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5장45절-47절 “모세를 믿었더라면” 2020년 11월 25일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옳은 일을 했음에도 비난을 들을 뿐 아니라 고발까지 당한다면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했다는 이유로 당시 권력을 쥔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른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했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옳은 일을 하셨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불의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억울한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셨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셨습니다. 차분하게 자기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풀어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이며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음을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장 신뢰하던 모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꺼내십니다. 모세가 유대인들을 고발할 것이란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모세는 언제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본문45절에서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라고 하시면서 인정하셨습니다.

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 오경이라 불려지는 책들이 있는데, 총 다섯 권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 등입니다. 그 중에서 출애굽기를 보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모세의 모습이 나옵니다. 모세가 전한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력히 증거하기에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거의 성역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언제나 희망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모세가 유대인들을 하나님 앞에서 고발할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던 그들이기에 이 말 또한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더 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란 말씀입니다. 모세가 예수님에 대해 기록했기에 모세를 믿었더라면 예수님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그의 글에서 예고한 메시야 이야기가 곧 예수님의 것임을 이렇게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모세가 바라보던 메시야임을 인정한다면 모세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했다는 것은 지극히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를 믿은 것처럼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했기에 그의 글을 믿는다면 예수님께로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의 글과 예수님의 글을 동시에 읽고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모세와 예수님을 연결해서 읽지 않는다면 당시 유대인들처럼 엄청난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은 예수님의 은혜를 내다보기 때문에 이 둘을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율법은 은혜 안에서 성취된 것이기에 예수님 안에서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행위 구원을, 예수님의 은혜는 믿음 구원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모세는 율법으로 구원받으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율법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재조명해야 합니다. 특히 모세의 글인 율법은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란 틀 속에서 읽혀져야 제대로 이해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지금도 모세의 율법을 통해 풍성한 은혜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5장41절-44절 “누구의 칭찬을 구하는가” 2020년 11월 24일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문명은 전세계를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습니다. 인터넷만 통하면 지역, 시간, 거리와 상관없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 부작용도 있지만 온 세상을 매료시키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유튜브는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을 알리고 여론을 형성하는 막강한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댓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악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있지만 위로와 응원을 얻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면 한 순간 유명인이 되어 부와 영광을 거머쥐게 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이 칭찬에 목말라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응원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없던 힘도 생길 정도로 신이 난다고 말합니다. 무플(댓글이 전혀 없는 상태)보다 악플(악한 평가)이 더 낫고 악플보다 선풀(응원의 메시지) 더 낫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근본적으로 관심을 받고 싶을 뿐 아니라 칭찬을 듣고 싶어합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라 해도 사람의 칭찬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사람의 이목을 끌고 칭송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기도, 구제,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교묘하게 포장을 했을 정도입니다. 노골적으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경건 생활을 하면 외식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기에 그들은 안그런척 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을 끌어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이란 ‘칭찬’을 뜻하는데,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평가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평가를 절대화시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으로 자신의 사역을 평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단호한 모습입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끄집어 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하시다니 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란 말씀으로 그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예수님을 거절하는 그들의 태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영접할 뿐 아니라 서로 영광을 취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속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마음 속 깊이 꼭꼭 숨겨두었던 사람의 영광(칭찬)을 구하는 그들의 삶의 목표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것을 믿고 있었던 유대인들이지만 정작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는 태도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로 사람의 칭찬에서 자유로워지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람의 칭찬이 더 중요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사람의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면 우리의 신앙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이냐, 하나님의 칭찬이냐의 갈림길에서 헤매게 되는 안타까운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느냐, 사람을 더 의식하느냐란 질문을 항상 자기 자신에게 던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정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사람의 칭찬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더욱 더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39절-40절 “성경을 읽는 이유” 2020년 11월 23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긍심은 대단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인 구약 성경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보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모세가 가르쳐준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신명기6:6-9절은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희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심을 예수님도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본문3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만 본다면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확실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생명을 주는 책이란 사실을 유대인들은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 연구와 목적 의식을 공유하셨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그들의 자세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란 말씀으로 유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측면을 드러내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목적이 생명을 얻기 위함인데, 이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분노할 일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한 부분도 아니고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한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거절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과 예수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책인 반면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과 같은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을 갖고 있던 유대인을 향해 ‘영생을 얻기 위해 나에게 와야 한다’고 하시니 얼마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었던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재조명하지 않은 점입니다. 