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8장53절-55절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2021년 3월 1일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은 단순한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했기에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매우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증명하기에 특별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긍지를 허물어뜨린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예수님은 마치 죽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고 유대인들이 물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면서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은 정말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귀신들린 사람으로 규정했기에 미친 사람의 말을 들어서 무엇하겠느냐란 냉소적인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내게 영광을 돌리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유대인의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신다니 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에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은 분노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감정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시고 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란 대목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모욕적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모세 오경을 외우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대못을 박다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예수님이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근거로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은 앞 단락에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뺀 채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이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진정한 목적이기에 그들은 귀담아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방황하면 안됩니다. 이 두 분이 서로 자기 쪽으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것처럼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두 분 사이에는 어떤 빈틈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큼 하나님을 알고 지키는 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두 분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 안됩니다. 마치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아이들처럼 행동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더 깊이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에 감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일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8장51절-52절 “내 말을 지키면” 2021년 2월 26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이었습니다. 은유를 통해 진리를 전하시는 방식 때문에 여러 오해들이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물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어머니 태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물리적인 물로 오해했습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을 실제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약속한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거짓된 약속을 공개적으로 말한 것이 됩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을 지키면 어느 누구도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 될까요? 요한복음11장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나사로가 육체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육체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약속하신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육체의 죽음을 면제받는다는 의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육체적, 물질적 죽음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죽음을 경험한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열매를 먹자 그들이 육체적으로 죽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왜 그 자리에서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을까요?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했으니 먹는 즉시 죽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남으로 죽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겼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 그림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것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면 그 생명이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상에서 옆의 사형수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 사형수는 육체의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축복을 소유한 상태로 육체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지나요? ‘내 말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내 말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다는 것과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그들로 ‘내 말을 지키는’ 일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정도로 위대한 일임을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자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한복음8장50절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 2021년 2월 25일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유대인들의 가장 큰 가치는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손상을 입히는 것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요한복음5:44에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한 그들의 삶을 날카롭게 관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칭찬에 목말라했던 그들의 본성을 예수님이 정확히 꿰뚫어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의 칭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셨던 것일까요? 요한복음5:41에서 예수님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8:29에서 예수님은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하시면서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누구의 영광을 구하느냐에 있어서 예수님은 항상 명확하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은 뒤로하고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유대인들이 인신 공격성 비난을 쏟아내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개인의 명예가 실추되고 온갖 모욕적인 소리를 들어도 상대를 같은 수준으로 비난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셨던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49절에서 그는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말로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명확히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그분이 추구하시는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공경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면밀히 살펴보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삶을 산 사람을 모델로 삼아 본받을 때에 가능합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분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더 깊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0:31에서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의 신앙 목적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영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예수님 안에 있기에 가능하며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란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당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답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8장48절-49절 “날선 대립 속에서” 2021년 2월 24일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토론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때가 있습니다. 서로간의 공격이 도를 넘어 인신 공격에 이르면 불쾌감만 줄 뿐 남는 것이 없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기 위해 절제의 언어를 사용하셨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진흙탕 싸움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예수님의 인격을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고 매우 불쾌한 인신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7:20에서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에 했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8:44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란 예수님의 말에 그들이 역공격을 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 주장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억지 주장임에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들이 6:42에서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기위해 ‘사마리아 사람’과 ‘귀신에 들린 사람’으로 예수님을 규정한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 험악했는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극한의 대립 속에서도 감정을 절제하시면서 반응하셨습니다.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는 방어를 하셨습니다. 특이한 점은 ‘나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너무도 명확해서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사실이 아님을 다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이 들린 사람이란 오명은 확실히 벗어버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말은 귀신 들린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의 특징이기에 강력한 방어로 적합했습니다. 