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때일수록 (시편 4편 묵상) – 3/19/2020

어떤 연예인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소위 매우 잘 나가던 시절에 항상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고,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인기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어느 순간 인기가 식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주변에 사람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전화를 해도 부담스러워하고, 도움을 요청할까봐 꺼려하고, 개인적 만남은 아예 기대조차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진짜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평소의 친구들이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친구인줄 알았는데, 어려움을 당하자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하는 모습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만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이가 어려움을 당할 때, 과연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 속담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친구들이 어디에 있는가만 생각하지 않고, 친구가 어려울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울 때 제일 필요한 마음 자세가 무엇일까요? ‘너그러움’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뿐 아니라 친구가 어려울 때, 이웃이 어려울 때에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이란 다른 이들을 품을 공간이 넓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 말합니다. 너그럽게 대하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행위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너그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자격을 따지지 않고 상대를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말하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들어줄 수 있는 너그러움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너무도 좋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너그러움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시편 4편 1절에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시편 저자의 마음을 너그럽게 하셨습니다. 너그러움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너그러움이 ‘나의 곤란’ 중에 발휘된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가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평안을 주셨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고통 중에 너그러움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만이 체험하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불안과 아픔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마음을 넓게 만듭니다. 곤란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너그러움이 우리 안에 심겨집니다.

우리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얼마든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할 것”을 압니다. 이유는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려울 때일수록 빛이 납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응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 만나지 못하지만 전화, 문자, 카톡으로 서로를 더 품는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위기 속에 빛나는 것은” (시편3편 묵상) – 3/18/2020

‘위기는 곧 기회’란 매우 흔한 말이 있습니다. 위기에 직면한 사람에게 주로 하는 위로의 말입니다. 물론 위기를 겪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위기는 불안으로 이어지고 두려움에 휩싸이도록 우리를 몰아갑니다. 위기는 그 자체로 불청객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조성하는 위기는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다양한 옷을 입고 인생 속으로 파고듭니다. 건강을 잃거나 실직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우리 삶의 뿌리까지 흔들 정도로 위기입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한 개인, 한 지역, 한 국가가 아닌 전세계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도 안전지대가 없을 정도로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 온 인류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문을 잠궈보지만 안에서부터 퍼져나가는 바이러스의 위력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은 실로 가공할만합니다. 수많은 바이러스와 싸웠던 인류이지만 이번의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수퍼급이라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란 말이 아닌 그 무엇이 우리 신앙인들을 붙들어줄 수 있을까요? 바이러스는 교회를 향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도 내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하는 듯이 위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시편3편2절,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바이러스가 교회를 향해 지금 하고 있는 조롱섞인 말과 비슷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바이러스로부터 구원하지 못하신다는 조롱을 세상이 쏟아내는 듯 합니다. 교회가 자랑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바이러스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고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교회는 이런 위기 속에서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시편 저자는 3절에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조롱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이러스 앞에서 무기력한 세상이 하나님도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조롱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을 더욱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주는 나의 방패’라고 소신있는 발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이러스와 세상의 조롱 앞에서 우리마저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을 멈춘다면 교회는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방패이신 하나님을 향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4절, “내가 나의 큰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처럼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앙의 통로입니다. 바이러스가 위협하고, 온 인류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현 상황에서 교회는 의연하게 일어나 각 처소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시편 1편 묵상) – 3/17/2020

익숙함은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는 동시에 지루함을 느끼게 합니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낯설고 새롭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집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것은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듭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낯설게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작업입니다. 낯설게 함으로 익숙한 성경 이야기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인 시편 1편은 익숙한 시이지만 낯설게 함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입니다.

본문은 ‘복 있는 사람’이 누구냐로 시작합니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쪽으로 이 시를 읽곤 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대신에 율법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면 복을 받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복을 받으려면 세 가지를 피하고 한 가지를 지키면 된다는 적용을 합니다. 과연 이 시는 복받을 방법을 가르칠까요?

오히려 이 시는 쉽지 않은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쉽지 않은 길이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도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이것이 복받은 길이라 칭찬합니다. 아무리 복받는 길이라 해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고통스러운 길이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자주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고 마음의 여유가 없기에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 힘들다 합니다. 너무나 바쁘고 할 일도 많은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하루가 24시간인데, 10분 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런 삶을 사는 이에게 신앙이 있다는 이유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라는 것은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기에 말씀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많고 마음의 여유가 많아도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일은 버겁습니다. 그동안에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싶고, 이제는 누리면서 살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라니 종교적인 틀에 나를 가둬두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할 것 같고, 누리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양심에 가책이 생기고 죄책감을 느끼게 할 것만 같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도 말씀과 함께 하는 시간만은 최소화시키고 싶어집니다.

