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향한 열심” (시편69편 묵상) – 5/26/2020

어떤 일에 열정을 쏟다가 한순간 마음이 식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일이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은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 생활에서 흥미를 잃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한 취미가 바뀐다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면 부모의 근심이 됩니다. 개인을 넘어 집안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공부 열정을 되살리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를 설득해서 다시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부모는 최선을 다합니다.

신앙의 열정이 생기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신앙 열정이 타오르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신앙 생활을 합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신앙 생활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삶의 의욕이 차고 넘칠 뿐 아니라 모든 일이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신앙 열정이 생기면 마치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안에 신앙의 열정이 타오르면 바울이 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됩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신앙의 열정이 어느 순간 식어버립니다. 신앙 생활이 낯설게 느껴질 뿐 아니라 불편해집니다. 불편한 사람을 만나고 불편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신앙 생활에 거부반응이 생깁니다. 이유는 사람마다 다양할 것입니다. 시인이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친다”고 말한 것처럼 삶에 큰 고통이 찾아올 때 신앙이 식을 수가 있습니다.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삶이 왜 이리 고달프냐는 탄식이 신앙의 열정을 삼켜버립니다. 시인이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다”고 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했음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신앙이 식어버릴 수 있습니다. 적절한 때에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지만 전혀 기도 응답이 없는 삶이 이어지면서 신앙 생활이 불편해집니다.

시인은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다”고 말합니다. 삶의 어려움과 기도 무응답 수준을 넘어 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데도 오히려 비방과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수치가 얼굴을 덮었다’는 것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굴욕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다”고 자신의 심경을 밝힙니다. 이런 수치와 모욕을 겪으면서도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 무엇도 주를 향한 우리의 열심을 꺾을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고통 분담” (시편68편 묵상) – 5/23/2020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확인합니다. 성경의 첫 장만 보더라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세상이 심하게 망가졌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세계가 죄로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반역과 거짓, 미움과 살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처지가 대비되면서 성경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그것을 배격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계속 충돌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사람의 힘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과 싸우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는데 어느 누가 감히 저항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인은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란 기도를 합니다. 악인의 멸망을 구하는 기도가 왜 나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일어나심에도 원수들이 흩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실력이 줄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시인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 앞에서 행하신 장면을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다”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신데 악인들은 여전히 활동하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고민합니다. 노아 홍수 때처럼 왜 악을 완벽히 제거하지 않으시는 것인지, 악인을 왜 이대로 살려놓고 계시는지를 놓고 미로를 헤매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전능한 분이신 하나님이 지금 누구의 아버지라 하나요? 누구를 위해 지금 일하고 계신다고 하나요?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독한 자, 갇힌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아와 과부가 생기지 않도록 하시면 모든 것이 깔끔히 해결될텐데 왜 굳이 이들의 아버지로 계시는 것일까요? 시인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말합니다. 능력이 무한하심에도 가장 나약한 존재의 아버지로 계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통을 분담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애정만큼은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짐을 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가난한 자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고통 분담이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은혜로 우리는 오늘도 힘을 다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룩한 도구” (시편67편 묵상) – 5/22/2020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복을 주시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창세기12:2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말씀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아브라함 개인만 보면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큰 민족, 창대함’ 등은 당시 문화에서 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복들입니다. 이것이 전능하실 뿐 아니라 약속을 완벽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아브라함은 말 그대로 복덩이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덩이가 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을만한 어떤 비밀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12:3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십니다. 아브라함 개인의 영화를 약속하신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일 것이란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에게 복이 넘쳐 그것이 밖으로 흘러 모든 민족에서 흘러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복덩이가 된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셔서 자신을 세상에 알리시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브라함 인생의 최고의 복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삶이 평탄하지 못하고 수많은 고생을 함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였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인은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 기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태평의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은 항상 건강하고 평탄하고 사업이 번창하고 안전한 곳에 사는 것으로만 보는 현대인의 관점과 거리가 멉니다. 시인의 바램은 하나님이 모든 나라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개인의 물질과 건강의 복을 기독교의 하나님을 통해 얻는다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같은 연약하고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사용하셔서 세상에 자신을 알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는 모든 신앙인이 품고 살아가야 할 비전 기도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모든 복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느냐를 이 비전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모든 민족들의 찬송을 받아야 할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기뻐할 뿐 아니라 즐겁게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도구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위대한 일” (시편66편 묵상) – 5/21/2020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사람들은 감탄을 쏟아냅니다. 파란 하늘 위에 흰 구름들이 멋지게 펼쳐진 모습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석양에 비친 하늘의 오묘한 색채에 눈을 뗄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인류는 누리고 있습니다. 인류의 개발로 인해 자연이 손상을 입어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말처럼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말은 매우 옳은 표현입니다.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장면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들이 “걸어서 강을 건넌” 장면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시인은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시인은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하나님의 창조를 더욱 조롱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신화나 미신으로 추락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반응하고 계신가요?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들으신 하나님은 모욕감과 수치심에 우리를 포기하신 것일까요?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신다”고 밝힙니다. 단련하시는 방식에 대해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해도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시인은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구원이 실제로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 있음을 증언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조롱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우리는 시인처럼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 사람들의 반역에도 긍휼을 거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와서 보라”고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을 알리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세상에 알리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한다”고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업적과 공헌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와 전도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전하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이것을 드러내고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자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소망이 가득한 신앙” (시편65편 묵상) – 5/20/2020

