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25절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2022년 1월 19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나무를 보기 전에 숲을 먼저 보라는 말처럼 요한복음서를 읽는 독자로서 우리는 숲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이 책의 저자는 숲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밝혔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20:31)란 말은 요한복음서를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지를 명확히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을 기록함’이란 문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기록이 선택적임을 보여준 것인데, 더 많은 것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이것만을 기록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 기록만을 봐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믿을 수가 있음을 자신있게 내비친 것입니다. 선택적 기록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는 이 복음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선택적 기록의 정당성에 할애한다는 것은 이것이 저저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선택적으로 기록했어도 예수님을 알고 믿기에는 전혀 부족하지 않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라면서 당시 예수님의 행적 기록이 얼마나 차고 넘쳤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증거는 차고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증거를 제시하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지만 이 책에 기록된 증거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만으로도 독자들은 얼마든지 그분을 알고 믿을 수가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이란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야하지 않냐는 반론을 염두에 둔 것인데, 이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다는 말로 반박한 것을 볼 때에 저자의 자신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선택적인 기록을 빌미로 저자 개인의 의견을 주입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음을 저자는 내비친 것입니다. 자신이 기록한 것만으로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이해하는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것임을 확실히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책 저자의 기록과 의도와 목적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 신뢰가 없이는 이 책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 책 저자는 마지막 문장에서도 독자의 신뢰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지막 문장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그의 업적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들여다봐야 함을 이 한 문장이 다시 한 번 촉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서를 통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 기록과 비교하면서 예수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책 한 권만으로도 얼마든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의 의미를 우리는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신뢰를 기초로 우리는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하심을 자주 읽어야 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읽고 또 읽으면서 저자가 목적한대로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믿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해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놀라운 경험을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나 증거가 아닙니다. 이 책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증거는 차고도 넘칠 정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 있어서 이 기록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책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을 얼마나 신뢰를 갖고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느냐입니다. 우리에게 이 요한복음서가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커다란 축복임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이 귀한 기록을 우리는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치기에 더 이상의 증거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이 기록을 읽음으로 예수님을 더욱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4절 “참된 증언, 참된 기록” 2022년 1월 18일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세례 요한은 매우 다른 시각으로 증언하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단순히 한 인간으로서 예수를 바라보았지만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 증언했습니다. 그는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요1:30)는 놀라운 증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모든 증언들을 하나로 묶어 요한복음서를 쓴 저자는 맨 마지막 단락에 와서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증언, 기록, 참’이란 세 단어입니다. 제자의 이름이 누구인지, ‘우리’란 누구를 가리키는지 궁금하지만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세 단어입니다. 증언하고 기록한 ‘이 일들’은 너무도 쉽게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좁게는 바로 앞 단락의 내용일 것이며, 좀 넓게는 요한복음 21장을 의미하며, 가장 넓게는 요한복음서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과 이를 보고 들은 이들의 반응들이 ‘이 일들’에 속합니다. ‘이 일들’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을 꼽으라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야기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 나타나셨고, 마지막에는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이야기를 직접 목격한 제자의 증언이 당시 가장 신뢰할만한 것이었음을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증언하고 기록한 제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행동했던 ‘그 제자’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익명의 ‘그 제자’로 접근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듯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증언과 기록을 당시 많은 이들이 들었고 읽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의 ‘우리’도 그 그룹에 속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고 말한 것을 볼 때 그 제자가 기록하고 증언한 내용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 정도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급이 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에게는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더 큰 신뢰를 갖고서 그의 증언과 기록을 읽고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고 한 또 다른 증언자의 목소리도 우리에게 신뢰를 더 강하게 줍니다. 이렇듯이 증언과 기록이 참되다는 사실을 여러 목소리를 통해 전달하는 것은 이 복음서를 읽고 듣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붙들어주기에 충분합니다. 요한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를 조금의 의심도 없이 읽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 구절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담고 있는 ‘증언, 기록, 참’이란 표현들을 마음에 새기고 새로운 자세로 이 복음서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보배로운 책입니다. 이 복음서를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마음에 새기는 일은 신앙인으로서 평생에 걸쳐 해야 할 노력입니다.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보통은 그것으로 끝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참된 증언만을 담고 있기에 우리는 반복적으로 이 내용을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손에 주어진 ‘참된 증언과 참된 기록’인 이 복음서를 우리는 삶의 보물처럼 여기고 자주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의 맨 마지막 단락에 도착했지만 우리는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의 가치를 더 깊이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의심과 비판은 내려놓고 참된 증언과 참된 기록으로 가득한 이 복음서의 내용을 진심을 다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보물을 갖고 있어도 그 가치를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혹시 이런 마음으로 이 복음서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된 증언, 참된 기록’인 이 복음서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3절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 2022년 1월 17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우리는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려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물어보고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그릇된 이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에 맞추어서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때에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하지만 전달하는 이의 이해가 섞여 있기에 그 의미가 다르게 전해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어떻게 잘못 전달될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고 답하셨습니다. 