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0장9절-10절 “이런 놀라운 축복이 있다니” 2021년 3월26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며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아픔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사람이 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의심하게 되고 깊은 우정을 나누기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아픈 경험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이들을 한없이 품으실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을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란 말로 나타내셨습니다. ‘문’이란 안으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오는 출입문인데,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문’에 비유하면서 그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데, 그 문을 출입하는 것은 예수님과의 동행을 뜻합니다. 이것은 ‘문’을 단순히 안으로 들어가는 절차 정도로 여겨서는 안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란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이제부터 모든 여정이 그가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라는 말과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부연설명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은 천국행 티켓을 얻기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왜곡된 시각을 교정시켜 줍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을 천국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같습니다. 이런 시각이 위험한 이유는 예수님이 곧 천국 자체임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각은 천국 입성을 위한 관문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연합을 배우고 훈련하고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란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천국 합격을 위한 시험 문제로만 여기면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시험을 잘 치르고 좋은 점수를 얻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이 어떻게 펼쳐질 지를 기대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란 문을 통과한 자로서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이 무엇인지,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지를 이제부터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온 그동안의 삶과 비교해서 얼마나 다를지를 기대하라는 놀라운 축복이 내포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자로서 누릴 수 있는 생명이 무엇이며, 그것을 더 풍성히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 축복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냐면 예수님이란 문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자로서 평생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살게 되었으니 다른 어떤 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란 말을 용기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의 생명을 얻었고 그 안에서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제부터 누구를 위해 살 것인지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고 예수님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 허울좋은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란 문을 통과한 사람은 매순간마다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날이든 불행한 날이든 우리는 예수님과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예수님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진정 그 축복을 누린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또한 더 풍성한 구원을 누릴 것임을 기대하며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0장7절-8절 “나는 양의 문이라” 2021년 3월25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자녀를 야단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말을 잘 알아듣고 잘못을 고치는 자녀라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삐뚤어진 친구들을 가까이 하면서 부모를 멀리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말을 잔소리로 깎아내리고 그릇된 친구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녀를 볼 때에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지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통해 양으로서 반드시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양은 절도와 강도의 음성을 들으면 안됩니다. 오직 양의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양과 목자의 관계입니다. 실제로 목축 사회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은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와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란 예수님의 묘사는 너무도 정확한 표현입니다. 또한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는 양의 태도도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이 비유가 지향하는 바는 양은 반드시 자기들의 목자의 음성만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목소리에 현혹되면 마치 강도와 절도를 만난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기에 그런 불행을 모면하는 최고의 방법은 목자의 음성에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묘사하신 후에 “나는 양의 문”이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양이 반드시 출입해야 하는 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에 들어갈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 하셨으니 그를 통하지 않고는 문을 통과할 방법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양이라 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인데,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 우리에 들어갔다는 것은 양이 아닌 강도 또는 절도인 것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양의 무리 속에 섞여 있는 강도와 절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양의 탈을 쓰고 얼마든지 양들 속에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단언적인 표현으로 강도와 절도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알아야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어떤 음성도 듣지 않아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것은 예수님과 그의 양들의 특별한 관계 속을 비집고 들어가 포획하려는 불순한 세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절대 안전할 것 같은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예수님은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만 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다른 음성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유혹들이 우리 귀에 들릴 때 그것을 뿌리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영혼을 훔치려는 거짓된 말들에 속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멀어진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절도와 강도의 음성을 듣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가르침이 부모의 잔소리처럼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좋은 음식이라도 배부른 자에게는 부담이듯이 주의 귀한 말씀들이 영적으로 배부른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항상 새롭게 들을 수 있기 위해 마음 자세를 자주 점검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이 쌓일 때 우리는 영혼을 헤치는 강도와 절도의 음성에 현혹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진리로 믿으며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0장1절-6절 “누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2021년 3월 24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를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할 때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한 사람의 의견 정도가 아니라 생명이 달린 일이라면 훨씬 더 심각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을 향해 ‘영생’이 걸린 중요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선천적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영생을 줄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심을 모든 이에게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터져나왔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대인의 비난과 폭력은 도를 넘을 정도로 거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비유를 설교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따른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양의 목자가 있는 반면에 양을 헤치는 절도와 강도도 있다는 점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인지, 타인의 음성인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함을 이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이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시 목축 문화에서 누구나 관찰 가능한 장면을 비유를 통해 이야기하신 것이라 유대인이라면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다 듣고 나서 보인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습니다. 6절,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예수님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니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이로인해 예수님은 7절부터 자세히 이 비유를 해설하십니다. 물론 이런 해설로 인해 비유의 내용이 명확해진 것은 좋지만 이런 설명이 없다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매우 심각한 영적 빈곤 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쉽고 익숙한 이야기를 들려줘도 제대로 판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있지만 사실은 다른 음성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들어왔던 음성과는 이질적인, 아니 너무도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란 부분인데, 이것은 이해력 부족이거나 지적 능력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에 익숙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언어적 표현에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맥을 전혀 짚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잘하고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 마음을 열어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다른 음성에 사로잡혀 있기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도 마음에 전달되지 않는 이런 일은 지금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언제든지 펼쳐서 읽을 수가 있지만 다른 음성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에서 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금방 지루해질 뿐 아니라 더 이상 읽고 싶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음성에 사로잡혀야 하는데, 이것이 안된 상태에서 그의 가르침을 들은들 어떤 효과가 생길까요? 