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시편 13편 묵상) – 3/26/2020

구약 성경 중 전도서를 보면 매우 놀라운 지혜들이 넘쳐납니다. 그 중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이것은 인류의 진보를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발명들이 출현하는 문명 사회에서 이 말씀은 비현실적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업적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서가 말한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접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과연 새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실 수 없는 유한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처음과 끝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바이러스의 공격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슈퍼급 전염성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위축된 세상 속에서 과연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면 될까요?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절대로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까요? 바이러스에 걸리면 하나님이 버리신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이러스에 걸리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바이러스에 걸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거나 외면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바이러스를 기준 삼으면 하나님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바이러스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약해서 시편 저자처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라고 탄식합니다. 이것은 연약함의 표현이지만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불안에 휩싸여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신을 얼마든지 표출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하시니 우리 스스로 보호하자는 불편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출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바이러스로 인해 사망의 잠을 잘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과연 누가 담대해질 수 있을까요?

시편 저자는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나님을 이긴 것처럼 기세등등합니다. 교회도 바이러스가 하나님을 이겼다고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공적 예배가 중단되고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되고 기도 모임이 힘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바이러스 앞에서 무장해제된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시편 저자는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 다짐합니다. 지금이 우리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주의 사랑을 의지하는지,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확실하면 잠시 주춤하고 위축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할 때” (시편 12편 묵상) – 3/25/2020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회복된 후 인터뷰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 회복된 것에 감사하면서도 가장 괴로운 것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변의 차가운 시선입니다. 바이러스 환자를 죄인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려웠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음에도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뿐 아니라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이러스 감염자들도 희생자들인데, 마치 가해자인 것처럼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감염된 환자로서 약자임에도 전염성 때문에 격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치이지만 차갑고 매정한 눈으로 보는 것은 2차 피해를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약자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이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5절에서,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심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직접 일어나 그들을 도우실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희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주어져 그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가 가련한 자들, 궁핍한 자들을 더 누르고 더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감염환자들을 죄인 취급함으로 마음의 상처를 깊게 내는 지금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시편 저자가 살던 당시 사회에 과연 이웃을 품을 수 있는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까요? 저자는 1절에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진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사회에 가짜 뉴스가 난무하면 사회적 분위기는 냉랭해지고 비열해집니다. 저자는 8절에서,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을 때”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 일들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진실에 기초하지 않고 괴소문에 마음이 사로잡혀 약자들을 더욱 괴롭히는 사회는 불행합니다. 과연 지금의 사회는 어떠한가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짜 뉴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가장 두려운 일은 감염자들이 죄인취급당하는 것입니다. 전염성 때문에 격리하고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분노와 화풀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4절처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겠느냐”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약자들을 짓누르고 없는 자들을 탄식케 하는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과연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까요? 약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어나 약자들을 안전한 지대에 두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7절,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감염자들도 희생자이며, 따뜻한 위로가 필요함을 우리는 알지만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감염에서 회복되었음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것 또한 그들의 아픔을 알지만 용기가 없어 품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움츠러들기보다 어깨를 펴고 용기를 갖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흔들리는 순간에” (시편11편 묵상) – 3/24/2020

제가 어릴적 시골은 화장실이 바깥에 있었기에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저희 사형제는 서로 품앗이 하듯이 짝을 지어 화장실에 같이 가곤 했습니다. 둘이 함께 가면 두려움이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나보다 약한 동생을 데리고 감에도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보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혼자 보다는 둘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의 두려움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짓누릅니다. 우리는 보호 장치를 마련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를 보호해 줄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든든함을 넘어 깊은 안도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합니다. 안전한 삶을 무너뜨리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공격해 들어오면 우리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지만 곧바로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줄 존재를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찾아가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분이십니다. 시편 저자는 1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피신했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이 경험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어려움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 또는 역경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께 피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웃습니다. 저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1절에서,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했는데, 다른 곳으로 도망하라니 이보다 더 모욕적인 조롱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내 명성에 금이 가는 것으로 모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피난처로 여기는 우리의 신앙이 조롱당할 때 더 큰 모욕을 느낍니다. 하나님께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조롱섞인 말에 우리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우리를 조롱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며 우리의 삶을 현미경 보듯이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시편 저자는 4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하면서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신다”고 확신있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살아갑니다. 지금과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이겨나갑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의 파워입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위축과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순간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고 계심을 믿으며 그분을 피난처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생각” (시편 10편 묵상) – 3/23/2020