과연 이 말을 베드로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오늘 본문이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란 본문의 언급에서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왜곡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사실 관계를 바르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가 죽지 않는다’는 의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자 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는 대목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는 단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인용했을 뿐입니다. 즉, ‘그가 죽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가 없음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원래의 말씀과 제자들이 이해했던 말을 비교해놓은 것은 이 둘 사이가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입니다. 이것을 풀고자 하는 노력을 많은 학자들이 해왔습니다. 지금도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질문할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얼마든지 그릇된 방식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랐던 제자들 마저도 이렇게 잘못된 해석을 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경각심을 갖고 자신의 이해가 무조건 맞다는 자만심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성경을 왜곡시킨 이들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전3:16)고 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 자신도 과거에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기에 이 말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를 수 있다는 이 경고의 메시지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말씀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교묘하게 해석해서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가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가 위대한 학자이든 평범한 신앙인이든 성경을 동일하게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읽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에 근거해서 신앙 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더 바른 해석을 한 이들의 글을 읽고 도움을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신앙인으로서 그저 성경만을 읽을지라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음을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자신의 해석을 먼저 내세우기보다 말씀 자체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말씀에 대한 좀 더 바른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2절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2022년 1월 14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열 두 제자들의 삶에 대해 요한복음서는 의외로 많이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초반에 몇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묘사가 있었지만 그들 각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사안일 경우에는 일부 제자들이 언급될 뿐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주목을 받던 제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입니다. 하지만 이 제자에 대해서도 요한복음서는 그리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습니다.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할만큼의 정보가 이 복음서 안에 들어있지 않기에 섣부른 추측은 위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는 있기에 이런 저런 의견들을 제시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호기심에 사로잡힌 베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한채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란 꾸중섞인 답을 들었습니다. 물론 이 말에 대한 해석을 학자들은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올 때’가 언제인지, ‘머문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에 대한 해석이 다양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계획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모호한 언급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미리 안다는 것이 그리 유익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그 제자’의 앞 날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보여준 예수님의 반응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본인이든 다른 이들이든 상관없이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안다고 좋을 것은 없다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제자’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상관하지 말고 그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만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그 제자’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사람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보다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최선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이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이든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예수님의 명령처럼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이 되어야만 진정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세밀함과 너그러움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앞 날을 미리 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신앙 생활의 백미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한다는 것은 이렇듯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때에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그 제자’를 함께 묶어서 생각하지 않으셨듯이 우리 각자를 향한 인도하심도 각 사람에게 맞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 더 오래살고, 더 잘 살고, 더 행복하게 지내는 것으로 신앙을 확인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오늘 여기서 따르는 것으로 평가할 때에 우리의 신앙은 좀 더 건강하게 형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가르침임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주님을 따르는 성실함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앞 날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으로 확인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는 실제적인 헌신을 통해 체험하는 것이 이 시대 모든 신자에게 가장 절실한 일임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20절-21절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2022년 1월 13일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을 따르던 열 두 제자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형성했는가에 대해 복음서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서로 다른 기질과 사회적인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함께 공동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지만 서로를 견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서를 보면 유독 관계가 가까운 사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그들입니다. 이들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요한복음서는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달려가 확인한 장면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이 제자에게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이란 수식어가 붙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베드로가 돌이켜 한 사람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수식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이 수식어는 요한복음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에서 확실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편견에 의해 나온 수식어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당시 제자들이 다 인정했던 수식어였습니다. 베드로도 이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을 시기하는 마음을 베드로가 품었었느냐란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이 다루지 않기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이 사람에 대해 묘한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앞으로의 삶에 대해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가 보일 수 있는 행동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또 다른 제자에게 주목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평소 예수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였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눈에 다른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유독 이 제자만이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베드로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베드로가 주목한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평소에 많이 받았던 그 제자란 점을 본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묻는 것을 볼 때에 그의 초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에게 항상 신경쓰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엄중한 예수님의 명령 앞에서도 이 제자의 앞 날이 어떻게 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의 마음이 지금 무엇에 기울여져 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과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에 비추어 자신의 앞 날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놓고 깊이 고민할 시기였습니다. 