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흔적” (시편108편 묵상) – 7/9/2020

우리는 자녀가 구김살 없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좋은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다면 별 탈 없이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자녀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상처를 받으면서 자랍니다.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녀들은 크고 작은 아픔을 겪습니다. 그것까지도 막아주고 싶지만 부모로서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자녀의 마음에 새겨진 아픔의 흔적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의 인격으로서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고통을 겪으면서 인격이 형성되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성장합니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자녀들이 어느 순간 성숙한 모습을 보일 때 부모는 비로소 인식합니다. 부모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녀들이 자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녀들 안에 있는 깨진 흔적들이 성장의 동력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읽은 시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적들과 싸워도 승리할 것이란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이 자신감을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로 드러냅니다. 배가 항해를 마치고 부두에 정착하듯이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는 모습입니다. ‘마음을 정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킨다’는 뜻으로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두겠다는 강력한 의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인은 실패한 경험이 전혀 없이 매번 승리만 한 것일까요? 신앙적으로 깨진 흔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깨진 흔적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고 심적 고충을 드러냅니다. 그에게 신앙적으로 깨진 흔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승리할 것을 예상했다가 낭패를 당했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이성 정복에 실패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전투도 없이 정복했던 이스라엘은 작고 약한 아이성 정도는 쉽게 정복할 것으로 생각했다가 크게 패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도 과거에 신앙적으로 큰 실패를 겪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고 마음을 정합니다. 깨진 흔적이 있음에도 그것이 신앙적으로 발목을 잡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했음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란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처럼 우리는 깨진 흔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신뢰에 금이 갔다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시대를 이기는 신앙인의 올바른 길입니다.

“사랑의 기적” (시편 107편 묵상) – 7/8/2020

우리는 살면서 기적같은 일들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의사도 포기한 환자가 어느날 완쾌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망해가던 사업이 어느 순간 잘 풀려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간증을 통해 듣습니다. 물론 남에게 일어나는 기적이 왜 나에게는 없는가하는 탄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기적이 필요한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깊은 한숨이 터져나옵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 파고드는 유혹이 바로 사행심입니다. 한 방으로 인생의 역전을 꿈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에 투자하면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허황된 말에 속아 넘아가는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을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기적들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도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란 말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인생 속에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시인의 목소리가 우렁찹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시인은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적들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당연히 목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기적을 그분의 인자하심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인자하심’은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기적을 사랑의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말을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항상 기적을 주셔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기적으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잘못된 습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즉, 기적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적보다 크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란 문구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그분을 더욱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을 말하면서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는 기대감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한 깨달음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단순히 어려움이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진정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기적은 우리 안에 또 다른 모습의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사랑의 기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할 때 완성됩니다. 우리 삶에 사랑의 기적이 이어진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더 깊어질 것입니다.

“과거의 교훈” (시편106편 묵상) -7/7/2020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후회스러워도 이미 일어난 일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싶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일에 연연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의 실수와 상처로 신음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망과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혀 현재의 삶을 그냥 보내버리기도 합니다. 다 잊어버리고 오늘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먹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밤잠을 설치고 우울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과거는 오늘의 거울이기에 없어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현재의 삶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시인처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란 마음을 우리는 품고 살아갑니다.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생활에 대한 열망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과거의 잔상이 남아 있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냥 잊고 살자는 결심만으로 없어질 과거의 기억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실패한 과거의 경험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지금 새로운 마음으로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고자 하지만 전에도 이렇게 결심했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자꾸 떠오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는 말처럼 우리의 과거는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실패를 거듭했던 좋지 않은 기억이 다시 시작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습니다. 이것이 실패와 회개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꺾이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란 시인의 말에서 우리는 진정한 소망을 보게 됩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발목을 잡아도 우리에게는 한없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넓은 사랑이 있습니다. 부르짖는 자의 고통을 들으실 뿐 아니라 실제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시인은 오늘 읽은 시편에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펼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끝없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시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란 시인의 말은 그 울림이 매우 큽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구원의 손길을 계속 내미신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과거가 우리에게 상처로 남기도 하지만 커다란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과거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은 변하지 않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실패하더라도 과거에 자기 백성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새로운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란 시간에 과거의 교훈을 마음에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시편105편 묵상) – 7/6/20202

사람의 기억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할 것입니다. 기억력은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메모를 하기도 합니다. 기억보다 기록을 더 신뢰하는 것은 기억에 대한 의심이 어느 정도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고 과장되고 선택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억은 어떠한가요? 사람의 기억처럼 의심의 대상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안경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매우 단호합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시간과 무관하게 언제나 완벽하다고 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은 하나님의 기억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높이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천 대’란 말은 숫자 개념보다 영원성을 피부에 와닿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절대 잊지 않을거야’란 결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기에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도 그런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그냥 추억 정도로 남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을 기억해도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그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억은 실제로 이루어지는 독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기억하신 약속으로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먼 훗날에 이것을 실제로 이루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이 단순한 과거 추억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에는 그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잊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을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오래 전에 하신 약속일지라도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긴 그분의 백성들입니다. 약속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가 누릴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약속을 받고 나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까지 얼마나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받았는지를 시인이 상세히 묘사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라는 시인의 말은 우리에게 무겁게 와닿습니다. 우리는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는 시인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영원히 기억하신다는 약속을 붙든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높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시편104편 묵상) – 7/4/2020

