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흔적” (시편108편 묵상) – 7/9/2020

우리는 자녀가 구김살 없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좋은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다면 별 탈 없이 클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자녀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상처를 받으면서 자랍니다.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녀들은 크고 작은 아픔을 겪습니다. 그것까지도 막아주고 싶지만 부모로서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영역입니다. 하지만 자녀의 마음에 새겨진 아픔의 흔적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의 인격으로서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깨지고 부서지는 고통을 겪으면서 인격이 형성되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성장합니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자녀들이 어느 순간 성숙한 모습을 보일 때 부모는 비로소 인식합니다. 부모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녀들이 자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녀들 안에 있는 깨진 흔적들이 성장의 동력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읽은 시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적들과 싸워도 승리할 것이란 자신감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이 자신감을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로 드러냅니다. 배가 항해를 마치고 부두에 정착하듯이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는 모습입니다. ‘마음을 정하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킨다’는 뜻으로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두겠다는 강력한 의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뢰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시인은 실패한 경험이 전혀 없이 매번 승리만 한 것일까요? 신앙적으로 깨진 흔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깨진 흔적을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고 심적 고충을 드러냅니다. 그에게 신앙적으로 깨진 흔적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승리할 것을 예상했다가 낭패를 당했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이성 정복에 실패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을 전투도 없이 정복했던 이스라엘은 작고 약한 아이성 정도는 쉽게 정복할 것으로 생각했다가 크게 패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인도 과거에 신앙적으로 큰 실패를 겪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고 마음을 정합니다. 깨진 흔적이 있음에도 그것이 신앙적으로 발목을 잡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했음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란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처럼 우리는 깨진 흔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신뢰에 금이 갔다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시대를 이기는 신앙인의 올바른 길입니다.

“사랑의 기적” (시편 107편 묵상) – 7/8/2020

우리는 살면서 기적같은 일들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의사도 포기한 환자가 어느날 완쾌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망해가던 사업이 어느 순간 잘 풀려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간증을 통해 듣습니다. 물론 남에게 일어나는 기적이 왜 나에게는 없는가하는 탄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기적이 필요한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깊은 한숨이 터져나옵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의 마음에 파고드는 유혹이 바로 사행심입니다. 한 방으로 인생의 역전을 꿈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에 투자하면 앉아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허황된 말에 속아 넘아가는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을 너무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사로잡히면 판단력이 흐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보면 수많은 기적들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도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란 말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인생 속에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시인의 목소리가 우렁찹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시인은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한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는 기적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적들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당연히 목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기적을 그분의 인자하심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인자하심’은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기적을 사랑의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말을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항상 기적을 주셔야 한다는 오해입니다. 기적으로 사랑을 확인하려는 잘못된 습관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즉, 기적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기적보다 크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란 문구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그분을 더욱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을 말하면서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는 기대감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가장 귀한 깨달음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단순히 어려움이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진정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렇듯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의 기적은 우리 안에 또 다른 모습의 사랑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사랑의 기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사랑할 때 완성됩니다. 우리 삶에 사랑의 기적이 이어진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더 깊어질 것입니다.

“과거의 교훈” (시편106편 묵상) -7/7/2020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후회스러워도 이미 일어난 일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싶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일에 연연할 때가 많습니다. 과거의 실수와 상처로 신음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원망과 미움의 감정에 사로잡혀 현재의 삶을 그냥 보내버리기도 합니다. 다 잊어버리고 오늘에 충실하자고 마음을 먹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밤잠을 설치고 우울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과거는 오늘의 거울이기에 없어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현재의 삶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시인처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란 마음을 우리는 품고 살아갑니다.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생활에 대한 열망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과거의 잔상이 남아 있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냥 잊고 살자는 결심만으로 없어질 과거의 기억이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실패한 과거의 경험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지금 새로운 마음으로 찬양과 감사의 삶을 살고자 하지만 전에도 이렇게 결심했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자꾸 떠오릅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는 말처럼 우리의 과거는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실패를 거듭했던 좋지 않은 기억이 다시 시작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습니다. 이것이 실패와 회개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꺾이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란 시인의 말에서 우리는 진정한 소망을 보게 됩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가 발목을 잡아도 우리에게는 한없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넓은 사랑이 있습니다. 부르짖는 자의 고통을 들으실 뿐 아니라 실제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시인은 오늘 읽은 시편에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펼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끝없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시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란 시인의 말은 그 울림이 매우 큽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순종에도 구원의 손길을 계속 내미신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과거가 우리에게 상처로 남기도 하지만 커다란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과거 이스라엘을 대하신 모습은 변하지 않는 교훈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실패하더라도 과거에 자기 백성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새로운 소망을 하나님께 둘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란 시간에 과거의 교훈을 마음에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시편105편 묵상) – 7/6/20202