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일이 쉬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선택입니다. 가장 꺼리는 선택입니다. 가장 나중에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입니다. 특히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앞에 서야 합니다.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일이 쉬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선택입니다. 가장 꺼리는 선택입니다. 가장 나중에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입니다. 특히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역주행 신앙

제가 오래 전에 한 번 운전하다 역주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가본 길인데 약간 헷갈렸습니다. 무심코 좌회전을 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차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 역주행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급하게 핸들을 꺾고 그 길을 벗어났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입니다. 한 편으로는 길도 몰라 역주행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도로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대형사고의 지름길입니다.

인생에서 역주행은 과연 어떨까요? 물 흐르듯이 시류를 따라 사는 것은 지혜로운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예를들어, 회사에 들어가 회사 규칙을 따라 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학생은 학교 규칙을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시민 정신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힘들게 할 수 있는 좋지 못한 형태가 역주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역주행하는 사람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불공평하고 불의하고 죄악이 만연한 사회일 경우에는 역주행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군사독재 시절을 겪을 때, 수많은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역주행을 시도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와 법의 잣대로 보면, 역주행한 사람들은 다 죄인들입니다. 국가에 반역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거역하는 역주행을 시도했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민주 시민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골칫거리로 여겨졌습니다. 역주행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있기에 사회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그 뒤에 오는 세대가 좀 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럼 신앙은 어떨까요? 역주행하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인이 사회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중요한 권면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역주행 신앙이라 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이 바로 역주행 신앙입니다. 이 세대란 각 신자가 살고 있는 사회 전반을 가리킵니다. 각 세대마다 가치관이 있습니다. 각 사회가 가르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관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권면입니까? 또한 각 신자에게 이보다 더 큰 고민을 안져주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가치관을 본받지 말라는 것은 신자의 삶을 위태롭게 할 지도 모릅니다. ‘사서 고생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시류를 따라 살면 편할 것을 세대를 본받지 않고 역주행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니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은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신자로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역주행을 해야 하는 신앙 생활이 우리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물론 매일 역주행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역주행할 수 밖에 없는 삶이 우리를 찾아올 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과연 당신은 역주행 신앙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혹시 지금 역주행 신앙의 초대장을 받아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서로 격려하십시오

자녀가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로서 속상한 일입니다. 성격상 내성적이라 항상 기죽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밝은 아이인데 어떤 사건으로 인해 기가 팍 죽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속상하지만 부모로서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용기를 심어주는 일입니다. 어찌 자녀뿐이겠습니까? 남편이 회사일로 인해 기가 죽어 있는 경우 아내의 할 일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아내가 어떤 일로 인해 마음에 상처가 생겨 기가 죽어 있으면 남편은 당연히 용기를 심어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용기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상대방에게 용기를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좋지 못한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 용기를 주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기를 팍팍 넣어주고 싶은데, 핀트가 안맞는 것입니다. 기껏 힘을 주는 말을 했는데, 적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더 기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기를 살리는 것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마음만 먹는다고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좋은 말을 많이 해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방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아픈 부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던지는 한 마디 말이 힘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적절한 말은 상대의 기를 살려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서로 격려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돌아본다는 것은 상대방을 관심 갖고 면밀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말입니다. 좋은 의사는 진찰할 때 정성을 다합니다. 혹시 놓치는 부분이 있는지 신경을 씁니다. 그래야 환자에게 바른 처방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서로 격려하기 위해 신자들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흠을 찾아내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정죄와 비판을 목적으로 살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은 교회 공동체 전체가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격려해야 할까요? 관심을 갖고 상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이제는 상대의 기죽은 마음을 살려줄 격려가 필요합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사랑과 선행’입니다. 사랑없는 선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선행없는 사랑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인적인 격려를 해야 합니다. 수박 겉핧기 식으로 격려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의미 없는 말 몇 마디로 격려했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전인적인 격려가 필요합니다.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만나야 격려든 뭐든 할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과 선행은 만남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이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습관으로 굳어질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습관에 빠지면 서로 격려하는 일은 불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서로 모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모임을 통해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개인주의 시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사는 교회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기 위해 모이기를 힘쓴다면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기도 응답

