 나눠주심으로 부활의 확실성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기 위해 떡과 생선을 직접 준비하신 것은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실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과거 어부 생활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삶 한 가운데로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한 번 이번 일로 인해 예수님이 없는 삶은 불가능함을 깨우쳤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 자기들만의 삶을 꾸민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음을 깊이 느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입니다. 얼마나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표현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셨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신 것인데,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표현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부활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하게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이후에는 이렇게 직접 아침 식사까지 준비하셔서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나눠주심으로 그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사랑의 진정한 모습을 몸소 실천하셨던 것입니다. 끝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넘치는 사랑의 모습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라”(롬5:8)라고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극진히 아끼고 사랑하신 것을 우리가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마련해 놓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떡과 생선을 직접 나눠주셨던 것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로 구체적일 수 있는지를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이 땅의 삶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삶 깊숙히 개입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시점에 채워주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다” 2022년 1월 3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온 시점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생선을 숯불에 올려놓고 떡까지 마련한 상태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셨습니다. 이런 상세한 묘사는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아침을 먹으라고 하신 이후 본문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위해 모여들었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속마음을 읽어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는 마치 제자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진술한 놀라운 내용입니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신 예수님에게 감동한 것이 아니라 지금 눈 앞에 계신 분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이심을 의심할 수가 없는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읽어낸 것입니다. 더 이상 ‘당신이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보았음에도 여전히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의심의 싹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임을 암시해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치 두 번 본 것으로는 확신이 들지 않던 제자들이 이제는 완전히 의심하지 않는 지경에 이른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대화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아침 식사까지 준비하신 것을 보면서 남아 있던 의심의 작은 싹까지도 사라졌던 것입니다. 제자들 스스로 이제는 더 이상 예수님의 정체를 캐물을 수도 없을 정도로 부활하신 주님이심이 확실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도마는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접 확인한 후에 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이번에는 물고기를 잡으러 바닷가에 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다는 제자들 중의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확인했던 도마까지도 아직까지 의심의 싹을 제거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이는 의심하는 제자들의 못난 모습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번 보여주었다고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제자들의 모습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대화도 해보고 손과 옆구리도 만져보게 하고 식사까지 준비해서 제자들 앞에 두는 것을 보고서야 의심의 싹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부활 자체를 믿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의심의 싹 자체가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라고 적고 있는 저자의 설명은 이것을 읽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을 알고 있는가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안다’는 것은 ‘감히 당신이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더욱 더 철저해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할 수가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주님이신 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의심의 공격을 받아도 방어할 수가 있게 된 것임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교회 안에만 부활을 가둬놓고 지내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을 반성하게 만듭니다. 교회 밖을 나가면 부활 자체를 언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 안에 부활에 대한 의심의 싹이 아직도 남아 있기에 세상 앞에서 당당히 부활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안에 부활에 대한 어떤 의심의 여지도 남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9절-11절 “자발적인 순종의 아름다움” 2021년 12월 31일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시몬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음에도 과거의 직업인 어부의 삶으로 되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와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날이 밝아지려는 시간에 바닷가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멀리에서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의 말대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자 그것을 들어올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심을 알자마자 곧바로 바다로 뛰어 내리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먼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육지에 올라와 보니 예수님은 이미 숯불 위에 생선을 놓으셨고 떡도 준비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누군가를 가리켜 명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단순히 생선이 부족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 일곱 명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베드로가 즉시 행동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6절과 비교하면 흥미로운데,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들 수 없을 정도로 그물에 물고기가 많았다는 것인데 어떻게 베드로 혼자서 그물을 옮길 수가 있었는지 의아한 장면입니다. 어떤 학자는 베드로가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육지에 끌어 올렸다고 했는데, 본문은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 세 마리라”고 적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앉아서 숫자를 세고 있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물에 있는 물고기를 육지에 쏟으면서 제자들이 합세해서 숫자를 센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는 있습니다. 