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 22절-24절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생기는가?” 2021년 7월 30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 죄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세상과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 일을 성취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저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한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두 갈래로 나뉜 모습을 보였습니다. 환영과 거절이 그것입니다. 환영의 의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거절의 모습은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많은 애정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란 말과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란 말은 그의 애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란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세상에 가감없이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자신을 감추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가림막으로 가려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설교와 가르침, 기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지만 세상은 그를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환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로 표현하셨습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이지만 결국 그를 환영하는 이들만이 그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비해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처럼 그를 거절하는 이들은 그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드러내고 있었지만 세상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을 지키는 이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더욱 챙기실 것입니다. 그의 돌봄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느냐에 대해 우리는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거처’란 집에 상시적으로 거주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관처럼 임시적으로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영원토록 머물 공간으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돌봄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친밀한지를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바로 이런 돌봄을 받을 것입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세상’과 ‘우리’를 비교했는데, 예수님에 따르면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말을 거절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완전히 끊겨 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거주하는 집이 되어 그의 돌봄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함께 생활하기로 결정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돌봄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우리와 세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주는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집입니다. 이는 우리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택하셔서 그의 거처로 삼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다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이를 안다면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창문 역할을 우리가 맡았다면 우리는 이 창문을 더욱 더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지킨다면 이 창문의 깨끗함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 “사랑의 깊이를 더해간다면” 2021년 7월 29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우리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외로운 한 쪽만의 사랑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요14:15)이란 말로 이것을 차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듯이 그들도 예수님을 사랑해야 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듯이 사랑은 서로 주고 받아야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쪽만의 일방적인 사랑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또한 사랑이 형식에 불과한 말장난에 그치는 것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이 껍데기에 불과할 수가 있기에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다시 언급하면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은 이렇듯이 순종의 모습으로 그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도 또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모습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다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될 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두 배가 되어 되돌아온다는 이 약속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게 될 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될 인생이 얼마나 행복할 지를 그려볼 수 있게 합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자녀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부모의 사랑이 온 집안을 가득채우면 그 안에서 지내는 자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의 말투, 표정과 몸짓에 묻어나는 사랑의 언어가 아이들의 품성에 녹아듭니다. 부모의 사랑이 실제로 자녀에게 나타나면서 생기는 행복 지수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다는 이 약속은 이미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어느 정도로 풍성할 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사랑의 깊이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 속으로 얼마나 깊이 파고들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란 약속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더욱 풍성히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는 말을 바울은 로마 교회에 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신앙인들이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이 누릴 축복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분이 그 무엇인들 아까워하시겠느냐란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을 채워주고 안전하게 살게 해주며 부족한 것이 없이 누리도록 해준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는 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실체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갈수록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것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9절-20절 “살아 있는 연합을 깨닫는다면” 2021년 7월 28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면서도 다시 그들에게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어떤 형태로 돌아오겠다는 것인지에 대해 예수님은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셨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나를 보리니”가 그것입니다.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란 것과 대조적입니다. ‘본다’는 이미지는 물리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란 것은 실제적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는 존재로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눈으로 그를 볼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 부활을 가리키는데, 아직 그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기에 제자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장차 그들 앞에서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될 날이 오면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비로운 연합인데, 살아 있는 관계를 형성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가 알리라’는 말은 의미심장한데, 단순히 머리로 어떤 정보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인격 전체가 동원된 깨달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과의 온전한 하나됨을 전인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하신 다음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이라 하면서 둘 사이에 살아 있는 연합이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이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서로 하나된 모습을 보인다는 놀라운 진술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면서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 것은 이 연합이 그들의 삶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두 인격체가 연합을 이룬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그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장면인데,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아담의 표현처럼 인격체의 연합은 기적 그 자체입니다. 