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한 약속” (시편132편 묵상) – 8/6/2020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일 것입니다. 자신과의 연관성을 찾지 못할 때 성경에 대한 흥미가 급속히 줄어드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적어도 2천년 전의 사람과 사건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불과 200년 전의 조선 시대를 떠올리기만 해도 정말 옛날 일이라 생각이 드는데, 2천년이 훨씬 넘는 시대에 쓰여진 성경 이야기라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것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도 오래된 성경의 이야기를 최첨단을 걷고 있는 21세기에 왜 읽어야 하느냐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옛날 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성경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이야기이기에 우리는 읽고 또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그 때의 하나님이 지금의 하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열심히 성경을 읽습니다.
오늘 시편은 다윗 이야기를 거론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런 다윗을 다시 거론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치적을 기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가 보인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를 시작으로 하나님의 성막(궤)을 발견하기까지 안락함과 평안함을 거절한 다윗의 모습을 언급하면서 그의 충성심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런 충성심은 예배자로서 갖추어야 할 태도인데, 시인은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고 자신을 비롯한 이스라엘 전체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처럼 이스라엘 전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함을 시인은 강조한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고 말하면서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을 짚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자로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셨던 약속을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로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란 약속과 연결시킵니다. 다윗을 넘어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이 약속은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는 일상의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무병장수의 축복 약속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삶도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이 있어도 우리를 거처로 삼으시는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성도로서 마음을 다해 즐거이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상황과 형편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붙들고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성경을 통해 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 다스리기” (시편131편 묵상) – 8/5/2020

성경을 보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마음이 부패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것을 구약과 신약은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고, 예수님도 마음에서 나온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음을 바울은 강력히 외칩니다. 우리의 마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의 마음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상태가 됩니다. 그렇기에 바울의 말처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을 갖게 되면 이제부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이 되었다고 모든 것이 저절로 풀리지 않습니다. 본격적으로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일 뿐입니다. 이제부터 거듭난 마음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달라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서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는 잠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우리의 능력으로 해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성령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마음을 다스리는 수많은 명상법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시편이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 다스리기가 정신 건강을 위하거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우리는 신앙적인 이유에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 우리 마음에 싹트지 않도록 자신을 면밀히 검사하는 신앙적인 노력입니다.

신앙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이 어떤 형태를 취하느냐에 대해 시인은 우리에게 매우 좋은 자세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과 같도다”고 마음의 자세를 묘사합니다. 시인이 의도한 것은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존하는 아이의 마음 상태입니다. 그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고요하고 평온한 영혼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가는대로 살아서도 안되고 마음 자체를 우상처럼 섬겨서도 안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힘으로 마음을 다스리려 하지 말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감시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절망하지 않으면” (시편130편 묵상) – 8/4/2020

구약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요나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불순종과 고집스러움이 부각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에 있는 요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의 모습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요나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란 근거로 삼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음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장면입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고 말할 정도로 요나는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오늘 시편을 지은 시인도 비슷한 인생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고 합니다. ‘깊은 곳’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은유적으로 그의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는 소망적인 행위입니다.
시인은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기도가 아니라 그 곳에서 벗어날 때까지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란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그의 심정은 절망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절망하면 그 다음은 없다는 절박감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깊은 곳’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란 확신이 시인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몸부림 속에서 그는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란 질문에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고 답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죄악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은 절망을 더욱 깊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죄책감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단하기 위해 시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자신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신앙적 싸움을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절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시인처럼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깊은 곳에 빠진 상태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은 이런 소망을 붙잡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지점입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시인의 모습에는 소망으로 절망을 이기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소망은 절망을 꺾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의 행위는 깊은 곳에 처한 절망도 이겨내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넘치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깊은 곳에서라도 우리에게 차고 넘칠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기치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

“굴복하지 않는 신앙” (시편129편 묵상) – 8/3/2020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나왔지만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계속해서 고통을 주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통 사고로 장애를 입는 경우,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는 경우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비극적 사건은 과거가 되었지만 현재의 삶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과거의 고통이 살아 움직여 오늘의 삶까지도 지배한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공동체 차원에서도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고난의 역사를 지닌 민족입니다. 오늘 시편은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일인칭 시점으로 진술한 것입니다. 마치 한 개인이 겪은 고통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고난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을 우리는 구약을 통해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후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사건은 앗수르의 북이스라엘 침략과 바벨론의 남유다 침략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가 되어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나라 잃은 설움, 이국땅에서의 노예 생활은 그들이 겪은 고난의 깊이를 충분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로 시작합니다. 과거에 수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입니다. 지속적인 고난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나를 이기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제는 말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고난의 터널을 통과할 때에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제 끝났다고 강대국들이 말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강력히 외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난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고 할 정도로 고난의 깊이와 충격이 대단했지만 이스라엘은 결코 패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은 그 이유를 이스라엘의 군사력과 외교 능력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고 이유를 밝힙니다. 엄청난 고난이 이스라엘을 덮었음에도 결코 패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끊으셨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이 전쟁터 한 가운데서 어떻게 이스라엘 위에 임했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고 당당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도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에 불과함을 시인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교회를 이루면서 신앙 생활하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세상이 교회를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교회는 굴복하지 않는 영적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무런 힘도 없는 것같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공동체로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전쟁터 같은 세상 속에서 교회 위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시각을 갖춘다면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는 시인처럼 의연하게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 (시편128편 묵상) – 8/1/2020