다른 곳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려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매우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각 사람은 옆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으며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진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경쟁이 무한대로 확장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우월감에 사로잡힐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이겨내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신 예수님에게 모든 관심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도록 더욱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9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 2022년 1월 12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동안 어떤 제자들보다 열정적으로 그를 따랐던 베드로는 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휩싸였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채 물고기 잡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이대로 놓아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이신 그는 특별히 베드로와의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질문을 던지신 다음에 베드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은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표현은 그가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을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첫 부르심을 생각나게 하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서 그를 부르신 것이기에 더 특별합니다. 그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부르심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는 해설을 덧붙이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두 번째 부르심을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 어떠한 죽음까지도 감수하게 되는지와 연결하고 있기에 이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더욱 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이 될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가 베드로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기록했다면 이것은 이미 증명된 이야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베드로는 A.D.64년 정도에 네로 황제 치하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본문에서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특별히 해설해놓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 장면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베드로가 지금부터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과거에 베드로가 어떻게 살았느냐보다는 이제부터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초첨을 맞추면서 이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신앙적인 자극을 받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베드로만이 하나님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예외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수할 것이란 언급은 모든 신앙인에게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이 엄숙한 장면은 이를 읽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강력한 흡인력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일까요? 죽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면 이것이 가볍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음까지도 감수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기에 너무도 엄중한 요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한 것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이며 무게입니다. 이를 할 수 있도록 성령의 내주하심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능히 이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신자로서의 삶인 것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 “순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2022년 1월 11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을 요한복음서는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형제인 안드레가 먼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의 전도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요한복음서는 베드로를 거의 언급하지 않다가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할 때에 그가 했던 고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이후에도 베드로는 또 한참동안 등장하지 않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요13:9)란 요구를 하면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요13:36)라고 했을 때에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라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그의 말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뒤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그는 무덤으로 단숨에 달려가서 확인을 했습니다.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부 생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목격했지만 그는 자기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라면서 적절하게 은유적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베드로가 걸어왔던 삶을 묘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의 제자가 되었지만 베드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살 수가 없음을 예수님은 은유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는 베드로가 과거처럼 살 수가 없음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요한복음서는 그의 죽음과 연결시켰지만 좀 더 폭넓게 본다면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이후부터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 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 거대한 그림을 그려주신 것입니다. 이후 베드로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삶이 정말 달라졌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자기 길을 자기 마음대로 가는 자유의 삶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시는대로 걸어가는 그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으며 고넬료 가정을 방문할 때에도 온전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팔을 벌리고 남이 이끄는대로 걸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순종의 길이 무엇인지를 베드로에게 은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순종은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니는 삶이 아닙니다. 순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며 걸어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는 곳’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가 ‘원하는 곳’을 다니는 삶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용기를 요구합니다. 이런 순종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지만 우리가 그분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면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승리의 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자유가 없는 삶이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원하는 길이 얼마나 귀하고 멋진 것인지를 아는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처럼 예수님께 손을 내밀어 그분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는 삶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7절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2022년 1월 10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사랑’이란 단어는 문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면 사랑의 표현 또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사랑’은 신적인 요소가 가미된 매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가장 중요한 가치였기에 이 단어는 특별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도 ‘사랑’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요13:34)도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는 놀랍게도 죽음과 부활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펼쳐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받은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이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확인하듯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려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집착한 것도 아니고 사랑 결핍을 드러낸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진실한가를 거듭 확인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세 번째 같은 질문을 받자 이번에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감정적으로 ‘근심’했다고 본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베드로의 마음이 다쳤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불쾌했다거나 화가 났다는 감정이 아닌 자신의 진실함을 알아주지 않으시는 예수님에 대한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는 같은 답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고 덧붙인 그의 말입니다. 