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시편18편 묵상) – 4/1/2020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가 되면 자식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도 넓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낌없이 베풀고 싶은 넓은 마음이 생기는 것을 경험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정도에 차이는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과 자식의 부모를 향한 사랑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부모를 사랑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 절대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성격, 내용, 깊이 등이 다를 수 있지만 사랑하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넓어지기에 세상이 더없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은 활기가 넘치고 생동감이 느껴지며 밝은 표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로 멸망이 아닌 영생을 얻도록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예수님을 통해서 체험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을 철저히 예수님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체험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넓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까요?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 라고 그의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시편 저자는 과거만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이 그의 삶 속에 들어와 계심을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여호와는 살아계신다”면서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실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런 확신을 품고 있으면 기도에 자신감이 붙습니다. 시편 저자는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다” 해도 “내가 환난 중에서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사망의 올무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가족 전체가 위험에 처하는 것, 경제 활동 중지로 인한 재정적인 압박 등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올무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킬 수가 있을까요? 이러한 압박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확신과 기도 속에서 더욱 신앙적으로 단단해질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고 기도를 통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 (시편 17편 묵상) – 3/31/2020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목표가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항상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성향을 말합니다. 때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힘들어해도 목표가 있어서 다시 힘을 내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즐기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표가 사라지거나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삶이 따분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사 의욕을 상실한 사람처럼 보이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리다보면 하루가 손살같이 지나갑니다. 남들과 똑같이 24시간을 사용하는데, 두 시간처럼 여겨질 정도로 빨리 지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뒤를 돌아볼 시간도, 자신을 성찰할 시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이 바쁘기만 하지만 지루해 할 틈도 없기에 나름 의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현대 사회의 삶의 한 단면인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회 전체가 마비되었을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까요? 모든 사회 활동이 멈추고 생필품 구입 외에는 외부 출입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의 하루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우리는 자아 성찰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를 돌아볼 시간을 얻은 것입니다.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감출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 마음 상태가 어떤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치 않을지라도 지금은 한가로움을 보약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가로움이 지루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닌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라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달라”는 간절함으로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하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들여다봅니다. “주께서 나를 판단해달라”고 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나를 감찰하셨다”고 말합니다. 기도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있는 그대로 고백합니다. 그는 주의 길을 지키려고 무척 노력했기에 이런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감찰하지만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내게 귀를 기울이여 내 말을 들어달라” 고 합니다. 그는 “여호와여 일어나 나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합니다.

바쁘게 살다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생긴 지금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 (시편 16편) – 3/30/2020

우리는 듣기만 해도 힘이 되는 말에 목말라 합니다. 그냥 듣기 좋은 말이 아닌 마음을 울리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합니다. 단순한 칭찬의 말일지라도 사람을 기분좋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격려의 말은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마음 속 깊숙히 들어온 격려의 말은 오랜 시간 우리의 마음을 살찌우는 마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이 정도로 강력한 격려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나친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장황한 말로 기분 좋게 해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장된 표현과 비현실적인 칭찬은 진실성에 의문을 품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심어린 격려의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격려의 말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웁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기에 우리의 기분만 좋게 해 주는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깊은 속까지 꿰뚫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겉모습만 보고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벽해야만 칭찬해 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러했다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맞는 격려의 말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약하면 약한대로, 실수하면 실수한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우리의 수준에 맞게 격려의 말을 해 주실 수 있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따뜻한 격려의 말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시는 하나님께 깊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 그는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고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라 고백합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 옆에 바짝 붙어있고 싶어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찬 모습이 부럽기만 합니다. 시편 저자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항상 가까이서 뵙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켜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정도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싶어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격려의 말로 채워진 영혼은 하나님과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시편 저자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나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게 합니다. 이런 마음이니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격려의 말을 듣고 새로운 힘을 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이러한 갈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뿌리 깊은 신앙” (시편 15편 묵상) – 3/28/2020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미국 전체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위기 의식은 점점 더 고조되고 있습니다. 외출금지 명령이 내려진 주(state)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집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하지만 기약없는 기다림에 사람들이 점점 지칠 수가 있습니다. 국가가 개인 살림에 현금으로 도움을 주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일시적인 위로를 얻을 수 있지만 단방약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경제 활동의 위축은 개인을 넘어 국가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매우 자명합니다. 마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길을 무작정 걸어가는 불안감이 밀려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안정일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에 집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로 인해 안전 지대가 없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우리가 회복할 것은 마음의 안정입니다. 불안을 이겨낸 마음을 회복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깨끗해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굳건해질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축복이 넘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에 머물수 있다는 사실은 신앙인에게는 가장 가슴벅찬 일입니다.