또한 153마리의 큰 물고기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숫자가 그물에 잡힌 모든 물고기를 포함한 것인지, 아니면 육지에 꺼내놓은 숫자만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같이 많다’는 것과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볼 때에 이보다 더 많은 물고기가 있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측과는 달리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베드로의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혼자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올린 그의 행동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을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겠다는 그의 각오를 느끼게 해 주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다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오직 예수님에게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잡은 생선을 다 가져오라고 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그물을 통째로 육지에 끌어올렸습니다. 조급함이거나 성급함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이것 저것 잴 필요도 없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자발적인 순종은 이 장면을 읽는 모든 이에게 신선한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순종은 이와 같이 자발적일 때에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자발적인 순종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더욱 빛이 납니다. 억지로 하는 순종이거나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체면 때문에 하는 순종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이처럼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을 마치 자유를 빼앗는 것처럼 왜곡시키는 시대이지만 예수님을 향한 순종은 자유롭게 우리가 결정해서 하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자발적으로 순종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는 아름다운 순종의 모습을 삶에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7절-8절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 2021년 12월 30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던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함께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한 마디도 잡지 못하고 빈 손으로 바닷가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저 멀리 해변가에서 한 사람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물에 물고기가 너무 많아 들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일을 이들은 경험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그 사람의 정체를 ‘주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냥 물어본 것이거나 절반의 의심을 품고 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주님이심을 알고서 말한 것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그의 마음을 드러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는 주님이시라고 베드로에게 말했을 뿐인데, 베드로는 즉각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최대한 빨리 주님에게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순간 아무 것도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본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동을 다른 제자들의 것과 비교할 수가 있는데, 8절을 보면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를 든 그물을 끌고 와서”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닷가에 있다는 것을 배에 있던 제자들이 다 알게 되었지만 그들이 보인 반응은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그는 곧바로 바다로 뛰어 들었는데 이것은 주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앞에서 두 번에 걸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게 와닿았는지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바다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는 것은 신앙적으로 유익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아마도 빚진 마음이 가득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얼마 전의 일이 아직도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대화를 하지 못했던 상태였습니다. 마음을 짓누르던 죄책감에서 헤어나올 방법을 찾지 못했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홀로 바닷가에 서 계신 것을 보고서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예수님에게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평소에 많이 했을 것이지만 이 순간에는 오직 하나,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행동으로 그대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멀리서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베드로의 돌발적인 행동은 예수님의 눈에 금방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제일 잘 아셨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개인적인 만남을 갖기도 전에 그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를 예수님은 그의 행동을 보면서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진실해지면 행동이 달라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마음 따로 행동 따로 식으로 분리해서 우리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진실한 마음은 행동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베드로는 특별히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제자들과는 너무도 다르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남다르다면 행동 또한 뭔가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냐는 것은 각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은 남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처럼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4절-6절 “예수님만이 채워줄 수 있기에” 2021년 12월 29일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에 들 수 없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한채 바닷가로 돌아오게 된 제자들은 생각지도 않은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바닷가에 서 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고생만 하고 돌아온 그들의 마음과 감정 상태는 매우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바닷가에 누가 서 있었지만 그가 누군지에 대해 신경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아직 날이 훤히 밝아진 상태가 아니라 멀리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은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고 적고 있습니다. 육안으로 약간의 어둠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분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설마 예수님이 여기에 와 계실 줄을 그들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자리가 줄어들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마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이 온 줄을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먹을 것이 있느냐’로 영어 성경은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았느냐고 묻지 아니하시고 그저 먹을 무엇인가가 있느냐고만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제자들은 ‘없다’고 풀이 죽은 상태로 답을 했습니다. 이 때 바닷가에 서 있는 사람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는 것을 그들은 들었습니다. 그물을 특정한 위치에 던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 순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장면이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어부로 있을 때에 자신들을 부르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말한 이가 예수이신 줄은 몰랐으나 그가 하는 말에서 어떤 권위를 느꼈던 제자들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물고기가 너무도 많아 도저히 들어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확실해졌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명령한 이가 누구인지 그들은 알아챘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고 어느 누가 물고기를 그물 가득히 잡을 수 있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일을 해내실 수가 있었음을 제자들은 즉시 깨우쳤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텅 빈 그물을 물고기로 가득 채우신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입니다. 