과학의 시대에 성경은 여러 가지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창조 이야기입니다. 과학과 창조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과학적 방식으로 증명할 수 없는 창조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에게 이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창조와 과학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하다 교회에서는 창조를, 교회 밖에서는 과학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 안에 과학이 하나의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창조 세계를 연구하면서 발견 또는 발명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을 이성으로, 창조를 신앙으로 이분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입니다. 창조의 시각으로 과학을 연구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과학의 지식으로 창조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날 것이기에 창조를 믿는 이들에게 과학은 매우 중요한 학문입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웅장한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입으셨나이다”고 하면서 자연 세계인 빛, 물, 구름, 바람, 땅에 펼쳐진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과학 이전 시대이기에 시적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적인 표현을 과학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시를 시로 이해해야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란 표현입니다. 과학적 시각으로는 시인의 느낌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아름다운 장면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예로,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는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 올랐으나”란 표현입니다. 얼마나 시적으로 멋지게 표현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작품임을 독자들이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왜 하나님의 세계인지를 시적인 감성으로 절묘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도 자연 세계를 보면서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라고 탄복할 수 있다면 시인의 감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심”을 알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시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즐거워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있는지를 점검할 때입니다. 망가진 세상, 불의와 죄악이 들끊는 세상, 거짓과 더러움이 솟구치는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의 세계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는 시인처럼 우리도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세계를 행복한 눈으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찬양이 넘치는 삶” (시편103편 묵상) – 7/3/2020

최근 21년을 이어온 개그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때 그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했던 적이 있어서 폐지되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아직까지도 시청률이 어느 정도는 나온다고 하지만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사람을 웃기지 못한 결과라는 자조섞인 목소리도 나오지만 시대에 맞는 웃음 코드를 찾지 못했다는 뼈아픈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경제 불안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속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지점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개그맨들의 끝없는 노력과 땀이 없어서가 아니라 웃음을 회복시키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요즘은 그냥 웃을 일이 없다는 냉소적인 시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도 사회의 일원이기에 이런 현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읽은 103편은 찬양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내 속에 있는 것들’이란 표현입니다. 이것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시인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찬양이 한 사람의 심연까지도 파고들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겉모습이 아니라 깊은 내면이 찬양으로 가득차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웃음이 시인의 마음에 가득함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시인의 마음에 찬양이 가득하도록 했을까요? 시인은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시인의 인생 깊숙히 파고드신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시인의 소원 성취를 이루신 하나님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인생으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라고 고백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그릇된 길을 걷는 인생 속으로 들어오셔서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시고 기회를 다시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탄복하는 시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답안지를 달달 외워서 고백한 것이 아닌 삶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앙 고백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계심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체험에는 시인의 말처럼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에 불과한 우리 인생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수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한계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때 우리의 마음은 찬양으로 가득채워질 것입니다. 웃을 일이 없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기도” (시편102편 묵상) – 7/2/2020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무엇이든지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듯이 말입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세상이 거꾸로 돌기 시작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빨리 세상이 돌아가는지 어지러워서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누워있어도 어지럼증은 가라앉지 않고 구토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아내에게 빨리 응급차를 부르라고 소치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떤 도움이든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고통을 겪습니다. 많은 경우 혼자서 감당해야 할 고통들입니다. 병마와 싸우거나, 마음의 깊은 상처로 신음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수많은 아픔과 고통 앞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도 고난 중에 있는 한 성도가 쓴 시입니다. 시인은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고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시적으로 표현했지만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다른 상황에서 다른 성격의 고통을 겪지만 뼈가 마를 정도로 마음 고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는데,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고 말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입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겪는 삶의 아픔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시인은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인의 신앙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갖고 있음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 징계를 받는다해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그는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뼈가 마를 정도로 심적 고통이 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음을 강력히 외친 것입니다. 실제로 시인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라 기도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언제든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 (시편101편 묵상) – 7/1/2020

부모의 자녀 사랑은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물론 가끔 부모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사랑이 뉴스에 보도가 되기도 하지만 자녀를 위한 희생적 사랑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만 때론 그것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를 교육적 차원에서 엄하게 대할 때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는 경우입니다. 잘 해주면 사랑하는 것같고 야단을 치면 미워하는 것같은 느낌을 자녀들이 받습니다. 사랑하지만 옳지 않은 일에 대해 꾸짖는 일을 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을 어린 자녀들이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대하는 우리로서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다각도로 접하게 됩니다.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해 하나님이 때론 사랑으로, 때론 정의로 대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해할 지를 묵상합니다.  

