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8/01/2021 갈라디아서 1:6-7, 신앙 성장(23)

제목: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나요?” (갈1:6-7)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은 선물의 관점으로 은혜를 설명합니다. 엡2:8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며 선물 받은 사람의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에 은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은혜는 신앙 성장의 토양이기에 우리는 은혜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불행히도 이 은혜를 받았음에도 여기서 떠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 증거는 다른 복음을 이 교회가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따랐던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변질된 것이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변질되었느냐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다른 것을 섞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에다 율법을 섞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면 율법으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율법 아래로 들어가 버리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혼합주의는 이처럼 은혜로 시작해서 행위로 마치게 하는 형태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은혜의 복음은 처음과 마지막까지 은혜가 다스리게 합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도록 하는 것이 은혜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나면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붙들어야만 우리는 은혜에서 떠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소식 8/01/2021

  1. 실내예배: 매주일 오후 1시에 있습니다, 예배 시간 10분 전에 오셔서 기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2. 2021년도 표어:은혜 속에 성장하는 교회”(골로새서1:6)
  3. 요한복음 묵상글: 매주 월-금까지 전체 카톡을 통해 묵상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 경건을 위해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4. 오늘의 성경읽기: 매일 세 장씩 성경읽기에 적극적 참여 바랍니다.
  5. 토요새벽예배: 매주 토요일 아침6시에 토요새벽예배가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청장년부여름수련회: 수련회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에 감사드립니다.
  7. 유스현장모임: 이번 주일부터 교회에서 모임을 시작합니다.
  8. 예배찬양: 찬양과 함께 예배가 시작되니 미리 오셔서 기도로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9. 정기카운슬: 이번 주 수요일 오후 7시에 zoom으로 모이겠습니다.
  10. 친교: 이번 주일은 이영신 권사님이 간식을 준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2절-24절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생기는가?” 2021년 7월 30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 죄를 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통해 세상과 화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 일을 성취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저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한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두 갈래로 나뉜 모습을 보였습니다. 환영과 거절이 그것입니다. 환영의 의미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거절의 모습은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해 많은 애정을 나타내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란 말과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란 말은 그의 애정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란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세상에 가감없이 드러내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자신을 감추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가림막으로 가려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설교와 가르침, 기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지만 세상은 그를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환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로 표현하셨습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이지만 결국 그를 환영하는 이들만이 그의 가치를 제대로 인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 비해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처럼 그를 거절하는 이들은 그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드러내고 있었지만 세상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을 지키는 이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더욱 챙기실 것입니다. 그의 돌봄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느냐에 대해 우리는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거처’란 집에 상시적으로 거주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관처럼 임시적으로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영원토록 머물 공간으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돌봄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친밀한지를 드러내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바로 이런 돌봄을 받을 것입니다.

가룟인 아닌 유다가 ‘세상’과 ‘우리’를 비교했는데, 예수님에 따르면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말을 거절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완전히 끊겨 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거주하는 집이 되어 그의 돌봄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함께 생활하기로 결정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돌봄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우리와 세상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나타내주는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집입니다. 이는 우리를 통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택하셔서 그의 거처로 삼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다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이를 안다면 우리는 더욱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충실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창문 역할을 우리가 맡았다면 우리는 이 창문을 더욱 더 깨끗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지킨다면 이 창문의 깨끗함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1절 “사랑의 깊이를 더해간다면” 2021년 7월 29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우리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외로운 한 쪽만의 사랑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요14:15)이란 말로 이것을 차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듯이 그들도 예수님을 사랑해야 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렇듯이 사랑은 서로 주고 받아야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쪽만의 일방적인 사랑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또한 사랑이 형식에 불과한 말장난에 그치는 것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켜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이 껍데기에 불과할 수가 있기에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증명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다시 언급하면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은 이렇듯이 순종의 모습으로 그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도 또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모습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다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어떤 축복을 누리게 될 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랑이 두 배가 되어 되돌아온다는 이 약속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게 될 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게 될 인생이 얼마나 행복할 지를 그려볼 수 있게 합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자녀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부모의 사랑이 온 집안을 가득채우면 그 안에서 지내는 자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의 말투, 표정과 몸짓에 묻어나는 사랑의 언어가 아이들의 품성에 녹아듭니다. 