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장 25절-26절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2021년 10월 15일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일세기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이미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통해야만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폭탄 선언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방식은 궤도수정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는 모든 방식은 더 이상 효과를 거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오직 한 길만이 그들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알아야만 진짜 신앙을 갖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온전한 하나됨을 이루신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역하는 동안 이 사실을 세상에 끊임없이 알리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목소리를 거절했습니다. 그를 통해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고 정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이들에게 계속해서 아버지를 알리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란 말씀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계속해서 아버지에 대해 배워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아버지를 알아야만 올바른 신앙의 길을 걷게 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를 아는 것이 오직 그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란 말씀으로 답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그들 안에 머물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 안에 있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된 이들이 받는 축복은 예수님에게 쏟아부어졌던 아버지의 풍성한 사랑을 듬뿍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나서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날마다 우리가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시는지를 배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삶에서 너무도 중요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디서 확인해야 하느냐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를 단순히 죽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미래 보장을 해주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살게 됨을 보장해준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받은 이들이 모인 곳이 어디인가요?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받은 이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는 무엇을 서로에게 표현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일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교회의 포기할 수 없는 사명이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교회 공동체가 실천한다면 세상은 이것을 보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받은 아버지의 사랑을 교회 공동체는 더욱 절실히 열망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 “영광을 보게 하소서” 2021년 10월 14일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가 일으킨 기적들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그를 통해 올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그들이 본 기적들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기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았던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그를 인식하게 된 것 또한 그들이 목격한 경이로운 사건들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영광입니다. 그의 영광이 어떤 식으로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지를 들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기적을 통해 세상을 뒤집어놓을 위대한 전사로 알고 있었기에 그의 영광이 죽음을 통해 드러날 것이란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기에 그는 죽어서는 안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그들에게 전하셨습니다. 반복적으로 죽을 것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그들은 이로 인해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마음의 근심은 더욱 깊어지고 예수로 인한 소망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듯이 보였습니다. 이런 상태에 놓인 제자들을 매우 잘 아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지를 기도를 통해 전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영광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1:3)라고 한 말씀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만이 가졌던 고유한 영광입니다. 하지만 이 영광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인 죽음을 통해 드러나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죽음은 모든 것의 마지막을 뜻하는데, 예수님은 이 죽음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온 모든 이들이 이 영광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가 죽는 현장을 보게 해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갖고 있는 영광의 의미를 깨닫게 해달라는 뜻으로 이런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회가 말하는 영광은 승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적들을 무너뜨린 최고의 전사가 취했던 영광을 상상했습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꿈꾸는 영광의 모습은 언제나 이렇듯이 최정상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밑바닥인 죽음의 자리에 서서 영광을 드러내시겠다고 하셨고 그의 영광을 제자들이 보게 해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 그들이 어떻게 이해했을 것인지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영광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우리는 세상의 헛된 영광을 꿈꾸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광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함께 있어”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영광이 과연 예수님의 것과 같은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바울의 권면을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우리의 본능에 속하는 영역 까지도 하나님께 내놓을 수 있으려면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 일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새로운 영역입니다. 이를 훈련하도록 지금도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는 세상의 허망한 영광과 싸울 수가 있습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는 오늘도 성령의 도우심을 더욱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2절-23절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 2021년 10월 13일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서로간에 어떤 관계를 형성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일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온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서로 분열하고 대립하고 격렬하게 싸웠다는 흔적이 뚜렷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다음 자리를 차지하려는 그들의 욕망을 보면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하던 일들도 달랐으며 개성도 뚜렷하여 의견 충돌이나 개인 감정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이런 그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과연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세상에 알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과 함께 ‘서로 하나가 되라’는 당부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5)는 말씀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란 말씀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됨은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신앙 가치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란 기도를 하셨는데, 이는 하나됨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와 같이’란 기준에 맞춰져야만 진정한 하나됨이 제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의 의기투합이나 양보로 하나됨이 이루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이루어야 할 하나됨은 철저히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어야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로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라고 하실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이 일은 성령의 오심으로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삼위 하나님이 움직이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나됨을 이루려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에 있습니다. 