구약 성경이 영생을 주는 책인 것을 인정했지만 그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구약 성경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함을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심장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없는 상태로 구약 성경을 연구하고 위대한 글을 쓰는 것은 심장 없는 사람으로 걸어다닌 것과 같습니다. 생명 없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도덕적인 삶의 모델을 발견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허무할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목적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구약과 신약 전체를 볼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심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열매가 온 세계에 퍼져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면 생명의 사역은 더욱 활발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노력을 꾸준히 해나갈 때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37절-38절 “불신의 늪” 11/20/2020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자기 자신이 이스라엘 하나님의 친아들임을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이 땅에 오셨음을 전하셨습니다. 30절, “나를 보내신 이”와 36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에 이어 본문37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38절, “그가 보내신 이” 등의 말씀은 강력하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를 너무도 큰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보내셨고, 친히 증언하시는 대상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정죄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냐 거절할 것이냐란 갈림길에 서 있지만 그들은 거절하는 입장에 서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친아들이신 예수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지금 불신의 늪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38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는 예수님의 진단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친아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집 안에 거하듯이 말씀이 그들 안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씀을 듣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말씀이 그들 속에 머무르지 않고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들은들 마음 속에 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경고성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이를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불신’이란 단어로 규정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신이 크기에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들 속에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전혀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친아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보내신 친아들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친아들이시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불신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게 됩니다.

불신의 늪에 빠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친아들로 믿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상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커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을 분리된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어그러질 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신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던 모습은 교회사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인간으로, 훌륭한 도덕 선생으로, 하나님보다는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그릇된 신학들이 난무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일뿐 절대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지금도 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신의 늪이 의외로 깊고도 넓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유일한 친아들되심을 인정하고 있나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나요? 우리는 오늘도 불신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35절-36절 “더 큰 증거” 11/19/2020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입니다. 그가 베푼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몰려들었을 뿐 아니라 그가 전한 메시지가 아무리 날카로워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3:7)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의 메시지를 달갑게 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를 ‘그리스도’(메시야)로 인정하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요3:28)라고 반박을 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해도 사람들은 더욱 더 그를 추앙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했으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29)고 사람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역할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등불 비유로 요한의 사역을 평가하신 예수님은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요한을 좋아했고 따랐는지를 예수님도 인지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추운 겨울 한 낮에 따스한 햇빛을 쬐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묘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때’란 말로 요한의 역할이 제한적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등불이 밝히는 실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의 증거는 철저히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맞추어진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요한을 따르던 이들이라면 메시야 예수님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유대인들은 요한을 추앙하면서도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어찌보면 요한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편가르기는 사람의 본능에 가까운 성향이라 누구에게든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면 요한의 편에 서거나 요한에게 마음이 상하면 예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릇된 태도에 연연하지 않고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36절,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란 말은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더 큰 증거’의 실체가 무엇이냐에 대해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라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역사’란 무엇이냐에 대해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이나 38년된 병자를 완치시킨 사건 등으로 답할 수가 있지만 더 궁극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역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 속에 이식되는 일을 가리킵니다. 과연 어느 누가 이 일을 해낼 수가 있을까요? 그렇기에 예수님은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역사’가 무엇을 증언하느냐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보낸 유일한 메시야란 사실입니다. 따라서 생명을 주는 사역이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안에 심겨질 때에 우리는 세상에서 그를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등불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31절-34절 “구원을 위한 증언” 11/18/2020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에게 생명이 주어지느냐에 대해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그의 음성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교와 기적을 통해 드러내셨지만 그것을 보고 듣는 이들은 그의 실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느냐에 대해 심판 이야기를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을 거절했으니 심판을 피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엄중한 메시지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체를 거절했기에 심판의 메시지도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이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위한 증언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직접 하시기에 참일 수 밖에 없다는 강력한 호소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증언이 참이기에 예수님의 설교를 무시하는 행위는 너무도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했기에 그 위험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무시하던 유대인들도 인정했던 인물이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기 위해 유대인들은 유대 광야로 몰려갔을 정도입니다.