코로나 바이러스의 증상이 독감과 비슷하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기침과 발열이 공통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 앞에서 기침만 해도 의심받을 정도로 사람들의 경계심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육체에 질병을 유발시키고 다른 이들에게 전염시키며, 호흡 곤란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해치는 바이러스의 침공은 온 지구를 뒤덮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마음 속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공포와 의심 등 수많은 정신적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애써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오직 육체의 고통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들여다 볼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차분히 앉아 점검해 볼 여유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서로의 안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방침이지만 마음까지 거리를 두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습니다. 서로간의 친밀함을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서 어떻게 유지할 지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의 거리 두기란 불편한 사실이 이미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거리 두기는 우리의 생각이 이미 바이러스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가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삼키는 바람에 사람들의 마음까지 걸어잠궈버리는 위험한 사회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로간의 관심은 사치란 생각이 들고, 오직 자신의 안전만을 위한 생각에 몰두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점점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음의 건강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마음까지 병들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교회는 서로간의 관심와 애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 저자의 목소리에서 힌트를 얻고자 합니다. 시편 저자도 불건전한 신앙의 목소리들이 난무하던 시대에 건강한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병든 사회, 그것에 편승하여 신앙인조차 병든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회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11절에,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는 병든 마음의 신앙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와 사회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다고 단정짓는 목소리들이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13절에서 시인은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란 신앙적 울분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병든 신앙인의 그릇된 신앙 표출에 대한 시인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는 강한 확신의 말은 시인의 건강한 생각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적으로 건강함은 이렇듯이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건강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 시대는 마음의 건강이 더 중요합니다. 건강한 생각을 갖고서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볼 수 있는 신앙인들이 활동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위축되어 있지만 건강한 신앙적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활발히 움직일 날을 고대합니다. 지금 이것을 위해 마음의 건강을 챙길 때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세상” (시편 8편 묵상) – 3/21/2020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실체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그것에 감염되면 몸이 아프고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지금 온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이기에 두려움과 불안이 더욱 더 커지고 있습니다. 치료제가 만들어져야만 이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언젠가는 치료제가 개발되어 사람들을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전방위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에 의해 감염되기에 반드시 지켜야 할 생활 규칙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규칙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기에 모든 이들이 이 규칙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욱 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시편 저자는 3절에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본다”고 신앙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 신앙인데, 믿음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죄로 인해 물들었고, 죄의 결과로 수많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할 뿐 아니라 인류 역사가 이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재앙으로 얼마든지 고통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 감탄하면서도, 현실은 주의 대적들, 원수들, 보복자들로 인해 위협당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둘 사이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나갈지를 고민합니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란 전염성이 슈퍼급인 적 앞에서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과연 고백할 수 있는지를 시험당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 불안에 제압당한 상황이지만 신앙인들은 이것을 뚫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란 고백에서 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란 보이지 않는 적의 무차별적 공격 앞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실 뿐 아니라 돌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신앙인은 어둠이 세상을 덮을지라도 빛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이러스를 뚫고 그의 백성을 지켜주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바이러스로 인해 오염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손길이 세상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일그러진 세상을 다시 펴실 것이며 그분의 이름을 빛내실 것입니다.

“의연하게 대처할 때” (시편6편 묵상) – 3/20/2020

한 개인에게 불행이 닥쳐오면 신앙인으로서 고민하게 됩니다. 혹시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찔림이 생깁니다. 누구에나 양심의 가책이 있듯이 신앙인에게는 독특한 신앙 양심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일종의 죄책감인데,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나 하는 감정적인 반응입니다.