사람의 기억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할 것입니다. 기억력은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메모를 하기도 합니다. 기억보다 기록을 더 신뢰하는 것은 기억에 대한 의심이 어느 정도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지고 과장되고 선택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억은 어떠한가요? 사람의 기억처럼 의심의 대상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안경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매우 단호합니다. 하나님의 기억은 시간과 무관하게 언제나 완벽하다고 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은 하나님의 기억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높이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라고 말합니다. ‘천 대’란 말은 숫자 개념보다 영원성을 피부에 와닿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절대 잊지 않을거야’란 결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기에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시간이 흘러도 그런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그냥 추억 정도로 남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을 기억해도 그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그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억은 실제로 이루어지는 독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기억하신 약속으로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먼 훗날에 이것을 실제로 이루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이 단순한 과거 추억에 그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에는 그것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잊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을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오래 전에 하신 약속일지라도 잊지 않으시고 반드시 그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긴 그분의 백성들입니다. 약속하시면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가 누릴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약속을 받고 나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까지 얼마나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받았는지를 시인이 상세히 묘사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라는 시인의 말은 우리에게 무겁게 와닿습니다. 우리는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는 시인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영원히 기억하신다는 약속을 붙든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을 높일 것입니다.

06/28/2020 교회소식

  1. 기도요청: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주일에 가정 예배로 드리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온라인주일예배: 교회 홈페이지(www.ebctl.org)에 있는 온라인 예배 순서를 따라 주일에 각 가정에서 예배 드리시기 바랍니다.
  3. 매일시편묵상: 시편 묵상할 글들이 목회 칼럼으로 교회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 유익과 경건의 시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4. 성도간의 교제예수님 안에서 성도간의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전화나 문자를 통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5. 현장 예배 연기: Alameda County는 6/19부터 실내 예배를 제한적으로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교회가 방역 문제로 8월에 오픈 여부를 결정한다는 연락을 주었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7월에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06/28/2020 사도행전6:8-15,“제자의 삶”

제목:“제자의 삶” (사도행전6:8-15)

오늘은 스데반의 사역을 통해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은혜의 충만이다. 본문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을 소개한다. 영성을 평가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다. 한 면만을 보고 평가할 수 없다.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평가될 정도로 인정받았다. 과연 은혜 충만은 어떤 뜻일까?

하나는 은혜가 계속 주입되는 삶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고갈되지 않기에 우리는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은혜에 지배를 받는 삶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빠져서 지배를 당하듯이. 이것은 행복한 지배를 받는 상태이다. 우리가 지금 은혜가 충만한지를 점검하자.

둘째, 고난 감수이다. 본문은 스데반이 거짓 증인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스데반의 이미지에 타격을 가하는 공격이다. 메신저를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교회를 향한 공격도 이미지 타격이 많다. 고집불통, 위선자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운다. 매우 치명적인 공격이다. 우리는 고난을 감수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셋째, 마음의 안정이다. 본문은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말한다. 천사처럼 얼굴이 밝고 환하다는 뜻이다. 억울함과 분노의 얼굴이 아니다. 공포로 떨고 있는 얼굴도 아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얼굴이 천사처럼 밝다. 마음의 안정 때문이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마음이 평온했기에 천사의 얼굴과 같았던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은혜가 고난에도 불구하고 더 충만한가? 고난 중에도 얼굴이 빛나는가? 그 정도로 마음의 안정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세계” (시편104편 묵상) – 7/4/2020

과학의 시대에 성경은 여러 가지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창조 이야기입니다. 과학과 창조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과학적 방식으로 증명할 수 없는 창조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에게 이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창조와 과학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하다 교회에서는 창조를, 교회 밖에서는 과학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 안에 과학이 하나의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창조 세계를 연구하면서 발견 또는 발명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을 이성으로, 창조를 신앙으로 이분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입니다. 창조의 시각으로 과학을 연구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과학의 지식으로 창조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날 것이기에 창조를 믿는 이들에게 과학은 매우 중요한 학문입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웅장한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입으셨나이다”고 하면서 자연 세계인 빛, 물, 구름, 바람, 땅에 펼쳐진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과학 이전 시대이기에 시적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적인 표현을 과학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시를 시로 이해해야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란 표현입니다. 과학적 시각으로는 시인의 느낌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아름다운 장면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예로,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는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 올랐으나”란 표현입니다. 얼마나 시적으로 멋지게 표현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작품임을 독자들이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왜 하나님의 세계인지를 시적인 감성으로 절묘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도 자연 세계를 보면서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라고 탄복할 수 있다면 시인의 감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심”을 알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시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즐거워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있는지를 점검할 때입니다. 망가진 세상, 불의와 죄악이 들끊는 세상, 거짓과 더러움이 솟구치는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의 세계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는 시인처럼 우리도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세계를 행복한 눈으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찬양이 넘치는 삶” (시편103편 묵상) – 7/3/2020