사람마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먹먹한 마음을 푸는 사람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스트레스를 푸는 이도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면서 해소하는 이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어떻게 해소하는 것이 좋을까요? 일반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는 좋은 영적 통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라”고 말합니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치 자녀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부모의 모습과 같습니다. 자녀의 모든 소리를 해결하지는 않지만 어떤 소리도 흘려듣지 않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신앙인이 기도를 중단하고 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마음이 답답할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과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고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꺼내놓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그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것”이라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를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우리는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 마음껏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다” 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아침과 저녁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즐거워할 수 있느냐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아침이 오는 것을 괴로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녁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평범한 일상까지도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범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합니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도 진정하시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이분이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답답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누구를 소망해야 할까요? 심지어 “죄악이 나를 이긴다” 할지라도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소망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마음의 답답함을 소망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근심하는 소리” (시편64편 묵상) – 5/19/2020

우리는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것이 지극히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뉴스를 통해서 들리는 소식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선을 행하면 손해를 보고 악을 행하더라도 돈과 권력이 있으면 괜찮다는 그릇된 가치관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시인이 살던 사회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들을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는” 사람들로 평가합니다. 그들은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비양심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거짓말로 여론을 형성하고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진실을 감추고 약한 자들을 모욕하는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밝히기 보다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됩니다. 약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힘있는 사람들만이 혜택을 누리는 공평하지 못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우리를 보리요 한다”고 고발합니다. 한 사람의 탈선이 아닌 집단화된 악의 형태는 수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고 분노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은 약자들의 분노와 억울함에 대해 조금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 손을 잡고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킵니다.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면’ 그것에 걸린 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과연 누가 그들을 막아줄 수가 있을까요? 억울하게 올무에 걸린 이들을 누가 건져줄 수 있을까요? 죄악을 꾸미는 이들의 덫을 피해갈 수가 없을 때에 과연 누구를 의지할 수가 있을까요? 시인은 개인적으로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나를 감추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쏘실 것”이라 말합니다. 그는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불의를 들으면서 근심하고 개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더욱 근심합니다. 힘있는 이들의 횡포에 걸려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 우리의 근심은 더욱 커집니다. 신앙은 이런 사회에서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강력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는” 신앙으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고” 있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어달라” 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쏘실 것”이란 확신은 우리의 신앙에 큰 힘을 더해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는 불의와 음모가 가득한 세상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더 밝게 빛나듯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은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근심하는 소리를 뚫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소리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영혼의 만족” (시편63편 묵상) – 5/18/2020

우리는 평화로운 삶을 원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광야에 내몰린 듯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구약 이야기에서 야곱은 비록 형 에서와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부모 밑에서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생전 가본 적이 없는 삼촌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가는 동안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두렵기만 합니다. 힘들고 고된 여행길에서 그는 길가에서 잠을 자다 하나님을 꿈에서 만납니다. 그는 설마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겠는란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 경험은 야곱의 인생을 바꾸어놓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영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그렇다고 야곱의 인생이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닙니다. 삼촌 집에 가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성경이 증언합니다. 그럼에도 외롭고 두려운 광야같은 길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평생 그를 받쳐주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살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광야에서 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를 기억하면서 이 시를 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유적으로 험하고 고통스러운 인생길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무슨 소망이 있을까요? 그 곳에 홀로 버려진 것같은 인생이라면 절망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신앙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어떤 소망도 없는 답답한 현실에 갇혀 지낼 수가 있습니다. 신앙이 좋지 않아서 이런 험한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좋아도 얼마든지 고달프고 외로운 삶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인분석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 있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자책을 하면서 자신을 더 괴롭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아픔과 고통을 주는지 서운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들은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감정이 들든 우리는 방향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시인처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어떤 환경이든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갖고 정면돌파를 해야 합니다. 속상하고 원망이 가득한 내면의 소리를 누르고 주를 간절히 찾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찾을 때, 시인처럼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혼 만족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를 가까이 따름”으로 주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시는 놀라운 경험을 해야 합니다. 영혼의 만족은 모든 신앙인이 누려야 할 가장 멋진 삶의 모습입니다.  