부모의 사랑이 실제로 자녀에게 나타나면서 생기는 행복 지수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다는 이 약속은 이미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어느 정도로 풍성할 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사랑의 깊이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 속으로 얼마나 깊이 파고들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란 약속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 더욱 풍성히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는 말을 바울은 로마 교회에 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신앙인들이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이 누릴 축복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신 분이 그 무엇인들 아까워하시겠느냐란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을 채워주고 안전하게 살게 해주며 부족한 것이 없이 누리도록 해준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는 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인생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실체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갈수록 깊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것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9절-20절 “살아 있는 연합을 깨닫는다면” 2021년 7월 28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알리시면서도 다시 그들에게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어떤 형태로 돌아오겠다는 것인지에 대해 예수님은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셨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나를 보리니”가 그것입니다.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란 것과 대조적입니다. ‘본다’는 이미지는 물리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란 것은 실제적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는 존재로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들은 눈으로 그를 볼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 부활을 가리키는데, 아직 그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기에 제자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장차 그들 앞에서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될 날이 오면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비로운 연합인데, 살아 있는 관계를 형성할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너희가 알리라’는 말은 의미심장한데, 단순히 머리로 어떤 정보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인격 전체가 동원된 깨달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과의 온전한 하나됨을 전인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고 하신 다음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이라 하면서 둘 사이에 살아 있는 연합이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이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서로 하나된 모습을 보인다는 놀라운 진술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면서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 것은 이 연합이 그들의 삶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두 인격체가 연합을 이룬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는 하나의 그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장면인데,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아담의 표현처럼 인격체의 연합은 기적 그 자체입니다. 이를 바울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해석했는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엡5:25)란 부분은 이 연합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신 점 또한 이 살아 있는 연합이 일어날 것이며 그들이 이것을 충분히 인지할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한 부분이 서로 맞는 정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의 연합은 인격 전체가 동원된 완전한 하나됨을 가리킵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그는 제자들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는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비록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일지라도 그와의 살아 있는 연합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는 말로 이 신비한 연합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경험할 예수님과의 연합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드러내줍니다. 그의 죽으심 뿐 아니라 그의 부활에 동참하는 이 살아 있는 연합을 경험한 자라면 이제부터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이로서 그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6:11)로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살아 있는 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연합은 우리 삶의 동력이며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 것입니다. 이 연합을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도 그에 맞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우리는 예수님과의 연합으로 인한 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 “버림받은 것이 아니기에” 2021년 7월 27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오랜 시간 함께 하던 사람이 떠나게 되면 그 빈자리는 커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의 비중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면 그 빈자리가 메워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육신적으로 떠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빈자리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메워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채우지 않는 이상 그 무엇으로도 그의 빈자리를 메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신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고아처럼 외롭지 않게 해주신다는 단순한 위로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는 삶이 되지 않도록 이끌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잠시동안 떠나 있을 뿐 다시 돌아와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그들은 40일 동안 그와 함께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려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한 이후에 과연 그들은 본문의 약속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을까요? 고아처럼 버려졌다고 생각했을까요?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살아가지만 육신적으로 함께 하지 않는 예수님의 빈자리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성령의 임재로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의 사역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여전히 그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부모 없는 고아와 같은 심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동행으로 인해 영적인 충만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그들만의 특권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절대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진정한 행복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삼촌 집으로 갈 때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하나님이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도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홀로 버려진 것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지만 인간적인 외로움에 치를 떨 정도로 심적인 통증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고아처럼 버려지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을 믿는다면 삶에서 오는 인간적인 공허함과 외로움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외롭지 않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간적인 외로움에 빠져 그릇된 방식으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한다면 주님의 자리는 우리 안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머무시는 곳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아처럼 버려진 것같은 느낌이 들더라도 우리는 다른 것으로 그 느낌을 지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시도들이 우리로 더욱 주님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너무 힘들어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다른 것으로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려 하지 말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버림받은 이들이 아닙니다. 버림받을 수가 없을 정도로 축복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런 확신을 갖고서 모든 인간적인 외로움과 공허함에 맞서 싸운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의 채워주심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17절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 2021년 7월 26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는 육신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할 날이 올 것임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그런 날이 바로 눈 앞에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자신은 떠나지만 또 다른 보혜사가 올 것이며, 그가 오시면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란 약속입니다. 