가정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구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맺어 주시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시각으로 가정을 지켜왔습니다. 이스라엘 가정의 최고의 덕목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배우는 최고의 장소는 가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시편은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만의 신앙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믿음의 가정으로서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그분의 길을 걸어가는 삶인데, 이것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뿐 아니라 신앙 가정으로서 지켜가야 할 믿음의 여정입니다. 시인은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고 비유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길을 걸어가는 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 건강한 가정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엘리 제사장과 두 명의 방탕한 아들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다윗의 자녀들도 권력 다툼에 휩싸여 불행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부모의 책임이냐 자녀의 책임이냐 이전에 한 가정이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부모의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자녀들이 삐뚤어질 수가 있습니다. 부모가 신앙이 없어도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잘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런 예외적인 일들이 자주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적 신앙을 넘어 한 가정이 믿음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정을 끊임없이 돌보시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가정에서 길러져야 합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신앙은 지극히 개인적이란 사상에 우리가 물들어 있지만 가정 전체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 속에서 자라는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신앙을 체득하게 됩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는 축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고 시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가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이런 가정이 늘어나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쳐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신앙적으로 건강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파편화된 가정, 개인주의에 물든 가정, 신앙은 개인적이라 말하는 가정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나타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각 가정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것을 장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많아질수록 교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며 믿음의 가정을 이루는 소망을 품는 신앙인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공동체와 개인” (시편127편 묵상) – 7/31/2020

우리가 시편을 비롯한 구약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는데, 이스라엘 공동체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개인들의 삶이 있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이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오늘의 시편도 공동체란 시각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1절에서 ‘집’과 ‘성’이 나오는데,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 또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성전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대로 세워진 곳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할 때 자기 마음대로 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청사진을 그대로 재현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 성과 그 안의 성전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시인이 말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과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와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기에 하나님을 배제하고 이루어진다면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무의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의 거대한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 속에서 개인들의 삶이 펼쳐집니다. 각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존재합니다. 개인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에 깊이 영향을 미치기에 하나님은 때때로 이스라엘 전체에 재앙을 내리시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아간의 범죄로 이스라엘 전체가 아이성 정복에 실패할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죄를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여호수아7:11)라고 정확히 짚어주셨습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분리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가르침입니다. 시인이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고 한 것은 단순히 개인의 삶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염두해 두고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공동체 속의 개인이 아니라 개인주의 관점으로만 접근한다면 위험합니다.
시인이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한 것도 공동체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적용할 때 잠을 못자면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시는 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3절-5절에 나오는 ‘자식들’도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도 이스라엘 공동체가 운명을 같이함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교회를 공동체로 보지 않고 개인주의로만 보려는 경향이 강한 것을 생각할 때, 이 시편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 공동체 속에서 각 개인의 신앙을 점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각 개인은 전체를 고려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 없는 개인 신앙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욱 철저히 교회 속에서 개인을 생각하는 신앙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해방의 기쁨” (시편 126편 묵상) – 7/30/2020

시편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 중 ‘바벨론 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진 후 북쪽은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남쪽은 바벨론에 멸망당합니다. 앗수르는 바벨론에 멸명당하면서 당시 세계의 절대 권력은 바벨론이 쥐게 됩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바벨론의 포로가 된지 70년만에 극적으로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독립운동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편도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도다”고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이 언제 쓰여진지는 알 수 없으나 포로 귀환 이후에 이스라엘 전체가 감격했던 것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을 정도로 기적적인 사건임을 시인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란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당할 때에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반드시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하셨던 것의 성취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약은 이 장면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재현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죄의 지배 하에 있던 죄인들을 해방시킨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이 죄의 포로에서 자유를 얻은 구원으로 재해석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죄로부터 해방된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스라엘이 경험한 바벨론 포로 귀환이 어떠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포로에서 해방시키셨을 때에 우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얼마든지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로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야 할까요? 시인처럼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찾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방의 기쁨을 맛본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게되어 있습니다. 해방이란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 울려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로 재해석하면서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받은 ‘죄 사함’이 죄로부터의 해방임을 제대로 이해할 때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경험한 이에게 나타나는 실제적인 일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지를 알 수 밖에 없습니다. 시인처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는 확신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의 쓸쓸함과 외로움, 병마와의 싸움 등에 시달릴 수 있으나 우리는 기쁨으로 그것들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는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해방의 기쁨이 예수 안에 있기에 그분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소망을 품으며 살아갑니다.