“흔들리는 마음” (시편62편 묵상) – 5/16/2020

개인주의 사회에서 공감 능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안전이 가장 중요하기에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시간 낭비인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의 감정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현실에서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극대화되는 디지털 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공감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그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들여다본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정서 교류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 세계가 어떠한지를 정직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누구의 간섭도 용인하지 않는 자신만의 세상을 꿈꾸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과의 정서적인 공감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인은 개인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라면 위험하기에 개인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미래를 고민하며 정서적인 건강을 위해 사색과 독서를 한다면 멋진 시간 활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정서적인 공감 능력을 키우는 일에 개인의 시간을 활용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독려합니다. 그것은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옴”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잊고 하나님만 바라보려는 그의 노력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시인의 노력에 어느 정도로 공감하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의 시간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정서적인 공감이 주는 유익에 대한 확실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는 사건과 사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시인도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는 삶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 그는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할”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리는 마음을 붙드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평소에 하나님과 정서적 공감을 누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삶이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합니다. 우리는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는” 열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시편61편 묵상) – 5/15/2020

우리는 아플 때 건강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건강만 회복하면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합니다. 건강할 때 마음대로 산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기도 합니다. 건강이 나빠졌지만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다면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이런 축복의 길을 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건강을 잃은 후 인생을 포기하듯이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밤잠을 설치고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느라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집니다. 자신감이 넘치던 목소리에 힘이 빠지고 무서울 것이 없이 도전하던 모습도 사라집니다. 마음이 약해지다보니 모든 것에 자신감이 없습니다. 몸이 약해진 것뿐인데 마음까지도 멍이 들어 매사에 의기소침해집니다. 몸이 약해진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마음에 병이 드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이 깊어지면 헤어나올 방법을 찾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위로가 들리지 않고 세상과 벽을 쌓게 됩니다. 마음에서 들리는 건강하지 못한 목소리가 너무 커서 객관적이고 건강한 외부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약해진 정도를 넘어 회복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로 인해 삶이 항상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인도 얼마든지 마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면 홀로 땅 끝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시인도 “마음이 약해질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마음이 약해진 것인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긋나 원수지간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약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상황은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약해진 마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삶의 모든 관계가 어그러질 수 있습니다.

시인은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가 실제로 땅 끝에 살았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약해짐으로 홀로 버려진 것같은 감정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군중 속에 고독이란 말이 있듯이 아무리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마치 땅 끝에 홀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당연하고 쉬운 것 같지만 가장 힘든 일입니다. 마음이 약해지고 혼자 버려진 것같을 때 하나님을 찾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시인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이 힘들수록 더욱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시인은 “나보다 더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왜 우리의 살 길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 우리는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마음이 약해졌다고, 마음에 병이 들었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피해야 합니다. 약해진 마음에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편에 서서 응원하고 계십니다.  

“신앙의 쓴 맛” (시편60편 묵상) – 5/14/2020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건강에 좋은데 입에 쓰다는 이유로 약을 거절하는 것은 올바른 반응이 아닙니다. 아무리 입에 쓰다해도 건강에 유익하다면 참고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이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입에 쓴 맛을 느끼면 바로 뱉어버립니다. 참고 삼키는 일이 어린아이에게는 거의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입에 달지만 건강에 좋은 약을 만들기도 합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에게 인생의 쓴 맛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이런 고통이 오기전에 미리 예고해 주시거나 막아주시지 않고 가만히 있으시다니’란 서운함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다”고 솔직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심지어 그는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를 우리에게 마시게 하셨다” 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냅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경험한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어떤 이는 이런 감정 표현이 하나님께 무례한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는 심리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정신 건강상 매우 유익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하나님께 드러낸 것일까요? 무례함도 정신 건강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고 있기에 숨기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자신이 느낀 신앙적 감정 상태를 하나님이 이미 잘 알고 계시기에 구태여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신앙의 표현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면 정신적인 혼란기를 겪게 되고 신앙의 뿌리까지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지고 신뢰에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처럼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란 신뢰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란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진정한 힘입니다. 인생의 쓴 맛을 체험한 신앙인이 가야할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실패와 아픔을 극복하고 더 담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는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불안과 걱정, 불편함과 답답함이 팽배한 시기일수록 우리는 도우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 인생의 쓴 맛은 보약입니다. 입에 쓰다고 뱉을 것이 아니라 참고 삼키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더욱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