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메시야이심을 증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메시지를 들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요한을 인정해도 예수님만은 인정하지 않았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답답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면 자신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요한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그가 증언한 예수님을 믿어야 함을 강력히 외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는 목적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고 영접해야 구원이 주어집니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고 세례 요한의 말을 진리로 받아들인들 예수님을 거절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뺀 채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례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때부터 섬겼던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말하지만 그것은 모래성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인들은 반드시 그분을 인정하고 영접해야만 합니다. 다른 선택은 절대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란 증언은 유대인만이 들을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들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로서 그 안에 생명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로 산다면 어떤 누구에도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상 다른 선택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영생을 얻을 길은 없습니다. 이 엄중한 구원의 증언을 교회와 성도들은 확신을 갖고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무시하거나 예수님 말고 다른 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는 교회는 한낱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의 위상은 철저히 예수님 위에 세워짐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우리는 구원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30절 “누구의 뜻인가” 11/17/2020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성경은 66권으로 구성된 거룩한 책인데 우리가 어떤 부분을 읽고 묵상할 때 주의할 점은 그것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각 부분은 좀 더 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란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지금 심판하신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편에서는 ‘듣는 대로 심판한다’고 하시고, 다른 편에서는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하신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심판의 현재형과 미래형을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각적인 심판과 유예된(최종) 심판이 있습니다. 하지만 즉각적인 심판은 구원과 함께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이것은 심판이 아닌 구원을 목적으로 합니다. 반면, 유예된 심판은 구원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 최종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듣는 대로 심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 여기서 그의 음성을 듣는 일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한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지금 여기서 판단을 하신다면 과연 의로운 것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이것을 의심했습니다. 무슨 권위로 남을 판단하느냐라고 따지듯이 다그쳤습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는 권한’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하시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의 근거를 대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의대로 판단하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판단하지 않음을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세상을 판단하시는 것일까요? 주님은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라고 답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의 뜻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비교하면서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있음을 자신있게 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듣는 대로’ 심판하신다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들은대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설교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지금 설교를 통해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있음을 외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누구의 뜻을 따를 것인가란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의 뜻이 서로 다를 때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지를 놓고 쉽게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 자신의 생각 사이에 간극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이론적으로 보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는 답을 내립니다. 하지만 삶의 현장 속에 들어가면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지만 우리의 이익이 달린 일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지금은 이익을 선택하고 나중에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하나의 보험같은 것이 되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십니다. 이런 삶의 자세를 끝까지 지속시킬 수 있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지로 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각이 부딪힐 때마다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가 있음을 삶 속에서 배울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28절-29절 “부활을 믿는다면” 11/16/2020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이 유대 땅에서 활동하던 당시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과 동등한 예수님의 위치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처럼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쥐고 이 땅에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예수님을 공경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만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음성을 들으라고 강력히 외치신 예수님 앞에서 유대인들은 불신 가득한 눈빛을 보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불신을 불식시키는 예수님의 화법입니다. 이 뿐 아니라 더욱 더 유대인들을 공황상태에 빠뜨리는 말씀을 예수님은 하십니다. 그것은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자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이들(죽은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와 상관없이)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은 미래까지도 예수님의 지휘 아래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기에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뿐 아니라 죽은 이들도 먼 미래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말씀은 부활로 이어집니다. 미래 부활은 기정 사실이며 예수님이 이것을 역사 한 가운데서 실현하실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에 이미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에 일어난 일로서 현실화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미래 부활 또한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미래 부활은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뉠 것입니다. 부활은 생명을 가진 이들에게든 심판을 받을 이들에게든 일어날 것입니다. 부활은 이 땅을 살다 죽은 모든 이들에게 일어날 미래의 사건입니다. 누가 생명의 부활 또는 심판의 부활로 살아날 것이냐에 대해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하는 자’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로 답을 하십니다. 미래의 부활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란 말씀과 ‘내 말을 듣고’ 등을 볼 때에 선과 악의 기준이 예수님의 음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생명의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음성을 거절하고 살다가 죽은 이들이 맞이할 부활은 심판일 것이 확실해집니다.