기도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론 보다는 실천이 더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물론 잘못된 기도 이해가 잘못된 실천을 낳기도 하지만 실천하지 않은 채 이론적으로 기도를 아무리 깊이 이해한들 아무 소용이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기도 생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응답되지 않는 기도 경험입니다.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면 다시 찾아가기 어려운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기도 실천을 주춤하게 만듭니다. 또 거절당할까 하는 두려움과 서운함, 그리고 원망 등이 섞여 기도 생활을 중단하게 만듭니다. 이런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기도하려면 무엇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기도 생활에서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로 ‘낙심’을 꼽으셨습니다. 낙심이란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포기하는 자세입니다. 기도하다 낙심하는 것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 포기 사태를 걱정하신 예수님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낙심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한 과부 이야기를 통해서 기도를 포기하면 안됨을 강조하셨습니다. 원한에 사무친 비참한 현실 속에서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딱한 처지의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포기하지 않고 찾았습니다. 재판관인데 불의한 사람이기에 당연히 과부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과부의 절망은 더욱 더 깊어졌습니다. 과연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불의한 재판관을 계속해서 찾아가 하소연하는 것 뿐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길 뿐입니다. 과부는 원한을 반드시 풀어야 했기에 포기하지 않고 불의한 재판관을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과부 이야기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셨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쓸쓸한 기억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를 되새기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우리의 절박함 보다 더 신경써야 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이것을 확신할수록 우리는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 같은 절박한 시기를 맞이하면 기도 응답은 더욱 절실해집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린채 무조건 들어주어야 하는 절박한 우리의 형편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고 있지만, 기도 대상이 누구신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은채 왜 기도 응답이 없느냐에 대한 원망만이 늘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기도에 오래참지 않으심을 믿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래참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우리는 계속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절박함과 오래참지 않으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의 신앙은 더욱 커질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응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기도를 통한 하나님 신뢰가 더욱 급선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추억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추억은 과거형일 뿐 현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도록 방해만 할 뿐이라 생각합니다. ‘왕년에 나도 잘 나갔는데’ 하는 아쉬움은 현실 부적응자들의 신세한탄으로 비춰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참하게 살고 있음에도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과거에 얼마나 잘 나갔었는지를 부각시킨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문화에 복고풍이 불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1988’이란 드라마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1980년대 유행했던 노래나 문화를 복원시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전혀 모르는 젊은 세대들도 어느 정도 공감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추억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좋은 추억을 되새김으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삶의 의욕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추억이 현실을 이길 수는 없지만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좋은 추억은 사람들에게 순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자에게 도움을 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좋은 추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것을 경험한 1세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반추되는 좋은 추억입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자주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먼저 추억케 하는 사건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셨는지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입니다. 지금은 광야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 사는 이스라엘로 과거 출애굽 사건을 돌아보도록 계속해서 요구하십니다. 광야라는 현실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라는 큰 주제를 묵상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좋은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회성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 일을 하신 하나님이 지금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신다는 점을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오래전에 일어난 출애굽 사건을 돌아보도록 하시는 이유는 과거형 사람이라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점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1세대 이스라엘만의 좋은 추억이 아닙니다. 이것은 출애굽을 경험하지 못한 이후의 세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로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을 시와 노래로 작사, 작곡하게 해서 이스라엘로 찬양하도록 하신 것이 시편입니다. 출애굽을 경험했든 역사적인 기록으로만 읽든 상관 없이 이스라엘은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좋은 기억으로 삼아 매일 되뇌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과연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출애굽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건을 되뇌이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온 인류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령은 이 복음을 교회에 적용시키셨습니다. 성령은 교회를 새롭게 함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도록 역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자랑은 출애굽 사건이듯이 교회의 자랑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도 삼위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에 복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인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굴곡

역사를 보면, 나라의 흥망성쇠를 볼 수가 있습니다. 과거 조선은 500백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뒤 영원할 것 같았던 나라가 500백년만에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세계의 역사를 보더라도 로마가 한 때 세계 최강의 나라였지만 지금은 로마 제국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뿐입니다. 흥할 때가 있으면, 망할 때가 있습니다. 부흥할 때가 있으면, 쇠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전도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중략)..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인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생에는 굴곡이 있다는 뜻입니다. 굴곡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한 쪽에서는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구의 한 쪽은 가뭄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홍수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운동 선수에게도 이와같은 비슷한 굴곡이 있습니다. 전성기를 달리던 선수가 어느 순간 부상으로 슬럼프에 빠집니다. 부상이 없음에도 원인모를 슬럼프에 빠져 전혀 회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재기에 성공해서 또 한번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경우도 있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은퇴할 시기가 찾아옵니다. 은퇴한 후 아무리 위대한 선수라도 현역으로 다시 뛸 수는 없습니다. 설령 은퇴를 번복하고 현역으로 뛰어든다해도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운동 선수의 굴곡의 삶입니다.

그럼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도 일정 주기가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를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교회의 전성기로서 부흥을 맛보는 시기입니다. 모든 일이 부흥의 밑거름이 됩니다. 교회에 대한 소문이 좋게 납니다. 설령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도 금방 사그라집니다. 소란이 일어나지 않는 교회가 없듯이 청년 시기를 거치는 교회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찻잔 속의 폭풍처럼 찻잔을 깨뜨리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쇠퇴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쇠퇴기를 맞이하면서 교인들이 교회를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작은 문제도 크게 불거집니다. 작은 원망들이 크게 들립니다. 사람들이 상처를 입기 시작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통제되지 않고 교회 전체를 흔듭니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과 원망과 험담이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을 세우기 보다 허무는데 전력을 쏟습니다. 이것이 쇠퇴기를 맞이하는 교회의 특징입니다.