앞의 두 번의 대답과 달리 이번에는 이 말을 더했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이 말을 왜 하였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주님이 아시지 않느냐고 말한 것은 그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도 있지만 주님이 누구보다도 베드로의 속마음을 다 아신다는 신뢰가 묻어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에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란 말이 더해지면서 주님을 향한 그의 신뢰가 얼마나 분명했는지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주님 다 아시지요’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복잡한 속내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에 이 말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진짜 우리의 속마음을 다 아신다고 믿기에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고 하면서 베드로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진짜임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에 걸쳐 같은 질문을 하셨지만 베드로가 마지막에 와서는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고 답함으로 아무 것도 숨기는 것이 없음을 확실히 드러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마다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이 다 아십니다’란 진심어린 고백을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쉽게 변질될 가능성을 항상 품고 사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주님이 다 아십니다’고 고백하는 마음만이라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모든 부족함과 연약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지금도 이 말을 사용함으로 마음의 진심을 주님께 드러내는 일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6절 “목양의 막중한 책임” 2022년 1월 7일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부활하신 이후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집중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서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진 예수님과 동일한 답변을 세 번이나 한 베드로를 의미심장한 시각으로 이렇게 자세히 기록한 것은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둘 사이의 관계 회복 차원이 아닌 훨씬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내 양을 먹이라’와 ‘내 양을 치라’는 당부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은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개인적 관계 개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양’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양들을 고려해서 베드로에게 교훈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한 사람에게 초점을 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양무리를 어떻게 목양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세밀한 돌봄도 있지만 베드로가 목자로서 어떻게 예수님의 양무리를 목양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주셨던 것입니다. 앞으로 베드로가 감당해야 할 목양의 막중한 책임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세 번의 질문과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명령에서 우리는 확실히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마음을 확인하시면서 그에게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하신 것을 볼 때에 목양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밀접한지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확인하셨던 것은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져야만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 어떤 대상보다 더 사랑해야만 그를 따르는 수많은 양무리를 제대로 돌볼 수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분의 양들을 돌보는 목양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쳐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은 양을 돌보는 사역인데 이것은 철저히 예수님에 대한 그의 충성심에서 나와야 함을 강력하게 시사한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자신에게 맡겨진 목양 사역에서 개인적인 야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님을 위한 헌신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 것을 볼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정 하나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쓴 첫 번째 편지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로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라는 당부는 그가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을 교회 일꾼들에게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양했듯이 교회 일꾼들도 그런 마음 자세로 임해야 함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제자들은 개인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드러낸 적이 있었습니다. 서로 경쟁하면서 누가 이인자가 될 것인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목숨을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과연 이들이 예수님의 양무리들을 제대로 목양할 수가 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부르셔서 자신의 양떼를 맡기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고 치라’는 위임을 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도 놀랍고 경이롭게 보일 정도입니다. 이렇게 신임을 받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막중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이들만의 일이겠습니까? 현재 모든 교회가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임이 바로 이것입니다. 개인의 야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주님이 맡겨주신 양무리를 돌보기 위해 서로 봉사하는 책임있는 모습이 교회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교회인 양무리를 위한 헌신을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 “부족하고 연약한 사랑이지만” 2022년 1월 6일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부활하신 이후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의 단독 면담 형식으로 그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셨습니다. 세 번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을 놓고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의 사랑 표현을 할 수 있게 배려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안정감 또는 확실성에 무게를 두는 것이 훨씬 나은 해석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세 번의 같은 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사랑’이란 단어가 원문을 보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들어 전혀 다른 ‘사랑’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자의적인 해석일 수가 있어서 조심스럽게 접근할 사안입니다. 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인가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을 수가 있지만 각 질문에 나오는 차별적인 부분을 발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여겨집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 주목할 것은 ‘이 사람들보다’라는 비교급 사용일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같은 질문에는 이 비교급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비교하면서 사랑의 크기를 알려고 하셨는지를 놓고도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를 드러내면서 주변에 있는 다른 제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도록 하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제자들을 아끼고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이들이 서로간에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면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날 것이라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인데 이 질문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무게로 다가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해야만 하는 독특한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솔직한 베드로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세 번을 부인했던 죄책감도 있었지만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장 잘 아십니다’고 했던 것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사랑이지만 예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는 대목입니다. 사랑이 완벽했다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환경과 상황에 따라 사랑이 위축되기도 했기에 베드로는 죄송한 마음을 담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좀 더 완벽하고 멋진 사랑으로 예수님을 위해 살았다면 후회가 없었겠지만 지금이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던 베드로가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사랑이 오염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전혀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을 하고 싶지만 그것이 하나의 희망에 불과함을 우리는 잘 압니다. 물론 왜곡되기도 하고 오염되기도 하는 사랑이지만 그런 요소 때문에 사랑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비록 오염되었지만 조금도 숨김없이 그 사랑을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도 부족하고 연약한 사랑이지만 그것을 예수님에게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며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가 줄어들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가 가장 큰 지를 놓고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고 주님을 가장 사랑할 수 있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