이는 오직 그분만이 채워주실 수 있는 영역임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물고기를 많이 잡아 이윤을 가득 남기는 경제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텅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도 이겨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빈공간을 채워주셨습니다. 물고기를 그물 가득히 잡았다는 것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 마음 속으로 들어오심으로 채워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상태로 살아갈 수가 없음을 다시 한 번 그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일정 기간 동안 떨어져 있던 제자들이 이제서야 온전히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 시대 교회를 향해 묵직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질과 세상 욕망으로 채워진 상태로 교회만 다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입니다. 예수님 없이는 더 이상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음을 깨달은 자로서 우리는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절-3절 “사명감이 사라지고 나면” 2021년 12월 28일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요한복음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이것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두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장면을 기록한 요한복음서는 마치 글을 끝맺기라도 하듯이 글을 쓰는 목적까지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인 21장을 기록한 것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어떤 견해가 옳으냐보다는 이 마지막 장을 기록한 내용 자체를 통해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본문은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고 시작합니다. 이미 앞에서 두 번에 걸쳐 자신을 나타내신 것과 비교하도록 유도하는 듯이 보입니다. 우리가 앞 장에서 확인했듯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자신을 나타내셨던 예수님은 도마의 믿음을 회복시키기 위해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둘 다 제자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부활의 몸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번째 나타내심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이 점을 좀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7명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는데,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배에 올라 바다에 나갔으나 아무 것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던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고 그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본업이었던 어부 생활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라고 명령하신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물고기 잡는 실력이 줄어서였는지에 대해 본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7명의 제자들이 한 마음으로 물고기를 잡겠다고 나섰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는 점만을 본문이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부활의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던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고 있으라고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의 명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뛰어들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생계를 위해 어쩔 수가 없이 일을 해야하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물고기 잡으러 바다로 간 이들의 모습은 뭔가 이상해 보일 뿐입니다. 사명감은 사라진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는 신앙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의식 자체가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일상의 삶을 살아가려고 어부 생활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한 삶과는 상관이 없는 일상의 삶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이것을 세상에 알려야 할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물론 필요하면 어부 생활도 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천막 짓는 일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어부 생활이라면 이것은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사명감은 사라지고 오직 먹고 사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엄중한 경고라 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사명감을 가진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31절 “믿음으로 얻는 생명” 2021년 12월 27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가야할 곳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길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한 후 길을 떠나는 것이 순리에 맞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나는대로 쓰는 글은 방향을 잃고 헤맬 수가 있습니다. 자료를 모으고 생각을 정리하고 방향을 설정한 후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우리에게 글을 쓰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라면서 글쓰는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이 복음서는 강력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요셉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란 사실을 요한복음서 전체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와 더불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1:14)란 이 책 초반의 기록은 이를 강력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이 책이 강조한 이유는 이것을 읽는 이들이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이 글을 읽는 이에게 믿음을 강력히 촉구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요한복음서를 읽는 사람이면 ‘믿음’의 반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금방 눈치챌 것입니다. 이 믿음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오늘 본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실체를 알게 되고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10:10)이라 했습니다. 이 생명에 대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10:28)라면서 그 실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생명은 영생이며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세상이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가 있습니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에게 와야 합니다. 바울은 이 생명을 이방인 세계에 전하면서,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행13:38)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걸림돌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면서 ‘이 사람을 힘입어’ 우리가 살아날 수 있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란 말을 했던 바울은 이 사망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것 뿐임을 강력히 외쳤습니다. 사망에서 건짐받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생명은 사망이 있기에 더욱 가치가 큰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이후 그 무덤을 방문하신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죽은 나사로 앞에서 무기력한 마르다에게 이 말씀이 들렸듯이 지금도 우리에게 이 말씀은 들려지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 이야기는 지난 2천년 동안 들려졌고 지금도 들려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들려질 것입니다. 