우리는 평소 어떤 음성을 듣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에 마음을 열어놓고 그 진의를 파악하려고 온 신경을 기울인다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듣기 시작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깊은 속내를 이해하게 되고 우리 삶을 온전히 그분에게 바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의 시작은 우리가 평소에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검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과 반대되는 목소리에 점령당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하면서 예수님의 음성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9장39절-41절 “설마 나에게 해당될 줄이야” 2021년 3월 23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아예 모르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마음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를 듣는데 이상하게 알아듣지 못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것도 듣는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논쟁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심각한 심판 이야기를 하신 것은 매우 의미가 큽니다. 단순히 기적을 체험한 사람의 행운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직면한 심각한 영적 비참함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 진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한다’는 것은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한다’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힌트로 예수님과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에게 한 것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단지 서로에게 확인하듯이 물어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한다’는 것이 자신들을 향해 한 이야기라고 그들이 느꼈다는 점입니다.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한다’는 말에 ‘우리가 맹인인가’라고 반문한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못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맹인’이 갖는 이중적인 의미를 그들도 눈치챘던 것입니다. 물리적인 ‘맹인’과 영적인 ‘맹인’을 구분했던 것입니다. ‘보는 자들이 맹인이 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맹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인 맹인을 지적한 것임을 그들도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맹인인가’란 말을 서로에게 하는 것을 볼 때에 자신들이 거기에 해당될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알아들었지만 그것을 자신들에게 적용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도 날카로웠기 때문입니다. 아픈 부분을 찌르면 본능적으로 회피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 경고의 메시지를 피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맹인인가’란 말에는 ‘설마 우리 들으라고 한 말이겠어’란 속마음이 묻어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맹인이었습니다. 눈 앞에 있는 분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는 말씀은 매우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죄가 여전히 그대로 있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죄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맹인으로 그저 예수님만 열심히 따라다닌 결과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맹인인가’란 어설픈 질문 보다는 ‘정말 우리가 맹인이구나.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란 위기 의식을 느꼈어야 합니다. ‘설마 우리에게 해당될 줄이야’란 놀라움을 나타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맹인인가’란 회피성 말보다 ‘진짜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구나’란 수용적인 태도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필요한 자세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하신 말씀이구나’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축복받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선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맹인인가’란 의심보다는 ‘그래 우리가 진짜 맹인이구나’란 고백과 함께 주님의 은혜를 더욱 더 의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날 때에 개인과 교회는 영적인 부흥을 체험할 것입니다. 회개와 겸손의 영적 물결이 교회를 뒤덮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망을 품고서 오늘도 주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요한복음9장36절-38절 “행복한 예배자” 2021년 3월22일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좋아하는 일을 하면 한 시간이 마치 십 분처럼 느껴집니다. 반면에 싫은 일을 하면 시간이 너무도 느리게 가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비슷합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싫어하는 사람과 있으면 그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를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을 다시 만난 그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님을 잠깐 본 이후 한참 동안 보지 못하다가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즐거웠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십니다. 단순한 정보 차원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35절,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했을 때, ‘인자’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란 뜻으로 해석되는데,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맹인이었던 사람은 주저함 없이 ‘내가 믿고자 합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실체를 확실히 보여주십니다. 이 말을 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고 고백함과 동시에 그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예배자로서의 태도를 취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배 대상자는 오직 한 분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예배하고 있습니다. 주변 유대인들이 어떻게 여길지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행위로 인해 얼마나 공격을 받을지 예상이 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직 예수님만이 보일 뿐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었기에 그를 예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한다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절대적인 신뢰를 하기에 충분한 분이셨습니다. 이 정도의 확신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예배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가장 행복한 예배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는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님을 예배하는 그의 마음을 막으려는 어떤 세력도 지금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예배자로서 오로지 예수님만을 경배하며 섬기는 그의 마음을 과연 어느 누가 빼앗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문제될 것이 없음을 그는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될만큼 강력한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지금도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있나요? 과연 우리는 행복한 예배자인가요? 예수님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예배드리고 있나요? 아니면 다른 욕망들로 인해 겉치레에 불과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행복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지만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이 어려운 일을 해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으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한 예배자로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매순간 잊지 않는다면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9장35절 “신앙의 신비한 매력” 2021년 3월19일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시대에 따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얼마든지 다른 대접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재 국가는 기독교 신앙을 용납하지 않기에 그 사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거의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퇴출될 정도로 예수를 따르는 일은 위험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 편에 서서 유대 권력자들과 맞섰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인으로 낙인찍힌채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미움을 받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상당한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눈을 떴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개인 신상에 해를 끼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은 지켰으나 혼자 광야에 남겨진 것처럼 외로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외로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격하여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했지만 사람들에 의해 그 사회에서 퇴출되는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아무도 맹인이었던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상황에서 놀랍게도 한 분이 그에게 다가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란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 사람을 예수님이 만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닙니다. 배척당했다는 말을 들은 후에 예수님이 그를 만나셨습니다. 이 대목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외롭게 싸웠고 그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된 사람을 직접 만나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하게 된 상황에서 예수님이 만나러 오셨다니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들과는 멀어졌지만 예수님과는 가까워진 모습에 감격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과 가까워지면 예수님과 멀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가까워지면 사람과 멀어지는 고통이 뒤따를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서 고민할 때에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정해야 합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그 결과로 사람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져 마치 겨울에 따뜻한 집에서 쫓겨나 눈보라를 혼자 맞으며 추위에 떨어야 하는 상황이 왔지만 예수님이 그를 더 가깝게 끌어당기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이 갖는 신비한 매력입니다.