제자들의 하나됨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하나됨의 파워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그들의 하나됨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경쟁과 분열, 미움과 배척으로 점철된 교회를 통해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으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원수까지 품으라 하시고, 손해를 감수하고 희생을 감당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고 분열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서로 하나됨을 이루면 하나님의 위엄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에 교회가 그동안에 보여왔던 수많은 분열과 증오, 배척과 이기심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서로 싸운다고 하지만 상대방을 밀어내고 자기 영역을 만들려는 욕망이 표출된 것일 수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하지만 그 안에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정당성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우리 주님의 열망을 우리는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됨으로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21절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마음” 20201년 10월 12일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강력하게 외치셨습니다. 스스럼 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유대인들에 의해 살해 위협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를 단순히 인간 예수로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요6:42)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를 그들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이 말해주듯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에 대해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그의 신적 기원을 온 세상이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그의 원대한 포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마음에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믿도록 다리 역할을 해야 할 이들이 곧 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과연 이를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그들이 갖고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 있게 제자들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역량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게 하사’란 말은 그들이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삼위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개인만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 그룹이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과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이 세상에 예수님을 알리는 사역에 선결조건이 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물론 이 하나됨도 그들의 의기투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의견을 하나로 모은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됨이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들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셔야 할 정도로 이 일은 제자들 역량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의 역량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일 자체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교회와 개인이 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할 수 없지만 삼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미 예수님 자신이 이 일을 해내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다 품으신 이로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에 나가 예수님을 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삼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가 있기에 이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평범한 이들을 통해 예수님의 이야기가 세상 속으로 들어갔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지극히 작은 자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세상은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식으로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우리가 갖고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품은 신앙인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임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20절 “믿음의 확산” 2021년 10월 11일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함이니”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뉴스의 확산 속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적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지구 전체가 동시에 뉴스를 공유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확산되지 말아야 할 뉴스까지도 퍼져나감으로 큰 피해를 입는 일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식을 빨리 듣는 좋은 면도 있지만 확산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는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인터넷이 없던 일세기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의 속도도 엄청 빨랐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좋은 뉴스만 전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신의 왕이라든가, 미친 사람이라든가, 민족을 파탄에 빠뜨릴 수 있다는 소문들도 확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이런 나쁜 뉴스들의 확산을 막기 위해 무슨 행동을 취했다는 흔적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노하신 적도 없습니다. 제자들을 다그쳐 좋은 소문을 내도록 부추기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좋은 소문 또한 빠르게 유대 사회를 파고들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뉴스가 퍼져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이며 그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좋은 뉴스가 사람들 마음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시면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란 말로 앞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역사의 현장을 내다보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확산이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신 것입니다. 지금 유대 사회에서 예수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의 말을 통해 주변 나라로 믿음의 소문이 확산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들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냐에 대해 우리는 이들이 비유대인들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신앙이 유대 사회를 넘어 비유대 사회까지 퍼져나갈 것임을 이 말씀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어떤 식으로 믿음의 확산이 이루어졌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소아시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예수 신앙이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장면을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확인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 믿음의 소문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8).