시인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찬양하는 시인의 마음 자세를 보여줍니다. 사랑과 정의에 대한 기계적인 균형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적인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어떤 모습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기계적인 균형에 너무 매달린 것은 아닌지, 또는 한 쪽에 치우쳐 편향된 시각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논쟁적일 수 있지만 겸손한 자세로 대해야 할 거룩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완벽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주제를 대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시인은 사랑과 정의를 찬양하면서도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태도입니다. “완전한 길을 주목”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고자 하지만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매순간 사랑과 정의를 저울추에 달듯이 균형잡기보다 상황별로 판단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시인은 정의가 필요한 상황에서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는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겠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악과 타협하고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물론 사랑 없는 정의만을 외친 것은 아닙니다. 무자비한 보복을 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악을 용납하고 죄와 손잡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로서 어떤 상황에서 사랑을 또는 정의를 내세울지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나는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겠다는 마음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배자의 마음” (시편100편 묵상) – 6/30/2020

기독교는 철저히 하나님에게 의존합니다. 하나님이 시작이시고 끝이십니다. 성경의 시작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로 증거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반드시 직면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사람 이야기가 가득해도 하나님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야기는 우리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들이기에 성경은 그들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성경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를 규정하는 최고의 모습은 예배입니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배자인 사람의 관계를 놓치면 우리의 성경 읽기는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어떤 모습을 보이시는지, 그의 백성인 우리는 어떤 태도를 나타내야 하는지를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태도로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예배자의 마땅한 태도는 무엇인가요? 시인은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고 말합니다. 그는 “찬송함으로 그의 궁전에 들어가서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고 외칩니다. 예배자로서 우리에게 찬송이 가득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찬송은 시편 전체를 흐르는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자는 외침은 시편 곳곳에 퍼져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찬송할 상태가 아닐지라도 찬송은 쉴 수 없습니다. 찬양은 하나님과 우리의 위치를 규정해주기에 우리는 그것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찬송과 더불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감정은 기쁨입니다. 시인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고 말합니다. 기쁨이 찬송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찬송을 통해 그의 감정이 기쁨으로 충만해짐을 시인은 이미 경험한 것입니다. 시인은 찬송과 기쁨의 이유를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놓인 우리이기에 기쁨과 찬송은 함께 어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찬송과 기쁨의 이유가 다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 구원자, 부모로 인정한다면 찬송과 기쁨은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밖에 없습니다. 찬송이 사라지고 기쁨의 감정이 메말라간다면 예배자로서의 마음 자세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쁨의 찬송이 얼마나 우리 안에 가득한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찬송과 기쁨이 살아나면 감사는 우리 마음을 가득채울 것입니다. 시인은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하자”고 합니다. 감사는 찬송과 기쁨과 어울리면서 예배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에 감사는 끊임없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감사의 찬송과 기쁨이 우리 안에 가득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영원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배자로서 찬송, 기쁨, 감사로 하나님 앞에 오늘도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거룩한 예배” (시편99편 묵상) – 6/29/2020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시편의 가장 강력한 주제입니다. 93편, 97편과 99편은 시작을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로 합니다. 하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93편은 하나님의 권위에, 97편은 땅의 즐거움에, 그리고 99편은 두려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99편인 오늘의 시편은 “만민이 떨 것이요 땅이 흔들릴 것”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과 자연 만물이 어떻게 반응할지를 경외심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들의 태도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태도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우하지 못하는 실수입니다. 시인은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심”을 말한 후에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마땅한 우리의 태도임을 강조합니다.

예배 환경을 중시하는 현대 문화에 친숙한 우리로서는 두려움으로 예배한다는 것이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편안하고 안락하고 쾌적한 환경이 조성된 예배당만을 생각하다보면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마음 자세를 방치할 수가 있습니다. 예배 주변 상황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놓치고 마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예배 분위기와 부드럽고 세련된 예배 진행에 만족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예배 드림보다 예배 잘 봄으로 표현하는 우리의 말에 이런 인식이 깔려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예배 드리는 이들은 시인처럼 항상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는 인식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신앙인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는 거룩하시다”는 시인의 고백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우리는 진정 거룩한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 마음을 가득채워야 합니다.

두려움은 공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공포심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 경배하는” 일은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이에 대한 경배는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갑고 냉랭하고 경직된 예배 분위기 조성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예배는 뜨거운 상호 작용이 일어나는 열기가 넘치는 사랑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시인은 모세와 아론, 사무엘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다”고 말하면서 상호 작용이 얼마나 긴밀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배 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와 응답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말 한 마디 하기 어려운 예배는 기도와 응답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예배가 얼마나 사랑의 관계여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거룩한 예배를 통해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