하지만 주와 함께 거하는 축복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얻었지만 마음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흔들리면 더 이상 그것이 축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혹시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는지 점검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안에 들어가 있지만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려서 매일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불행을 맛보는 신앙인들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뿌리 깊은 나무처럼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면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편 전체에서 흔들림없이 신앙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런 일을 행하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행하는 자’란 신앙이 단단해지려면 행동하는 신앙을 평소에 갖추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기 위해 우리는 실천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뿌리 깊은 신앙을 갖고 있어야 우리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몇 가지 행동 지침이 아니라 삶의 방향, 목표가 주님을 향할 때 뿌리 깊은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며 행동에 옮긴다면 보람있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시편 14편 묵상) – 3/27/2020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물질의 가치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회이기에 교회도 깊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물질의 힘을 우리는 어디서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경제는 민심의 척도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는 단순히 질병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나라 경제를 멈추게 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타격이 바이러스처럼 나라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무엇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물질은 우리가 의지하는 매우 중요한 삶의 기둥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주의 사회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물질 자체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질을 숭배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물질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존재로 전락해버립니다. 시편 저자는 당시 사회가 “하나님은 없다”는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음을 고발합니다. 물론 지금과 다른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을 것입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에 대한 무례한 태도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교회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회에서 어떤 태도를 유지해야 할까요?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신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면밀히 살피고 계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찾는 자’란 누구일까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 삶 깊숙히 개입하심을 믿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적인 감각을 지닌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무신론 사회라해도 엄연히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 당시의 사회만이 아니라 현재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사회가 마비된 곳에서도 믿음의 눈을 갖고 있는 분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은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고 저항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도 믿음의 눈을 갖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실 뿐 아니라 역사하십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신다”고 말하듯이, 우리를 사로잡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구출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성경 시대처럼 지금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구원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무신론적 사고 방식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 인생을 살피고 계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시편 13편 묵상) – 3/26/2020

구약 성경 중 전도서를 보면 매우 놀라운 지혜들이 넘쳐납니다. 그 중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이것은 인류의 진보를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발명들이 출현하는 문명 사회에서 이 말씀은 비현실적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업적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서가 말한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접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과연 새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실 수 없는 유한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처음과 끝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바이러스의 공격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슈퍼급 전염성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위축된 세상 속에서 과연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면 될까요?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절대로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까요? 바이러스에 걸리면 하나님이 버리신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이러스에 걸리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바이러스에 걸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거나 외면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바이러스를 기준 삼으면 하나님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바이러스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약해서 시편 저자처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라고 탄식합니다. 이것은 연약함의 표현이지만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불안에 휩싸여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신을 얼마든지 표출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하시니 우리 스스로 보호하자는 불편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출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바이러스로 인해 사망의 잠을 잘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과연 누가 담대해질 수 있을까요?

시편 저자는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나님을 이긴 것처럼 기세등등합니다. 교회도 바이러스가 하나님을 이겼다고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공적 예배가 중단되고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되고 기도 모임이 힘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바이러스 앞에서 무장해제된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시편 저자는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 다짐합니다. 지금이 우리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주의 사랑을 의지하는지,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확실하면 잠시 주춤하고 위축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할 때” (시편 12편 묵상) – 3/25/2020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회복된 후 인터뷰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 회복된 것에 감사하면서도 가장 괴로운 것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변의 차가운 시선입니다. 바이러스 환자를 죄인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려웠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음에도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뿐 아니라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이러스 감염자들도 희생자들인데, 마치 가해자인 것처럼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감염된 환자로서 약자임에도 전염성 때문에 격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치이지만 차갑고 매정한 눈으로 보는 것은 2차 피해를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약자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이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5절에서,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심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직접 일어나 그들을 도우실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희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주어져 그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가 가련한 자들, 궁핍한 자들을 더 누르고 더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감염환자들을 죄인 취급함으로 마음의 상처를 깊게 내는 지금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시편 저자가 살던 당시 사회에 과연 이웃을 품을 수 있는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까요? 저자는 1절에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진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사회에 가짜 뉴스가 난무하면 사회적 분위기는 냉랭해지고 비열해집니다. 저자는 8절에서,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을 때”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 일들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진실에 기초하지 않고 괴소문에 마음이 사로잡혀 약자들을 더욱 괴롭히는 사회는 불행합니다. 과연 지금의 사회는 어떠한가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짜 뉴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가장 두려운 일은 감염자들이 죄인취급당하는 것입니다. 전염성 때문에 격리하고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분노와 화풀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4절처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겠느냐”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약자들을 짓누르고 없는 자들을 탄식케 하는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과연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까요? 약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어나 약자들을 안전한 지대에 두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7절,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감염자들도 희생자이며, 따뜻한 위로가 필요함을 우리는 알지만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감염에서 회복되었음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것 또한 그들의 아픔을 알지만 용기가 없어 품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움츠러들기보다 어깨를 펴고 용기를 갖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흔들리는 순간에” (시편11편 묵상) – 3/24/2020