사람과의 거리가 멀어져 춥고 외롭지만 예수님이 채워주시는 경험을 우리는 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주는 가장 매력적인 부분으로서 모든 신자들이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 체험이 쌓일수록 인간적인 고통과 외로움에 굴복하지 않고 예수님 편에 서는 신앙 생활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사람과의 거리를 두고 외롭게 신앙 생활을 하자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사람과의 거리가 멀어져야 예수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할 때에 사람과의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예수님은 더욱 더 가까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인간적인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예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로 인해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어떤 아픔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 편에 서는 신앙적 결단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체험하는 예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9장30절-34절 “마음을 울리는 고백” 2021년 3월18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맹인으로 태어나 거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아야 했던 한 사람의 운명이 예수란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시선에 맞서 예수란 사람의 위대함을 알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일을 오늘 본문에서 맹인이었던 사람이 해내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정죄 의식에 사로잡혀 예수와 맹인이었던 사람 모두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비난만 쏟아내는 유대인들 앞에서 치유받은 그 사람은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합니다. 아무리 예수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차고 넘쳐도 그 속에서 담백하게 마음을 울리는 고백을 내뱉는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일 뿐 아니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신앙 고백이 이렇게도 멋지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것은 진실의 힘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수의 힘으로 진실을 가리려는 유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다’고 말하는 모습은 그것 자체로 강력한 울림을 줍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예수란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아니면 어떤 답도 있을 수 없음을 그는 강력히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예수란 사람이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그의 말을 들으셔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에 주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라면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없음을 명확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신앙 고백입니까? 주변의 모든 유대인들이 강압적으로 예수를 미친 자로 치부하는 현실 앞에서 그는 당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으로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진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그의 신앙 고백은 마음을 울리는 진심에서 우러나왔지만 주변의 유대인들은 그를 ‘온전히 죄 가운데 난’ 자로 정죄하면서 쫓아내버립니다. 어찌보면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 고백이 아무런 열매도 얻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을 울리는 신앙 고백이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아도 진심어린 신앙 고백은 그 자체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이미 예수님께 다 드렸기에 어디서든 예수님의 제자로서 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울리는 신앙 고백은 귀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당장은 열매가 없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그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마음을 울리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내적 변화가 예수님에 의해 일어났음을 누구 앞에서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작으나마 주님의 도구로 쓰이는 영광을 맛볼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아무리 작고 보잘것 없는 한 개인일지라도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9장28절-29절 “누구의 제자인가” 2021년 3월17일

“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점과 모세의 율법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이었습니다. 이것을 손상시키는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아브라함과 모세보다 먼저 계셨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그의 글에서 예수님에 대해 기록했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놀라운 주장입니다. 이 두 가지 주장은 당시 유대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었기에 그의 주장을 미친 사람의 말로 일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맹인이었던 사람이 그들을 향해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느냐’면서 도발적인 말을 합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그를 향해 욕설을 내뱉습니다. 욕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분노가 조절 불가능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한다는 말이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예수를 미친 사람으로 봤기에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같은 부류로 취급받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향해 욕을 하면서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반박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너는 그의 제자’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예수처럼 미친 사람의 제자나 되라는 치욕을 안겨다준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들은 자랑스러운 모세의 제자임을 부각시킨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수치스러운 일이나 모세의 제자는 자랑스럽다는 유대인들의 잣대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그들은 진정 예수란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할까요?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 증명이 되었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있게 모세를 치켜세우면서 그의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란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가 있을까요? 모세에 대한 진단은 옳지만 예수에 대한 판단은 너무도 편협했습니다. 그들이 예수에 대해 ‘그는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모세가 그리워하던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모세의 글이 메시아 예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유대인들이 반드시 수긍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모세의 제자가 아닌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가장 감격스러워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모세가 바라던 이스라엘의 메시아란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이란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며 이미 아브라함과 모세도 바라보았던 분이란 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갑자기 수퍼맨처럼 등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랜 약속의 성취자로서 오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세상의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인정할 때에 우리는 그의 제자됨을 자랑스러워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 자세가 우리로 세상에서 당당히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세상이 예수를 수치스럽게 모욕해도 우리는 그분을 가장 자랑스러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의 제자로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