이를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해석했는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엡5:25)란 부분은 이 연합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 점 또한 이 살아 있는 연합이 일어날 것이며 그들이 이것을 충분히 인지할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한 부분이 서로 맞는 정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의 연합은 인격 전체가 동원된 완전한 하나됨을 가리킵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그는 제자들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비록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일지라도 그와의 살아 있는 연합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는 말로 이 신비한 연합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경험할 예수님과의 연합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드러내줍니다. 그의 죽으심 뿐 아니라 그의 부활에 동참하는 이 살아 있는 연합을 경험한 자라면 이제부터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이로서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살아 있는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연합은 우리 삶의 동력이며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 것입니다. 이 연합을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그에 맞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인한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 “버림받은 것이 아니기에” 2021년 7월 27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오랜 시간 함께 하던 사람이 떠나게 되면 그 빈자리는 커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비중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면 그 빈자리가 메워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육신적으로 떠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빈자리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메워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채우지 않는 이상 그 무엇으로도 그의 빈자리를 메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고아처럼 외롭지 않게 해주신다는 단순한 위로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는 삶이 되지 않도록 이끌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잠시동안 떠나 있을 뿐 다시 돌아와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40일 동안 그와 함께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려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한 이후에 과연 그들은 본문의 약속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까요? 고아처럼 버려졌다고 생각했을까요?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살아가지만 육신적으로 함께 하지 않는 예수님의 빈자리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성령의 임재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의 사역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여전히 그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은 심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동행으로 인해 영적인 충만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그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절대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진정한 행복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삼촌 집으로 갈 때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하나님이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홀로 버려진 것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지만 인간적인 외로움에 치를 떨 정도로 심적인 통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는다면 삶에서 오는 인간적인 공허함과 외로움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간적인 외로움에 빠져 그릇된 방식으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한다면 주님의 자리는 우리 안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머무시는 곳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아처럼 버려진 것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우리는 다른 것으로 그 느낌을 지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시도들이 우리로 더욱 주님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너무 힘들어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다른 것으로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려 하지 말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버림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버림받을 수가 없을 정도로 축복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런 확신을 갖고서 모든 인간적인 외로움과 공허함에 맞서 싸운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의 채워주심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 2021년 7월 26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는 육신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임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그런 날이 바로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자신은 떠나지만 또 다른 보혜사가 올 것이며, 그가 오시면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란 약속입니다. 영원히 함께 한다는 의미를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로 부연설명을 하셨습니다. ‘너희와 함께’와 ‘너희 속에’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는 동행을, ‘속에’는 머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령이 예수님처럼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듯이 성령도 그렇게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절대 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이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이는 오직 제자들만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과 성령의 관계를 이렇게 풀어낸 적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세상이 성령의 일을 어리석게 여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이 성령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할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고전1:12)라고 하면서 성령을 받은 이들은 세상의 영에 지배되지 않을 것임을 전했습니다. 세상은 성령과 적대 관계이고, 성령을 받은 우리는 세상과 적대 관계를 형성한다는 이야기는 성령과 함께 하는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서 우리는 성령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란 약속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리킨 것입니다. 성령의 동행은 세상의 영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이렇듯이 새로운 피조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특별한 정체성을 확고히 해줍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로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리의 영임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실 뿐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영으로 거하시기에 거짓과 죄악의 길로 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거짓된 영과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절대 세상의 영과는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마치 성령을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막강한 힘인 것처럼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처럼 만들면 안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공한 사람이 아닌 진리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진리의 길로 이끌기 위해 성령이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진리의 길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진리의 길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이 약속을 받았기에 우리는 오늘도 성령의 사람으로 힘있게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 “믿음, 사랑, 그리고 순종” 2021년 7월 23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제자들 곁을 떠나면서 예수님이 남긴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위로인 동시에 도전입니다. 