제가 어릴적 시골은 화장실이 바깥에 있었기에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저희 사형제는 서로 품앗이 하듯이 짝을 지어 화장실에 같이 가곤 했습니다. 둘이 함께 가면 두려움이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나보다 약한 동생을 데리고 감에도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보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혼자 보다는 둘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의 두려움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짓누릅니다. 우리는 보호 장치를 마련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를 보호해 줄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든든함을 넘어 깊은 안도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합니다. 안전한 삶을 무너뜨리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공격해 들어오면 우리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지만 곧바로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줄 존재를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찾아가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분이십니다. 시편 저자는 1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피신했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이 경험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어려움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 또는 역경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께 피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웃습니다. 저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1절에서,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했는데, 다른 곳으로 도망하라니 이보다 더 모욕적인 조롱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내 명성에 금이 가는 것으로 모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피난처로 여기는 우리의 신앙이 조롱당할 때 더 큰 모욕을 느낍니다. 하나님께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조롱섞인 말에 우리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우리를 조롱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며 우리의 삶을 현미경 보듯이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시편 저자는 4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하면서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신다”고 확신있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살아갑니다. 지금과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이겨나갑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의 파워입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위축과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순간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고 계심을 믿으며 그분을 피난처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생각” (시편 10편 묵상) – 3/23/2020

코로나 바이러스의 증상이 독감과 비슷하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기침과 발열이 공통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 앞에서 기침만 해도 의심받을 정도로 사람들의 경계심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육체에 질병을 유발시키고 다른 이들에게 전염시키며, 호흡 곤란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기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해치는 바이러스의 침공은 온 지구를 뒤덮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마음 속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공포와 의심 등 수많은 정신적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음의 상태를 애써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오직 육체의 고통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들여다 볼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차분히 앉아 점검해 볼 여유가 사라진 것 같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서로의 안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방침이지만 마음까지 거리를 두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습니다. 서로간의 친밀함을 사회적 거리 두기 속에서 어떻게 유지할 지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의 거리 두기란 불편한 사실이 이미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거리 두기는 우리의 생각이 이미 바이러스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가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삼키는 바람에 사람들의 마음까지 걸어잠궈버리는 위험한 사회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로간의 관심은 사치란 생각이 들고, 오직 자신의 안전만을 위한 생각에 몰두하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점점 팽배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마음의 건강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요?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마음까지 병들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교회는 서로간의 관심와 애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 저자의 목소리에서 힌트를 얻고자 합니다. 시편 저자도 불건전한 신앙의 목소리들이 난무하던 시대에 건강한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병든 사회, 그것에 편승하여 신앙인조차 병든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회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려고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11절에,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는 병든 마음의 신앙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와 사회에 대해 하나님은 전혀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다고 단정짓는 목소리들이 퍼져나갔던 것입니다. 13절에서 시인은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란 신앙적 울분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병든 신앙인의 그릇된 신앙 표출에 대한 시인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14절, “주께서는 보셨나이다”는 강한 확신의 말은 시인의 건강한 생각이 얼마나 확고한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적으로 건강함은 이렇듯이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건강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 시대는 마음의 건강이 더 중요합니다. 건강한 생각을 갖고서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볼 수 있는 신앙인들이 활동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위축되어 있지만 건강한 신앙적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활발히 움직일 날을 고대합니다. 지금 이것을 위해 마음의 건강을 챙길 때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세상” (시편 8편 묵상) – 3/21/2020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는 실체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그것에 감염되면 몸이 아프고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지금 온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이기에 두려움과 불안이 더욱 더 커지고 있습니다. 치료제가 만들어져야만 이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언젠가는 치료제가 개발되어 사람들을 바이러스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전방위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에 의해 감염되기에 반드시 지켜야 할 생활 규칙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규칙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기에 모든 이들이 이 규칙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욱 커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음을 믿습니다. 시편 저자는 3절에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본다”고 신앙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 신앙인데, 믿음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죄로 인해 물들었고, 죄의 결과로 수많은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언할 뿐 아니라 인류 역사가 이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재앙으로 얼마든지 고통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 감탄하면서도, 현실은 주의 대적들, 원수들, 보복자들로 인해 위협당하고 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둘 사이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켜나갈지를 고민합니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란 전염성이 슈퍼급인 적 앞에서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 과연 고백할 수 있는지를 시험당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 불안에 제압당한 상황이지만 신앙인들은 이것을 뚫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란 고백에서 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란 보이지 않는 적의 무차별적 공격 앞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실 뿐 아니라 돌보고 계십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신앙인은 어둠이 세상을 덮을지라도 빛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이러스를 뚫고 그의 백성을 지켜주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이 바이러스로 인해 오염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손길이 세상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일그러진 세상을 다시 펴실 것이며 그분의 이름을 빛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