“신앙 장려 운동” (시편125편 묵상) – 7/29/2020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 사람의 말을 믿기에 따르는 경향이 생깁니다. 하지만 신뢰한다고 해서 무조건 따르지는 않습니다. 신뢰하지만 선택적으로 따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반면, 신뢰하지 않아도 따라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상급자의 말을 부하직원으로서 따라야 하는 경우입니다. 이렇듯이 신뢰하는 것과 따르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신뢰하는 것과 따르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인식이 생기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와 따름이 분리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납니다. 신뢰하지만 따르지 않거나 따르지만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침체를 가져오는 대표적인 원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전적으로 따를 때 영적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데, 이것이 잘 되지 않기에 자꾸 신앙적으로 넘어집니다. 신뢰와 따름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아 우리 신앙이 왜곡되고 삐뚤어집니다.
오늘의 시편은 신앙 장려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닫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고 묘사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고 밝힙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두르고 계시다는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 산들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이 쉽게 공격할 수 없는 지형적인 잇점을 갖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빗대어 하나님의 보호를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보호막을 쳐주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신뢰가 반드시 따름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는 말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땅’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삶의 영역인데, 악인의 권세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죄악에 손을 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을 선대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그분을 따르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장려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이것이 신앙 장려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보호해달라는 기도는 이 시대에 너무도 절실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믿음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신앙 장려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유혹이 밀려와도 우리는 꿋꿋히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 시대에 신앙 장려 운동이 활발히 펼쳐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그분의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따름이들은 신뢰를 따름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훈련이 쌓여갈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강력해질 것입니다.

“뒤돌아보니” (시편124편 묵상) – 7/28/2020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쉴 때가 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을 모면하는 경우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위기를 만납니다. 대부분은 불행한 결과 없이 무사히 지납니다. 그럴 때마다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 어느날 갑자기 과거 아찔했던 사고의 순간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아무 일이 없이 지난 것에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듭니다. 오늘 시편에서 시인은 이런 감정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이제 말하기를”로 시작합니다. 이제서야 말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어떤 위기의 순간을 지나는 동안에는 앞뒤 분간을 할 수가 없어서 무엇이라 단정지을 수가 없기에 ‘이제야 말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의 공격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라 합니다. 은유적으로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표현합니다.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현재 뒤돌아보면서 하나님이 막아주셨음을 고백하는 시인의 모습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지금까지 우리 편에 서서 수많은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잊지 말자는 교훈입니다. 이같은 태도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잘 되지 않기도 합니다. 아무리 과거에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현재가 불만족스러우면 이런 태도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인의 태도를 다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시인은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고 현재에 어떤 신앙의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강조합니다. 지금 어렵고 고달플지라도 과거에 우리를 돌보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현재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건강한 방식입니다. 현재가 어려울수록 지금까지 우리 편에 서서 보호하신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란 고백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합니다.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가 고백한다면 현재에도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습니다. 지금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무엇을 도와주었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셔서 얼마나 좋은가란 고백과 함께 그분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힘들고 괴로운 상황일수록 더욱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합니다. 뒤돌아보니 하나님이 다 하셨구나를 안다면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응원하고 계심을 굳게 믿을 때 우리의 신앙은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바라봄” (시편123편 묵상) – 7/27/2020

여행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유 자체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책임지는 위치에서 여행을 계획한다면 마음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목적지를 정해놓고 어떻게 그 곳에 도달할지, 그 곳에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그 날이 다가오기를 손꼽아 고대하면서 매일을 설렘 속에서 보낼 것입니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 틈도 없이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물론 어떤 기다림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은 희미하게나마 살아남아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시편에서 주목할 단어는 ‘바라봄’입니다. 이것은 기다림을 뜻합니다. 시인은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고 합니다. 이 고백에는 시인의 신뢰가 잔뜩 묻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친숙함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끈질김이 느껴집니다. 다른 것에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한 방향만을 바라보는 순수함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빛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지를 우리는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는 ‘은혜’를 받기 위함입니다. 은혜가 필요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가 처한 현실이 너무도 절박합니다. 그는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와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를 연속으로 토로합니다. 그의 삶에 드리워진 어둠이 얼마나 진하고 무서운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누군가의 멸시와 조소를 오랜 시간동안 받지 않는다해도 잠깐의 멸시만 당해도 우리는 심한 모욕감을 느낍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이유도 없이 멸시가득한 말을 쏟아낼 때 우리는 당황하기도 하지만 매우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막강한 힘을 가진 자가 옆에서 지속적으로 멸시와 조롱을 한다면 견디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시인은 비유적으로 그의 심정을 드러냅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상전의 손에 운명이 달려 있는 종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운명을 맡기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그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면서 그 무엇도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을 수 없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나요? 우리는 시인의 심정에 어느 정도로 공감하고 있나요?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을 인정하면서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지 점검할 때입니다.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하나님만이 은혜를 주실 수 있음을 믿고 바라봐야 합니다. 불안과 초조, 염려와 근심 속에서도 하나님만이 이것들을 뚫고 따스한 손길을 내미실 것을 고대하면서 바라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