마음의 근심을 풀어주는 의미로 ‘나를 믿으라’고 하셨기에 위로입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나를 믿으라’고 한 것이기에 도전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수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를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느냐에 대해 오늘 본문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밀접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나를 믿으면’을 ‘나를 사랑하면’으로 바꿔쓸 수가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사랑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이유는 이 둘을 분리시키려는 경향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분리시키면 아주 이상한 신앙 형태가 되고 맙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기괴한 신앙 형태를 보여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상이라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우상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사랑과 긴밀히 연결시키면서 이것이 결국 무엇으로 증명되어야 하는지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로 설명하셨습니다. 사랑을 순종으로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의 말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사랑과 순종을 끊으려는 잘못된 시도를 근절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허용하면 사랑과 순종은 함께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랑해도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태도를 얼마든지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의 말을 전혀 반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진술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사랑과 순종의 긴밀성은 더욱 강조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사랑한다면서 자기 주장만을 펼치는 모습이 신앙인에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는 자녀들이 부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려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믿음만을 말한다면 이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믿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믿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믿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사랑이란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듯이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이의 말을 가장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사랑하면서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는 인격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가 하신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말씀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무슨 뜻인지를 헤아리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삶에 반영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는 절대적 잣대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우리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끌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 “무엇을 구하는 기도인가” 2021년 7월 22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원하는 음료수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 때에 자판기는 어떤 선택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동전만 주입되면 무조건 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계이기에 가능한 방식입니다. 만약 자판기가 인격체라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도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에게 기도를 하는 이유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들어주는 신의 입장에서 볼 때에 무조건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느냐란 의문이 남습니다. 기도하면 무조건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만약 어떤 것이든 기도만 하면 들어준다고 약속했다면 몰라도 들어줄 의무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신에게 잘 보이려고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신의 마음을 사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망이 여기에 작용합니다. 정성을 더 들일수록 더 많은 것을 신으로부터 얻을 것이란 계산이 인간의 마음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기도에 접근하는 이들의 정서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말하는 기도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서 기계적으로 기도에 접근하거나 인간적 욕망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큰 낭패를 겪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어찌보면 기계적으로 기도에 접근하도록 허용하는 듯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란 문구 때문입니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기도만 하면 다 들어주시는구나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내 이름으로’ 기도만 하면 어떤 것이든 다 들어주신다니 이보다 더 괜찮은 조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기서 ‘내 이름으로’란 ‘예수님의 이름으로’란 의미인데, 이것이 우리가 항상 하듯이 기도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뜻한다면 너무도 쉬운 조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 내용을 따지지 않고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만 덧붙이면 하나님은 무조건 들어주셔야 합니다. 우리 쪽에서 한 가지 조건인 ‘내 이름으로’를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책임은 기도하는 우리가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있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란 말만 넣는다고 기도가 무조건 응답되어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이는 아버지가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게 되는 통로가 기도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기도는 소원 성취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통로가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소망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에 더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 자세가 갖추어져야 제대로 된 기도가 우리 입에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를 점검하도록 만듭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기도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닌 예수님의 이름에 걸맞는 기도를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소원 성취 수단으로 기도가 쓰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뜻이 세상에 펼쳐지는 거룩한 통로로 기도가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로 받아들일 때에 우리의 기도 내용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이냐란 질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든 것이란 답을 내놓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 “떠남이 주는 교훈” 2021년 7월 21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직접 말하기도 했지만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 이야기,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는 말,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는 등 자신이 그들 곁을 떠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져 의기소침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떠남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제자들이 앞으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텐데 이는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말도 그의 떠남을 암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커다란 유익이 된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아시기에 그의 떠남이 오히려 그들에게 좋은 일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제자들이 장차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리”란 예수님의 약속대로 놀라운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모습을 그들이 나타낼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 그야말로 장밋빛 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신 일을 그들도 할 것이란 점과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란 점이 이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떠난 이후에 제자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사도행전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란 부분이 어떤 식으로 성취되었는지, ‘그보다 큰 일도 할 것’이란 점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걸어간 길은 소위 세상 권세를 쥐고 높은 직위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외부의 박해와 세상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였고 베드로의 한 번의 설교로 삼 천명이 회심하기도 했지만 야고보 사도가 살해당했고 다른 사도들은 감옥에 갇히는 불행을 겪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란 것이 결코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누리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피할 수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당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혼자 겪어야 했던 박해와 모욕, 고통을 그들이 온전히 감당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란 말은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 전 세계에 걸쳐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이방 세계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제자들은 이를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미래를 예고하시면서 그들의 활동을 미리 그려주셨던 것입니다.