예수 신앙은 그것을 갖고 있는 자를 통해 전달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 부분에 대해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라면서 인정하셨습니다. 먼저 믿는 이들의 말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예수 신앙이 전파되는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라 할지라도 지금도 이 방식은 유효합니다. 예수 신앙을 갖고 있는 자들의 말을 통해 이 시대에도 믿음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시대가 만들어낸 수많은 문명 도구들이 있지만 믿는 자의 말을 통해 전달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음의 확산은 정보 전달처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믿는 이들의 확신에서 비롯됨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할 때에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힘있게 전달할 수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우리 시대의 교회가 예수 신앙을 얼마나 확고히 붙들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확산의 주역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예수 신앙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을 검증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어떻게 이 믿음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입니다. 교회는 예수 신앙 위에 세워진 믿음의 공동체로서 이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시대 교회는 오늘도 예수 신앙을 더욱 확고히 다져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19절 “진리로 거룩해지다” 2021년 10월 8일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기독교 세계관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를 잘 표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벗어나 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친구로 살아가면 안되는 존재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한다고 하셨습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됨을 뜻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그것에 종속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진리’ 때문입니다. 진리로 거룩해지면 세상과 구별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진리를 따르면 자연스럽게 거룩해지고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하신 것은 세상에 살지만 다른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임을 드러나게 해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새로운 정체성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세상에 보냈다’는 것은 거기서 끄집어낸 다음에 다시 들여보냈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만드신 후에 다시 세상 속에 살도록 보내셨던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해짐으로 제자들은 세상에서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진리라 여긴 가치들과 다른 성격을 갖고 있는 새로운 진리로 아버지의 말씀을 말한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영역에 속한 새로운 진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미 존재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이 바로 아버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신 ‘아버지의 말씀’은 이렇듯이 구약 성경과 예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제자들이 진리를 알고 싶다면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대인 사회에서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에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이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하신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구약 성경과 대등한 위치에 놓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의심 없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설교가 진리이기에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이 진리에 의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신약 성경이 진리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고 했을 때에 우리는 좀 더 폭넓은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 성경 모두를 진리로 받아들여 그 속에서 진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 진리로 거룩해지는 실제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세상과 친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일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에 걸쳐 우리 삶에서 경험되어져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의 기도처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란 간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도움을 입어야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거룩한 존재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아버지의 말씀에 의존하여 이전과는 다른 삶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일 수 있는 참된 모습입니다.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려는 예수님의 열정에 감화되어 진리를 따르는 거룩한 성도로서 오늘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16절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2021년 10월 7일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문제는 구원을 받고나서도 여전히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믿자마자 세상을 떠나 천국에 입성하면 좋을텐데 계속해서 고달픈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지금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을 데리고 가시겠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요한복음17:11에서 “내가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란 언급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제자들은 이 곳에 남겨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없는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와 같이 살 수 있을까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시절과 같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그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세상이 아닌 예수님에게 속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근거는 예수님 자신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에 대해 예수님 자신이 모델이 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지냈던 시간동안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셨고 제자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악과 싸워야 합니다. ‘악에 빠진다’는 것은 마치 늪에 빠지는 것과 같은데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늪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처럼 악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발견되는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이것이 악과 싸우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이 이렇듯이 악과 싸워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고 하셨는데, 이는 아버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그들에게 기도 형식으로 알려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악과 싸워야 하고 그것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그들만의 힘으로는 이것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가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보전해주셔야 할 정도로 악의 유혹이 강력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싸워야 할 이 세상의 악은 지금도 여전히 강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맞서서 싸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 삶 속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달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지금도 돕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히4:16)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 무기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하여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4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2021년 10월 6일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인간의 감정은 복잡합니다. 서로 다른 감정이 교차할 때에는 어떤 것이 진짜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음에도 우리의 감정 안에서는 공존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는 감정이 동시에 생길 수가 있지만 그것을 들여다보면 나름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유 없이 밉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움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미워하거나 미움을 받을 때 ‘왜’란 질문을 던지면서 그 이유를 알고자 합니다. 원인을 안다고 해서 미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생각을 하면서 살기에 ‘왜’란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미움을 받는 제자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셨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란 말씀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가르치신 것으로 인해 세상의 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아버지의 말씀을 싫어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자 그들까지도 미워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았다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세상의 미움을 받은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말씀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무슨 이유로 아버지의 말씀을 그렇게도 싫어할까요? 