영원히 함께 한다는 의미를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로 부연설명을 하셨습니다. ‘너희와 함께’와 ‘너희 속에’란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는 동행을, ‘속에’는 머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성령이 예수님처럼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시듯이 성령도 그렇게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절대 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이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이는 오직 제자들만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과 성령의 관계를 이렇게 풀어낸 적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세상이 성령의 일을 어리석게 여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이 성령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할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고전1:12)라고 하면서 성령을 받은 이들은 세상의 영에 지배되지 않을 것임을 전했습니다. 세상은 성령과 적대 관계이고, 성령을 받은 우리는 세상과 적대 관계를 형성한다는 이야기는 성령과 함께 하는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 수 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서 우리는 성령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과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란 약속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리킨 것입니다. 성령의 동행은 세상의 영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이렇듯이 새로운 피조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특별한 정체성을 확고히 해줍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은 ‘또 다른 보혜사’로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진리의 영임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실 뿐 아니라 영원토록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진리의 영으로 거하시기에 거짓과 죄악의 길로 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거짓된 영과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은 절대 세상의 영과는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마치 성령을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막강한 힘인 것처럼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처럼 만들면 안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공한 사람이 아닌 진리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진리의 길로 이끌기 위해 성령이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진리의 길을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진리의 길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이 약속을 받았기에 우리는 오늘도 성령의 사람으로 힘있게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교회소식 7/25/2021

  1. 실내예배: 매주일 오후 1시에 있습니다, 예배 시간 10분 전에 오셔서 기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2. 2021년도 표어:은혜 속에 성장하는 교회”(골로새서1:6)
  3. 요한복음 묵상글: 매주 월-금까지 전체 카톡을 통해 묵상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 경건을 위해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4. 오늘의 성경읽기: 매일 세 장씩 성경읽기에 적극적 참여 바랍니다.
  5. 토요새벽예배: 매주 토요일 아침6시에 토요새벽예배가 있습니다. 개인과 가정,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 청장년부여름수련회: 이번 주 금요일부터 주일 아침까지입니다. 주의 은혜가 충만한 수련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7. 유스현장모임: 다음 주일(8/1)부터 교회에서 모임을 시작합니다.
  8. 예배찬양팀: 다음 주일부터 찬양팀이 주일 예배 시간에 찬양을 인도합니다. 찬양팀은 12시30분까지 오시기 바랍니다.
  9. 친교: 이번 주일은 이계문 집사님 가정이 간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주일설교 7/25/2021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요16:33)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 현실은 전쟁터일 때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있을까요?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평안을 체험하고 있나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유는 제자들에게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에도 이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예수님은 지극히 평안하셨는데, 그들은 안절부절 못할 뿐만 아니라 평온한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풍랑 때문에 평안을 잃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태풍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셨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되면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평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약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담대하라’는 처방전을 주셨습니다. 과연 제자들은 어떻게 담대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환난을 주는 세상에서 담대할 수가 있게 합니다. 우리는 담대한 마음으로 환난 한 가운데서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 체험할 수가 있으며 환난 앞에서 담대할  때 더욱 강력해집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때문에 담대해질 수가 있습니다. 담대한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면 신앙 성장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 “믿음, 사랑, 그리고 순종” 2021년 7월 23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제자들 곁을 떠나면서 예수님이 남긴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위로인 동시에 도전입니다. 마음의 근심을 풀어주는 의미로 ‘나를 믿으라’고 하셨기에 위로입니다. 또한 아버지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로서 ‘나를 믿으라’고 한 것이기에 도전입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수준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를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느냐에 대해 오늘 본문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과 사랑이 얼마나 밀접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나를 믿으면’을 ‘나를 사랑하면’으로 바꿔쓸 수가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을 사랑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이유는 이 둘을 분리시키려는 경향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믿음과 사랑을 분리시키면 아주 이상한 신앙 형태가 되고 맙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기괴한 신앙 형태를 보여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상이라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우상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제자들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사랑과 긴밀히 연결시키면서 이것이 결국 무엇으로 증명되어야 하는지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로 설명하셨습니다. 사랑을 순종으로 증명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의 말을 지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사랑과 순종을 끊으려는 잘못된 시도를 근절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허용하면 사랑과 순종은 함께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랑해도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태도를 얼마든지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의 말을 전혀 반영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진술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사랑과 순종의 긴밀성은 더욱 강조되어야 할 사안입니다. 사랑한다면서 자기 주장만을 펼치는 모습이 신앙인에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부모를 사랑한다고 하는 자녀들이 부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하려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믿음만을 말한다면 이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믿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믿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믿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사랑이란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듯이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이의 말을 가장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사랑하면서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는 인격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가 하신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말씀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무슨 뜻인지를 헤아리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 삶에 반영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는 절대적 잣대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우리로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