떠남이 주는 신앙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초대 교회를 형성하면서 떠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떠났고 그로 인해 심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체득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모여서 큰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이로서 그분의 뒤를 따르는 공동체임을 그들이 안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큰 일을 하고 떠나면 아무 일도 못하는 공동체가 아님을 배운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그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떠남이 주는 인간적인 서운함도 있지만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에 지장을 주는 정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로서 그가 하신 일을 해내야 하며 이보다 더 큰 일도 해내는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이러한 축복을 받았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11절,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 때” 2021년 7월 20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는 예수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1:1)란 첫 문장이 이를 강력히 지지해줍니다. 또한 저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란 진술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얼마나 독특하고 특별한지를 드러냈습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말로 이를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는 선언을 서슴없이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신성 모독이란 죄목으로 정죄를 당하셨고 살해 위협을 겪어야 했지만 그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요10:38)을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주장하셨습니다. 이를 가장 가까이서 들었던 이들이 그의 제자들인데, 놀랍게도 이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말한 것에서 이것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란 말로 빌립의 요구가 그릇되었음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해 부족을 간파하시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신 다음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받아들여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행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사람들에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자의적으로 표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된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그의 행동이 얼마나 하나님의 일과 밀접했는지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요8:29)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하나님의 일만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이것에서 벗어난 어떤 말과 행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명이 부족했거나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아서 일어난 현상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와 ‘나를 믿으라’는 예수님의 강렬한 외침은 제자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가르침을 듣거나 더 많은 행동을 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란 말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믿음’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저자는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에서 ‘믿음’이 사람의 운명을 가른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사소한 일이 아니라 인생 전체, 아니 영원한 운명까지도 좌우할 정도로 엄청난 일임을 말해준 것입니다. 때론 믿음이 희화화되기도 하고 미신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일은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입니다. 지금도 ‘나를 믿으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믿으라’는 외침에 우리가 과연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느냐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이것을 확인하는 일은 더이상 뒤로 미룰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 바로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9절 “그릇된 만족에 빠지지 않으려면” 2021년 7월 19일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죽음의 길목에 서게 되면 누구든지 삶을 정리하게 됩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그동안 걸어온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반추해 봅니다. 물론 미래의 계획은 세우지 않습니다. 죽음이 끝이기에 앞으로 하고자 하는 새로운 계획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제자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실 것인데 그들은 그를 통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그를 알게 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알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아는 놀라운 경험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부터 예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따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 잊어버린 것처럼 이상한 질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빌립이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다’고 말한 것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신 것을 듣고 빌립이 이렇게 요청한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빌립은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할 정도로 이를 강렬하게 원했습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봐야만 만족하겠다는 그의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그의 속마음이 드러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요청에 대해 감정이 섞인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에서 복합적인 감정이 묻어난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래 함께 있었음에도 왜 나를 알지 못하느냐’고 하신 것인데, 이는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실망했음을 나타내줍니다. 만약 예수님이 함께 있는 동안 자신의 실체를 숨겼다면 이렇게 반문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신비주의 방식으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던 당시 종교 리더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제자들에게 다 보여주셨습니다. 매일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다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다 설명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시면서 자신을 본 자들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따로 볼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말하는 빌립과 나머지 제자들에게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알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고 우리의 눈으로 볼 수가 없을지라도 우리의 신앙 생활에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그분의 삶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아야만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보여주시면 만족하겠다고 한 빌립과 같은 태도는 우리를 그릇된 만족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알아감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고 그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아야만 만족하겠다는 잘못된 접근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갈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