그 내용이 세상을 정면으로 비판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말씀이 세상을 책망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버지의 말씀에 의해 책망을 들으니 반감이 생겨 미움의 감정이 폭발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에게 미움의 감정이 생길 때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미움의 원인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고 하셨는데, 세상과 이질적인 관계에 놓인 예수님과 제자들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미움을 받는 또 다른 이유로 제시된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 전달된 아버지의 말씀에서 이질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말씀을 들으면서도 동일한 이질감을 감지한 것입니다. 이런 이질감을 세상은 너무도 싫어해서 배척한 것입니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고 세상은 판단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들려졌고, 그들이 이 말씀을 세상에 전하자 이질감에 치를 떤 세상은 그것을 철저히 배척해버린 것입니다. 세상의 미움을 제자들이 받게 된 진정한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한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한 세상은 그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자기 편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알기에 세상은 그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세상이 왜 그렇게도 싫어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여기서 얻어야 합니다. 세상은 그 말씀이 자신의 것과 너무도 이질적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그렇게도 싫어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이 싫어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과 계속해서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새롭게 나타날 것이기에 소망을 품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3절 “예수님의 기쁨을 아십니까?” 2021년 10월 5일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마음이 즐거우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우울하면 세상이 다 불행해 보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은 언제든지 우리의 삶에 찾아올 수가 있습니다. 한 순간 모든 것을 지옥으로 만들 정도의 고통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유를 분석하고 원인을 파악해도 마음에 깊이 패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기독교인들은 기쁨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이 기쁨으로 가득해지기를 소망하셨습니다. 특히 자신이 그들 곁을 떠날 시점이 다가오자 이 부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와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시는 가운데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누려야 할 기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도 여러 번에 걸쳐서 ‘내 기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내 기쁨’이 제자들 안에 충만해지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당시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과는 어떤 차이를 보이셨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중요한 힌트는 요한복음8:29에서 발견할 수가 있는데,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누리셨던 기쁨의 실체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기쁨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의 기쁨으로 채움받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예수님의 삶에 가득찼던 것입니다. 물론 강력한 저항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보이는 세력과 보이지 않는 세력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의 즐거움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난관을 다 뚫고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마음에 가득채우셨습니다. 이에 대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란 말로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의 기쁨에 모든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는 열정이 그로 하여금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제자들이 그의 기쁨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하셔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나서 낙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잘 아시고서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요16:6)고 하셨습니다. 근심으로 채워진 제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기쁨으로 채울 수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만이 해답임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근심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의 현장에서도 아버지의 기쁨으로 채움받아 모든 근심을 이겨내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의 기쁨으로 채움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채우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마음을 예수님에게 활짝 열고 그의 기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들을 근심케 하는 일들에서 눈을 돌려 예수님의 기쁨에 고정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런 삶의 모습을 실제로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예수님의 기쁨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열정이 우리 안에 전달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를 근심케 하는 이들에 거리를 두고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12절 “지켜줄 수 있는 능력” 2021년 10월 4일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아이를 잃어버린 채 평생을 고통 속에서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가슴을 치며 후회 속에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지켜주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아픔으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란 말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보전하고 지켰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것은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맡겨진 이들을 지켜내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를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예수님이 받으셔야 했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으로 보셨습니다.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예수님은 해석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에 대한 평가를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서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를 팔 자가 가룟 유다임을 이미 아셨던 예수님이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13:18)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택한 자들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이에 대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면서 그의 보호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저자 요한은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호 본능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그림이 그의 기도에 뭍어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제자들을 보호해달라는 기도를 아버지께 올리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기도를 하시는 이유는 자신이 더 이상 물리적으로 그들과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머물 수가 없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보호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아버지께 보호해달라는 기도를 드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이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 곁을 떠나게 되어서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도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35).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지키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조금도 줄지 않고 여전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물리적으로 함께 하지 않는다고 보호할 능력까지 잃어버린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아버지의 이름과 성령의 권능으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지키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호하심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옳은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삶을 뒤흔들 수 있는 어려운 일들을 만나도 예수님의 보호를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의 보호하심을 더욱 신뢰하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가장 건강한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