귀신에 들린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란 것은 예수님의 어떤 말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는 그들의 마음 상태를 꼬집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모욕이 얼마나 비인격적인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만큼 비인격적인 것도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조금의 존중도 없이 모멸감과 치욕만 주려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대우를 받으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너희가 나를 무시하니 나도 무시한다’는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할 때 심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듯한 불쾌감은 잘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복음을 말하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의연한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날선 대립 속에서도 감정을 절제하면서 대응하는 모습은 세상 속에서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감정에 사로잡혀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억울함과 모욕감을 이겨내고 차분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말할 수 있는 내적인 성숙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로서 세상 앞에 서 있는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감정의 절제와 함께 진리의 수호자로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8장45절-46절 “진리가 공격받을 때” 2021년 2월 23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메시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메신저를 오염시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흠집내면 그가 말하는 어떤 메시지도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메신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면 메시지는 자동적으로 신뢰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공격을 예수님에게 퍼부었습니다. 본문46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죄로 책잡다’는 것은 없는 죄를 덮어 씌워 죄인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극악한 죄인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한 유대인들의 계획은 치밀했고 교묘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죄인으로 만들려 하고 있구나’라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이에는 이’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와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란 그의 항변이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음을 강하게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진리를 말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죄인이란 오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죄인의 입에서 나온 진리를 누가 신뢰하겠느냐란 전략을 세웠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지만 예수님은 차분하게 대응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란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를 말해줘도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에 그것이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인가요? 진리가 들려져도 그것을 듣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 어찌 유대인들만의 문제일까요? 지금도 얼마든지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심을 전하는 교회의 목소리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목소리가 세상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차별적으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진리를 외치는 교회가 완벽하지 못하기에 세상은 교회의 잘못을 핑계로 진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모양인데 그들이 말하는 진리를 신뢰할 수 있느냐란 볼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흠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죄인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은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 흠이 있는 존재로 예수님을 세상에 외치니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완벽해질 때까지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전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흠이 있는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교회를 사용하셔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속에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을 내다보면서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최선을 다해 전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성령은 지금도 불신하는 이들 속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진리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진리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8장44절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2021년 2월 22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정치인들이 가끔 군중을 자극하기 위해 선동적인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편 가르기란 비판을 듣지만 자기 편을 모으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라고 정당성을 펼칩니다. 상대방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모욕적으로 들릴 정도로 심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을 근거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달리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서 상대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것은 분명 모욕적인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은 비판과 비방 사이를 오가는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온갖 비방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미쳤다’거나 ‘거짓말한다’거나 ‘자살하려한다’는 등 감정적인 단어들을 섞어 인신 공격을 예수님에게 퍼부었습니다. 비판과 비방이 난무하는 상황이 길어지면 양 쪽 모두 잘못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수님이 옳았고 유대인들이 틀렸음에도 둘 다 잘못이라는 양비론이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런 진흙탕 싸움 속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대응하시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관성을 갖고서 유대인들을 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영적 아비가 누구인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38절, ‘너희 아비에게서’와 41절, ‘너희 아비가 행한 일’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 아비 마귀’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아비의 실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영적 실체를 드러낸 정확한 진단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모욕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39절에서,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했고, 41절에서는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스러워하던 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인 ‘마귀’를 사용하면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워했을까요? 이보다 더 모욕적인 말이 없었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향해 ‘바알세불’(귀신의 왕)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마귀의 자녀들인지를 설명하시면서 그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이 마귀의 자녀들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아비인 ‘마귀’가 어떤 실체인지를 매우 상세히 밝히셨습니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며’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의 독창적 주장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귀’가 이런 존재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마귀가 어떻게 하와를 유혹했는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고,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 모두 다 마귀의 후손이라는 예수님의 단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누구냐면 ‘마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진단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아비 마귀’라고 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제는 마귀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따라서 마귀의 권세를 꺾고 그 굴레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일은 축복을 나누는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이 일을 위해 부름받았음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8장43절 “들어도 들리지 않는” 2021년 2월 19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등산을 하다보면 출입 금지란 경고 문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위험을 미리 알려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무시하고 행동하기에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할 때에 어리석다는 질책을 듣습니다. 사고당한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 질책을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심정으로 유대인들에게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추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리고 설명해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에 이렇게 질책을 하신 것입니다. 답답한 심정이 진하게 묻어있는 꾸중의 목소리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했기 때문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했다면 그들이 꾸중들을 일이 아닙니다. 설명이 어렵거나 부족해서 발생한 일이라면 듣는 사람의 잘못일 수가 없습니다. 설명이 뭔가 잘못되어 일어난 일이기에 듣는 사람의 책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왜 깨닫지 못하느냐’란 꾸중은 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설명이 너무도 확실하고 선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영어 성경은 이 본문을 “내 말이 왜 너희에게는 선명하지 않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선명했지만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준 좋은 번역입니다.