최근 21년을 이어온 개그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때 그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했던 적이 있어서 폐지되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아직까지도 시청률이 어느 정도는 나온다고 하지만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사람을 웃기지 못한 결과라는 자조섞인 목소리도 나오지만 시대에 맞는 웃음 코드를 찾지 못했다는 뼈아픈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경제 불안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속시원하게 웃을 수 있는 지점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개그맨들의 끝없는 노력과 땀이 없어서가 아니라 웃음을 회복시키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시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요즘은 그냥 웃을 일이 없다는 냉소적인 시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앙인도 사회의 일원이기에 이런 현상에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읽은 103편은 찬양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내 속에 있는 것들’이란 표현입니다. 이것은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시인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찬양이 한 사람의 심연까지도 파고들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겉모습이 아니라 깊은 내면이 찬양으로 가득차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웃음이 시인의 마음에 가득함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시인의 마음에 찬양이 가득하도록 했을까요? 시인은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시인의 인생 깊숙히 파고드신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시인의 소원 성취를 이루신 하나님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인생으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인은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라고 고백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그릇된 길을 걷는 인생 속으로 들어오셔서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시고 기회를 다시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탄복하는 시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답안지를 달달 외워서 고백한 것이 아닌 삶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신앙 고백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계심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체험에는 시인의 말처럼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에 불과한 우리 인생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수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한계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때 우리의 마음은 찬양으로 가득채워질 것입니다. 웃을 일이 없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는 기도” (시편102편 묵상) – 7/2/2020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무엇이든지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듯이 말입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 꽤 오래전 일이지만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세상이 거꾸로 돌기 시작했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빨리 세상이 돌아가는지 어지러워서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누워있어도 어지럼증은 가라앉지 않고 구토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아내에게 빨리 응급차를 부르라고 소치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떤 도움이든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고통을 겪습니다. 많은 경우 혼자서 감당해야 할 고통들입니다. 병마와 싸우거나, 마음의 깊은 상처로 신음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등 수많은 아픔과 고통 앞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고심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도 고난 중에 있는 한 성도가 쓴 시입니다. 시인은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고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시적으로 표현했지만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다른 상황에서 다른 성격의 고통을 겪지만 뼈가 마를 정도로 마음 고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심하게 마음 고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신앙적으로 표현하는데,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고 말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입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겪는 삶의 아픔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시인은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고 합니다. 이것은 시인의 신앙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갖고 있음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라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 징계를 받는다해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 속에서 그는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뼈가 마를 정도로 심적 고통이 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음을 강력히 외친 것입니다. 실제로 시인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라 기도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언제든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 (시편101편 묵상) – 7/1/2020

부모의 자녀 사랑은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물론 가끔 부모의 왜곡되고 비뚤어진 사랑이 뉴스에 보도가 되기도 하지만 자녀를 위한 희생적 사랑의 가치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만 때론 그것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자녀를 교육적 차원에서 엄하게 대할 때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는 경우입니다. 잘 해주면 사랑하는 것같고 야단을 치면 미워하는 것같은 느낌을 자녀들이 받습니다. 사랑하지만 옳지 않은 일에 대해 꾸짖는 일을 해야 하는 부모의 입장을 어린 자녀들이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대하는 우리로서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다각도로 접하게 됩니다. 어떤 사건과 인물에 대해 하나님이 때론 사랑으로, 때론 정의로 대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해할 지를 묵상합니다.  

시인은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찬양하는 시인의 마음 자세를 보여줍니다. 사랑과 정의에 대한 기계적인 균형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한 것을 노래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적인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어떤 모습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기계적인 균형에 너무 매달린 것은 아닌지, 또는 한 쪽에 치우쳐 편향된 시각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논쟁적일 수 있지만 겸손한 자세로 대해야 할 거룩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완벽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주제를 대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시인은 사랑과 정의를 찬양하면서도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바라는 태도입니다. “완전한 길을 주목”하고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고자 하지만 한 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매순간 사랑과 정의를 저울추에 달듯이 균형잡기보다 상황별로 판단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시인은 정의가 필요한 상황에서 “나는 비천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는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겠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겠다고 결정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악과 타협하고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물론 사랑 없는 정의만을 외친 것은 아닙니다. 무자비한 보복을 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악을 용납하고 죄와 손잡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로서 어떤 상황에서 사랑을 또는 정의를 내세울지 애매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시인의 고백처럼 “나는 사랑과 정의를 노래”하겠다는 마음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