각 신자마다 겪는 신앙의 굴곡이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후 영적인 변화를 경험할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는지 체험한 사람은 다 압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후 그의 모든 삶이 변화되었듯이 회심한 신자는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변화는 예수님에 대한 열정이 뜨거워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르면 불이 꺼진 장작처럼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열정이 사라집니다. 신앙의 슬럼프가 찾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의 신앙이 어떤 굴곡을 겪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신앙의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까? 아니면 신앙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꿀보다 더 답니까?

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이라도 먹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맛이 있다고 평가를 해도 먹는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상태에 따라 맛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나쁘게 나올 수가 있습니다. 먹는 사람이 소화불량에 걸려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도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혀의 미각을 잃은 사람이 최고의 음식을 먹는다면 어떨까요? 전혀 그 맛을 모를 것입니다. 어찌 음식뿐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감탄하는 위대한 그림을 과연 맹인이 본다면 그 느낌을 알 수가 있을까요? 맹인에게는 세상 최고의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시편119편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시인에게 얼마나 귀한지를 맛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주의 말씀이란 고백입니다. 꿀보다 더 달다는 시적 표현도 말씀에 대한 이 시인의 반응이 얼마나 좋은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말씀과 꿀을 비교하면서 말씀이 더 달다고 말하는 시인의 평가를 어떻게 공유할 수가 있을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고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이 시인에게는 그렇게도 달고 맛있는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무색, 무미한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과연 우리의 삶에서 이 시인처럼 주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는 경험을 얼마나 해 보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주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의 말씀이 왜 이렇게 무색, 무미한지를 보여주는 성경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지배 하에서 고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천국 같던 삶이 그의 죽음 이후 지옥의 삶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모든 환경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섬기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결과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힘든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더욱 가혹한 학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모세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스라엘에 전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출애굽기6장9절입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가혹한 노역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의 상함과 현실의 힘든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무색, 무미해진 것입니다. 꿀보다 더 달다는 고백은 지금 이스라엘에게는 단 1%의 가망성도 없습니다. 이렇듯이 신앙인들이 주의 말씀을 귀찮아 하고 배척하고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의 상함과 고되게 사는 삶입니다. 어찌 이것뿐이겠습니까? 얼마든지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핵심은 주의 말씀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시험입니다. 주의 말씀이 어떻게 내 귀에 들리느냐를 점검해야 합니다. 꿀보다 더 달고 맛있게 들립니까? 아니면 무색, 무미하게 들립니까?

기도 없이 지내십니까?

우리가 복음서를 읽으면서 자주 목격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 생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봐도 그의 기도 생활은 남달랐습니다. 아무리 피곤한 하루라 해도 밤새도록 기도하곤 하셨습니다. 또한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하실 때에도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특히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보여주신 기도의 모습은 처절할 정도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얼마나 진력을 다하는 기도였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으시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기도 생활에 충실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그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도하자’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도 예수님처럼 기도하자는 데에 이의를 쉽게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빠뜨린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기도하자는 논리를 펴기 전에 예수님이 왜 그렇게까지 기도하셨는가를 풀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요? 왜 기도 없이 지내지 않으셨을까요? 우리는 기도 없이 지내도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데, 예수님은 기도 없는 생활을 용납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도를 부족한 자가 완전한 자에게서 채움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무엇을 해결해 달라거나 어떤 위기를 극복하게 해 달라거나 질병에서 낫게 해 달라는 등 우리는 기도할 때 필요한 부분을 채워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전부 이런 관점에서 시작을 합니다. 우리 힘으로 해 낼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해결하려는 도구로 기도를 사용합니다. 이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병든 자는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노예생활에서 구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는 기도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기도를 접근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만 여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격성과 관계성을 무시한채 우리의 필요만을 채워주는 알라딘의 지니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기도 생활은 치명적으로 우리가 기도 없이 지내도록 부추깁니다. 꼭 무엇이 필요할 때만 기도하는 습관에 빠져버립니다.

예수님이 기도 없는 삶을 용납하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느날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하나님이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셨다는 분명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혼자 두신 적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바로 이것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기도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기도 없는 삶을 상상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동행을 확인하고 체험하고 새 힘을 얻는 것이기에 예수님은 기도를 중단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예수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기도가 습관이나 도구나 의무가 아니라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없는 생활을 용납하시지 않은 이유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기도 없이 지내고 있습니까? 기도 없이 지내도 불편함이 없으십니까? 그것은 필요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즐거움은 우리로 기도 없이 살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