설명하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듣는 이의 책임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면서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뒤이어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듣지 않는 태도를 문제삼은 것이 아닙니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 부족을 지적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듣지만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상태를 꼬집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붙잡을 생각이 처음부터 그들에게 없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 마음 상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기가막힐 정도로 해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청각에 문제가 있거나 듣기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가 아니라 조금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에게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들려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심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움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설교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좋은 설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설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느냐에 있습니다. 듣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메시지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만큼 위대한 설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 메시지를 전혀 듣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유대인만의 문제일까요? 좋은 메시지가 없어서 듣지 않는 것일까요? 오히려 듣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듣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설교를 잔소리로 여기는 풍토가 점점 커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좋은 말씀이 계속해서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나마 우리에게 남은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마른 영성의 시대이지만 듣고 깨닫는 이들이 생기고 있기에 좋은 말씀은 계속해서 들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좋은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요한복음8장41절-42절 “복음의 원동력” 2021년 2월 18일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떤 공간에 수용할 수 있는 사람 수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도 수용할 수 있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어느 수준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을 넘으면 수용할 수 없게 됩니다. 유대인에게 예수님은 그런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들춰내고 계셨습니다. 예를 들면, ‘죄의 종’이라거나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등입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라고 항변합니다. 그 근거로 “우리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근본 신앙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임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제는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방어막을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그들에게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했으니 그들이 느꼈을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라고 재반박을 하셨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라면 지금 눈 앞에 있는 예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를 사랑하는 자에게만이 진정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을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당시 유대 사회 분위기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등한 위치에 두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기에 유대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것을 받아들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근거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고 하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기가막힐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아버지이지만 예수는 자신들과 같은 유대인일 뿐이었습니다. 이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만적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통과해야만 유대인들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끈질지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여러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유대인들은 이 부분에 걸려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도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계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수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유대인들이기에 당시 유대 사회의 분위기를 너무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같은 유대인으로 성장했지만 예수님에 대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은혜 덕분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로 보여도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복음을 외치는 이들의 유일한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들이 있을 것이란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거절하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녹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지금도 복음을 외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8장39절-40절 “문제될 것이 없다는 착각” 2021년 2월 17일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인간 관계가 어긋나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깨진 관계가 미치는 영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가벼운 감기 몸살처럼 지나갈 때가 있는 반면 평생 가슴에 응어리가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중에 상대방의 소중함을 모른채 관계를 끊어버리는 최악의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그런 선택을 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를 그들은 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기적과 설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조건 예수님을 제거할 생각만 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진단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같은 단어인 ‘아버지’를 사용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심각한 문제를 알려주고 계셨지만 그들은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오래된 확신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란 것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는 착각에서 헤어나오게 하시는 예수님의 특단의 조치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이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선하게 대했던 아브라함의 태도를 가리킨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18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주의 천사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러 온 이들을 한결같이 최상의 예우로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서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것과 모순되는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의 민낯을 여지없이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이를 극진히 예우했던 아브라함과는 달리 그의 후손이라던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지금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착각이 불러온 가장 비참한 결과입니다.

우리도 지금 문제될 것이 없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그분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니 문제될 것이 없어’란 착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입니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어떤 한 가지를 갖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독이 되어 내면에서부터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너무도 무서운 착각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듣지 못하는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문제될 것이 없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그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점검할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8장38절 “진실이 눈 앞에 있어도” 2021년 2월 16일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자유로울 것’이라 하셨습니다. 진리는 곧 아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예수님 자신을 지칭합니다. 따라서 진리인 아들만이 자유를 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진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실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진단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에 진실이 보이지 않았던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신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이란 그들이 알고 있는 것들이 전혀 다른 출처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듣고 있는 목소리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는 너무도 이질적이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유대인의 귀에 들리지 않았을 것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평소 자신들이 들었던 메시지가 아니기에 불편했고 그것을 넘어 적대감만 커져갔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와 ‘너희 아비’를 대조하시면서 유대인들의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셨습니다. 그들이 듣고 있는 목소리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그들 속을 지배하는 다른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진짜 뉴스와 가짜 뉴스가 혼용되어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동안 듣고 있었던 뉴스들이 가짜였음이 진짜 뉴스가 들리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규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이 진짜 뉴스인데 가짜 뉴스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전혀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뉴스가 들리고 있으니 가짜 뉴스가 사라질까요? 가짜 뉴스는 더욱 교묘해질 것입니다. 진짜 뉴스가 들릴수록 그것과 구별이 잘 안되도록 변형되어 가짜 뉴스를 믿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이란 말을 콕집어 하신 것은 진짜 뉴스가 들려지면 해결될 일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그들의 아비’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해결된다는 점을 부각시키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 아래에 있는 한 그들은 어떤 진실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앞에 두고 분별하는 것이 겉으로는 좋아보이나 그것이 반드시 훌륭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진실과 거짓을 듣는 우리가 편향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들을 수 있으며 아무리 진실을 들려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기에 진실만 알려주면 다 해결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하지만 그들 자체가 편향되었기에 진실한 말들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진실이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진리인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들은 것을 아무리 외쳐도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실체인 ‘그들의 아비’가 그것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요? 이것을 바울은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고후4:4)이라고 올바르게 진단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엄청난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진리인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바른 길을 걷고 있음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