개인을 넘어 국가적인 재앙이 오면 신앙인으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죄악에 물든 사회를 이런 방식으로 벌하실 수 있다는 검증되지 않은 느낌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전세계적인 바이러스 재앙이 발생하면 ‘혹시 이것은 마지막 때의 징후가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외적인 현상을 놓고 신앙적으로 판단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당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사고를 놓고 신앙적인 판단을 하셨습니다. 이번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온 세상이 고통을 당하는 시국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를 놓고 교회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선지자적인 안목이 있는 양 편향된 시각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오히려 배가시키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건전한 교회는 지금의 재난 앞에서 어떻게 해야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시편 저자는 2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 합니다. 3절에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면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시대적 재난이든 개인의 재난이든 신앙인으로서 가장 먼저 반응해야 하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수척해졌다’와 ‘내 영혼이 매우 떨린다’는 솔직한 감정 표현을 들어보십시오. 남에 대한 판단 보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신다’고 솔직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고백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외롭고 힘든지를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재난에 직면한 신앙인의 영적 무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는 특권을 우리는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재난 앞에서 피할 길을 찾는 것은 본능이지만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신앙적 결단입니다. 4절에서,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라 할 수 있는 간절한 소망을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표출해야 합니다.

신앙적 의연함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지만 이런 저런 위기와 재난을 겪으면서 단련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의연하게 신앙적으로 대처할 때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시편 4편 묵상) – 3/19/2020

어떤 연예인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소위 매우 잘 나가던 시절에 항상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고, 주변에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인기는 아침 안개와 같아서 어느 순간 인기가 식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주변에 사람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전화를 해도 부담스러워하고, 도움을 요청할까봐 꺼려하고, 개인적 만남은 아예 기대조차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진짜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평소의 친구들이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친구인줄 알았는데, 어려움을 당하자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하는 모습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만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이가 어려움을 당할 때, 과연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 속담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친구들이 어디에 있는가만 생각하지 않고, 친구가 어려울 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려울 때 제일 필요한 마음 자세가 무엇일까요? ‘너그러움’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 뿐 아니라 친구가 어려울 때, 이웃이 어려울 때에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이란 다른 이들을 품을 공간이 넓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은혜’라 말합니다. 너그럽게 대하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행위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너그러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자격을 따지지 않고 상대를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상대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말하는 의도를 의심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들어줄 수 있는 너그러움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너무도 좋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너그러움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시편 4편 1절에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시편 저자의 마음을 너그럽게 하셨습니다. 너그러움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너그러움이 ‘나의 곤란’ 중에 발휘된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가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평안을 주셨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고통 중에 너그러움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들만이 체험하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불안과 아픔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마음을 넓게 만듭니다. 곤란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너그러움이 우리 안에 심겨집니다.

우리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얼마든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할 것”을 압니다. 이유는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려울 때일수록 빛이 납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응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 만나지 못하지만 전화, 문자, 카톡으로 서로를 더 품는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위기 속에 빛나는 것은” (시편3편 묵상) – 3/18/2020

‘위기는 곧 기회’란 매우 흔한 말이 있습니다. 위기에 직면한 사람에게 주로 하는 위로의 말입니다. 물론 위기를 겪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위기는 불안으로 이어지고 두려움에 휩싸이도록 우리를 몰아갑니다. 위기는 그 자체로 불청객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조성하는 위기는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위기는 다양한 옷을 입고 인생 속으로 파고듭니다. 건강을 잃거나 실직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우리 삶의 뿌리까지 흔들 정도로 위기입니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한 개인, 한 지역, 한 국가가 아닌 전세계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도 안전지대가 없을 정도로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 온 인류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문을 잠궈보지만 안에서부터 퍼져나가는 바이러스의 위력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은 실로 가공할만합니다. 수많은 바이러스와 싸웠던 인류이지만 이번의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수퍼급이라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란 말이 아닌 그 무엇이 우리 신앙인들을 붙들어줄 수 있을까요? 바이러스는 교회를 향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도 내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하는 듯이 위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시편3편2절,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바이러스가 교회를 향해 지금 하고 있는 조롱섞인 말과 비슷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바이러스로부터 구원하지 못하신다는 조롱을 세상이 쏟아내는 듯 합니다. 교회가 자랑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바이러스 앞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고 조롱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교회는 이런 위기 속에서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시편 저자는 3절에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조롱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이러스 앞에서 무기력한 세상이 하나님도 아무런 능력이 없다고 조롱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을 더욱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주는 나의 방패’라고 소신있는 발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이러스와 세상의 조롱 앞에서 우리마저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을 멈춘다면 교회는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방패이신 하나님을 향해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4절, “내가 나의 큰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처럼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신앙의 통로입니다. 바이러스가 위협하고, 온 인류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현 상황에서 교회는 의연하게 일어나 각 처소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시편 1편 묵상) – 3/17/2020

익숙함은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는 동시에 지루함을 느끼게 합니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낯설고 새롭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집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것은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듭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낯설게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작업입니다. 낯설게 함으로 익숙한 성경 이야기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인 시편 1편은 익숙한 시이지만 낯설게 함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입니다.