요한복음9장26절-27절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2021년 3월 16일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대화에서 설득은 매우 중요한 수단입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잘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설득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설득의 실패는 언제나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 사건은 당시 유대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눈을 뜨게 했기에 본질은 사라지고 논쟁만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의 능력은 깎아내리면서 안식을 범했다는 정죄만 쏟아냈습니다. 그 중심에 맹인이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에게 소환된 이후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당당히 말했지만 사람들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눈을 뜨게 된 과정을 있는 그대로 말해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확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억지스러움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은 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이것은 이미 여러 번에 걸쳐 물어본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높이는 맹인이었던 사람을 압박하면서 다른 답을 나오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강압적 태도는 그를 꺾지 못했고 오히려 역공을 당하고 맙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란 질문을 던지면서 상대방을 당황케 합니다. 아무리 체험한 이야기를 말해줘도 듣지 않는 유대인들의 태도에 그는 역정이 났고 상대방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을 질문 형태로 되돌려 준 것입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란 말은 핵폭탄급 파장을 불러올만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미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고자 하는 것을 보니 설마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그러느냐란 어찌보면 능청스러운 질문은 유머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위트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은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옆에서 듣던 사람들은 일종의 기분 전환을 느낄 정도로 통쾌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반격에 담긴 깊은 의미를 우리가 가볍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듣고 또 듣는 일이 제자됨의 중요한 요소란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듣지 않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해줘야 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비록 지금은 예수 이야기에 거부 반응을 보여도 그들은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기에 그들은 예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란 말에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 절실히 필요함을 감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소용없구나란 절망감을 맹인이었던 사람이 느꼈을지 몰라도 우리는 세상을 향해 예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줘야 합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예수 이야기를 마음껏 펼쳐놓아야 합니다. 예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믿음이 생길 것이며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중도에 예수 이야기 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는 굽히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신 복음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말해줘야 합니다. 상대방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일이 없을 것 같아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가 세상 속에 남겨진 이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9장24절-25절 “용기 있는 행동” 2021년 3월15일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대화를 하다가 ‘억지부리지마’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일을 끝까지 부정하려 하는 경우에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을 놓고 유대인들은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뜬 사실 자체를 부정하다가 여의치 않자 그 부모를 소환해서 억지를 부려보지만 그것도 실패로 끝나게 되자 이제는 맹인을 낫게 한 예수란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 놓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눈을 뜨게 된 일을 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불문율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예수란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동시에 예수를 정죄하는 그들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구태여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파헤치는 순간 쓸모없는 논쟁에 휘말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너무도 명확한 자기 입장을 내놓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는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고 말합니다. 이는 너무도 현명한 처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냐란 논쟁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시 언급함으로 논란을 끊어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유대인들에 맞서서 ‘어떻게 예수님을 감히 죄인이라 말할 수 있느냐’고 따졌어야 한다고 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 순간 대단한 용기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 논쟁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행위 자체를 덮으려는 유대인들의 치졸함에 맞섰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죄인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가 눈을 뜨게 한 사실 자체입니다. 쓸모 없는 논쟁에 에너지를 소모하기 보다 이미 일어난 사실 자체를 통해서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아닌 하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고 억지 주장을 펼쳤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란 사람이 눈을 뜨게 한 장본인임을 강력히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유대인들의 사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그런 복잡한 생각보다는 예수란 사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점만을 강조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란 사람이 해냈으니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를 선지자로 보았던 것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예수를 죄인으로 정죄해도 그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과 그것을 일으키신 예수란 사람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모습입니다.

모두 다 반대하는 곳에서 외로이 찬성표를 던지는 행위는 힘든 일입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 편에 서서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해질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이것에 실패하면 우리의 신앙은 자기 만족에 그치는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용기 있는 신앙의 행동은 반대에 부딪힐 때 빛이 납니다. 예수 신앙을 비난하고 업신여기는 사회 또는 개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영생을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새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주셨는지를 잊지 않아야 이렇듯이 용기 있는 신앙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늘도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격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