미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로서 미래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것에 맞추어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이들은 미래부활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미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예수님의 음성일 것입니다. 미래 부활은 우리로 예수님의 음성을 더욱 진지하게 들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실제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미래 부활을 묵상한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더욱 실감날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삶을 예수님의 이야기로 채울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부활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먼 미래일지라도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에 비추어보면 미래 부활은 마치 코 앞에 다가온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미래 부활을 믿고 그것을 소망하며 살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오늘도 듣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25절-27절 “누구의 음성을 들을 것인가” 2020년 11월 13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셔서 유대 땅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의 청중은 당연히 유대인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신 야훼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철칙은 ‘절대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친아들이라 칭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권한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상황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아들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신 것인데, 이것을 받아들이면 유일신앙(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이 무너진다고 유대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목숨 걸고 지키고 있는 십계명 중 제1계명이 무너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유대인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그들이 왜 그렇게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예수님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음성을 유대인들에게 가감없이 들려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의 음성을 들어야만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시면서 지금이 기회임을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은 곧 예수님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이 음성을 들을 때는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메시지에 열광해야 했음에도 정반대로 예수님의 음성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들 앞에 놓인 생명의 길을 자기 발로 차버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왜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답을 주셨습니다. 이 뿐 아니라 왜 그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나느냐에 대해서도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로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임의대로 생명과 심판을 행사하시는 것이 아님을 유대인들에게 강력히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철저히 아버지와의 일치된 마음으로 살리는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음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준 십계명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렇듯이 유대인들은 다른 음성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불행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예수님의 음성이 아닌 다른 음성을 들었던 교회의 모습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과연 괜찮을까요? 예수님의 음성을 얼마나 자주 듣고 있을까요? 세상의 목소리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그의 음성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그의 음성을 진부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오래된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컴퓨터만 켜면 우리는 수많은 음성을 듣게 됩니다. 과연 그 음성들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의 가치를 반영하는 목소리는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다른 목소리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북해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입니다. 성경과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음성은 지금도 들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귀를 막고 있다면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의 음성은 그냥 지나가는 기차 소리만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모든 목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을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지금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5장24절 “사망에서 생명으로” 2020년 11월 12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몸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갑니다. 환자의 의사에 대한 신뢰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의사에 대한 신뢰가 클수록 환자는 심리적인 안정뿐 아니라 치료 과정을 성실히 따를 수 있습니다. 의사를 통해 병이 낫게 되면 의사에 대한 고마움이 저절로 표출됩니다. 완치된 환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를 치료한 의사를 조금도 의심없이 추천합니다. 이러한 선순환은 환자와 의사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일은 당시 유대인 사회에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신성모독이라는 당시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웁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놓은 신성모독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도 매우 나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과 사회적인 반감을 온 몸으로 느끼시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자신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친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임을 더욱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이것을 신성모독이란 죄목으로 덮어씌워 사람들을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든 유대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음을 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생명과 심판을 주실 수 있는 권한을 갖고 계셨듯이 자신도 동일한 권한을 갖고 있음을 전하셨습니다. 아무리 유대 사회가 예수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통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외치신 모습은 너무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볼 때, 본문이 말하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한 느낌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을 믿지 못하도록 신성모독죄를 덮어씌웠는데 예수님은 ‘내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시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요? 적대적인 분위기로 가득한 청중에게 ‘나를 믿으라’고 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 말을 들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적개심과 사회적인 반감이란 물결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외치신 것처럼 지금도 이 메시지는 울려퍼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적대적일수록 영생의 메시지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쳐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확증하셨듯이 지금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반감과 사람들의 무관심 내지 적대심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로 심판이 아닌 영생에 이르게 하며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심판과 영생, 사망과 생명이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눈 앞에 닥친 세상의 수많은 일에 파묻혀 사는 우리가 이것을 놓치고 살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희노애락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살지만 우리는 심판이 아닌 영생을,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사회의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은 자로서, 사망이 아닌 생명을 얻은 자로서 세상에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훌륭한 방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