사망을 이긴 생명이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진다는 기쁜 소식은 누구든지 들어야 할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이 생명의 복음을 우리가 귀하게 여긴다면 이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체험한 예수 안의 생명을 보석처럼 여길 뿐 아니라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삶의 자세를 갖춘다면 더욱 큰 축복을 우리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2021년 12월 24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도마가 그의 죽음 앞에서 깊은 슬픔에 젖어 있다가 부활의 소식을 듣고서 그 사실을 부정해버린 모습을 요한복음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부활을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보고 나서는 매우 강한 어조로 신앙 고백을 한 것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을 예수님이 들어주신 것 같아 보입니다. 부활의 몸을 나타내신 후에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어찌됐든 도마가 믿는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그가 확실히 믿음의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이렇듯이 의심과 불신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믿음의 사람이 된 도마의 모습은 요한복음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도마의 믿음을 의심하는 뉘앙스가 풍기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더 복되다는 것처럼 읽힐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마의 믿음을 부정한 것도 아니고 의심한 것도 아닙니다.

도마는 보고 믿었지만 그 후의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믿어야 함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도마처럼 고집스럽게 부활의 몸을 보여주어야만 믿겠다고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보지 못하고 믿는 시대가 올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마처럼 보고 믿는 것은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경험일 뿐 그 뒤에 오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본 것을 기초로 부활의 몸을 보지 않고도 믿음으로 반응해야 함을 강력히 전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의 행렬이 얼마나 길게 펼쳐질지에 대해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그 행렬에 동참한 사람들의 모습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부활의 몸을 보았음에도 그의 서신서를 통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를 이만큼 묘사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부활의 몸을 눈으로 확인했지만 그것이 믿음의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이렇게 밝힌 것입니다. 오히려 보지 못해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신앙인들을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고 믿는 것에 익숙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증거가 있어야만 믿는 시대를 살아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증거가 없으면 믿어주지 않는 시대 정신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과연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보고 믿는 것에 익숙한 이들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교회의 책임은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 시대 교회는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로 채워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보고 믿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셨던 말씀처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을 복되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증거가 있어야 믿는다고 하면서 과학적인 사고가 마치 최고의 지성인양 주장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보지 못하고 믿는 신자들을 길러내고 그들로 세상에 나가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증거하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마저 보고 믿는 것에 함몰되어 눈으로 확인하는 신앙만을 부추기는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전에도 예수를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사랑했듯이 지금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했던 초대 교회 신앙인들처럼 우리도 그런 신앙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이것만이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세상을 이길 수가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8절 “체험에서 나온 신앙 고백” 2021년 12월 23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나타내셨을 때에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직접 손으로 부활의 몸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뒤 8일만에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의 모임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는 오직 한 사람인 도마를 위해 그 자리에 오신 주님은 도마를 향해 부활의 몸을 확인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권면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난 손을 만지거나 그의 옆구리에 난 흉터를 확인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주입식으로 배워서 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암기한 후에 답을 말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 후에 하게 된 체험적 신앙고백입니다. 물론 이 고백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16절에서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란 질문을 던진 적도 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과 겉으로 볼 때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과 부활을 거친 예수님을 다시 만난 이 자리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향해 신앙 고백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모두 다 주님을 만난 체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에서 부활의 예수님을 향해 도마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훨씬 더 강력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을 보았던 그가 다른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반응했기에 지금의 고백은 그에게 특별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도마는 더 큰 충격 속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 뒤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이 고백을 붙들고 평생 주님을 위해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이 고백처럼 단단해졌을 것입니다. 부활의 몸을 손으로 확인해야만 믿겠다고 했던 그의 부끄러운 모습과 함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 그의 신앙 고백은 그의 삶을 지탱해주었을 것입니다. 한 때 주님을 의심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그는 주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부활의 예수님을 직접 만난 체험은 도마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최고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 이 고백이 경험이 아닌 지식과 정보 차원에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고백이 성경적으로 정답이라고 배웠기에 앵무새처럼 아무 느낌도 없이 답만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스스로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주님을 체험하면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진심을 담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이 많을수록 우리의 신앙은 더욱 강력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우리의 손이 나약해져 조금만 타격을 받아도 쉽게 손을 놓아버리는 우리의 신앙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제는 나약함을 핑계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체험에서 나온 신앙 고백이 갖는 진정한 영적인 힘입니다. 성경 지식은 팽창해지는데 신앙 체험은 메말라가는 지금의 현실을 극복하는 길은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신앙 고백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 삶에 더욱 많아지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