본문은 ‘복 있는 사람’이 누구냐로 시작합니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쪽으로 이 시를 읽곤 합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대신에 율법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면 복을 받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복을 받으려면 세 가지를 피하고 한 가지를 지키면 된다는 적용을 합니다. 과연 이 시는 복받을 방법을 가르칠까요?

오히려 이 시는 쉽지 않은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쉽지 않은 길이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도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이것이 복받은 길이라 칭찬합니다. 아무리 복받는 길이라 해도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고통스러운 길이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자주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고 마음의 여유가 없기에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 힘들다 합니다. 너무나 바쁘고 할 일도 많은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하루가 24시간인데, 10분 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런 삶을 사는 이에게 신앙이 있다는 이유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라는 것은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시간도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기에 말씀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많고 마음의 여유가 많아도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일은 버겁습니다. 그동안에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싶고, 이제는 누리면서 살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라니 종교적인 틀에 나를 가둬두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낍니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할 것 같고, 누리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양심에 가책이 생기고 죄책감을 느끼게 할 것만 같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고, 마음의 여유가 생겨도 말씀과 함께 하는 시간만은 최소화시키고 싶어집니다.

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일이 쉬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선택입니다. 가장 꺼리는 선택입니다. 가장 나중에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입니다. 특히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앞에 서야 합니다.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일이 쉬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선택입니다. 가장 꺼리는 선택입니다. 가장 나중에 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먼저 해야 할 입니다. 특히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역주행 신앙

제가 오래 전에 한 번 운전하다 역주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가본 길인데 약간 헷갈렸습니다. 무심코 좌회전을 하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차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순간 역주행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급하게 핸들을 꺾고 그 길을 벗어났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입니다. 한 편으로는 길도 몰라 역주행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있습니다. 도로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대형사고의 지름길입니다.

인생에서 역주행은 과연 어떨까요? 물 흐르듯이 시류를 따라 사는 것은 지혜로운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예를들어, 회사에 들어가 회사 규칙을 따라 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학생은 학교 규칙을 따라 생활해야 합니다. 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시민 정신의 첫 번째 원칙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힘들게 할 수 있는 좋지 못한 형태가 역주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역주행하는 사람을 필요로 할 때가 있습니다. 불공평하고 불의하고 죄악이 만연한 사회일 경우에는 역주행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군사독재 시절을 겪을 때, 수많은 지식인들, 대학생들이 역주행을 시도했습니다. 그 당시 사회와 법의 잣대로 보면, 역주행한 사람들은 다 죄인들입니다. 국가에 반역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를 거역하는 역주행을 시도했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민주 시민이라 칭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골칫거리로 여겨졌습니다. 역주행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있기에 사회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기에 그 뒤에 오는 세대가 좀 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럼 신앙은 어떨까요? 역주행하는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인이 사회에서 역주행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중요한 권면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역주행 신앙이라 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이 바로 역주행 신앙입니다. 이 세대란 각 신자가 살고 있는 사회 전반을 가리킵니다. 각 세대마다 가치관이 있습니다. 각 사회가 가르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관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권면입니까? 또한 각 신자에게 이보다 더 큰 고민을 안져주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가치관을 본받지 말라는 것은 신자의 삶을 위태롭게 할 지도 모릅니다. ‘사서 고생을 한다’는 말이 있듯이 시류를 따라 살면 편할 것을 세대를 본받지 않고 역주행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니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은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신자로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역주행을 해야 하는 신앙 생활이 우리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물론 매일 역주행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역주행할 수 밖에 없는 삶이 우리를 찾아올 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과연 당신은 역주행 신앙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혹시 지금 역주행 신앙의 초대장을 받아들고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