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장5절-8절 “성령의 사람” 9/25/20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고정 관념 깨기는 무척 힘든 일입니다. 이미 굳어진 신념은 바위와 같아서 부서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신념이 들어올 수 있기 위해 기존의 틀을 깨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의 선생으로 쌓아올린 명성과 구약 성경 전문가로서의 그의 신념을 깨뜨리기 위해 예수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십니다. 첫 일성이 ‘네가 거듭나야 한다’입니다. 이것은 니고데모의 철옹성 같은 기존의 신념에 금이 갈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그의 거부 반응은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 번째 강펀치를 날리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에 대해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거듭남이 곧 ‘성령으로 태어남’을 뜻하는 놀라운 반전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태로부터 태어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하십니다. 니고데모가 어머니 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고 반박한 것은 육의 영역에서 이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부인하지 않으시면서 니고데모를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것은 ‘영으로 난 것은 영’이란 새로운 시각입니다. 성령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냥 말로만 그렇게 주장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음을 예수님은 강력히 외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 단정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니고데모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바람의 특성을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것과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자연 현상입니다. 이것은 과학의 시대가 아니라해도 누구든지 알고 있는 매우 상식적인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성령으로 난 자’에 적용하십니다. 성령은 마치 바람과 같이 일하십니다. 성령은 ‘임의로’ 움직이십니다. 법칙대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즉, 사람이 이렇게 해야만 성령이 움직이신다는 법칙이 없습니다.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역사하시면 그 결과로 알 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그 과정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결과로 그 사실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은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방법과 과정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듯이 성령의 일하심은 신비로움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거듭남’이란 단어가 아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입니다. 거듭남이란 단어에 너무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그 단어에 상상력을 가미해서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고 적용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고전2:12)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은 계속 생길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들이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성령이 일하신 결과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면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실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우리의 방식입니다.   

요한복음3장1절-4절 “더 깊은 영적인 세계로” 9/24/2020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너무 익숙한 이야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 흥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각을 바꾸면 깊이 있는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는 보물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와 같습니다. 하지만 너무 익숙한 이야기가 됨으로 인해 영적인 보물을 발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에는 생각해 볼만한 많은 영적 진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갖춘다면 그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읽을 때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데’로 시작합니다. 저자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이 사람이 등장하는지 봐야 합니다. 2:23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니고데모였던 것입니다. 저자는 그를 ‘바리새인’과 ‘유대인의 지도자’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구약 성경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던 사람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최상위층에 속한 신분을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고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는 용기를 내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방문합니다. 그의 사회적인 위치 때문에 밤 시간대에 찾아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에게서 온 선생으로 인정합니다. 그 이유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고 밝힙니다. ‘이 표적’은 2:23의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가리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보고 싶었고 자신이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 자신도 이스라엘의 선생인데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으로 인정하다니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깊이 신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바리새인이면서 유대인의 지도자인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예수님에게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2:25에서처럼 예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어찌보면 칭찬들어도 괜찮을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 때문에 둘 사이의 대화는 길어집니다. 또한 니고데모의 속마음이 어떠한 상태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으로 인정했지만 속사람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거듭남’이란 한 마디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듭남’이란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신 것은 절묘한 한 수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니고데모는 이 단어에 걸립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님의 ‘거듭남’ 이야기를 그는 ‘사람은 절대로 거듭날 수 없다’고 응수한 것입니다. 둘 사이의 대화가 논쟁으로 격화되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정반대의 시각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의 영적 시력이 전혀 없음이 드러난 순간입니다.

예수님 앞에 선 니고데모의 영적 시력은 제로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했지만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영적 시력이 제로 상태인데 여전히 뭔가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조금 시력이 생겼다고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는 않고 있나요?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계십니다. ‘거듭남’ 외에 다른 단어로 우리의 부끄러운 영성을 드러내실 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자랑하거나 칭찬듣기 보다 더 깊은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요한복음2장23절-25절 “표적과 믿음” 9/23/2020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단어, 구, 절로 이루어진 문장을 이해할 때 전후 문맥을 고려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문맥과 상관없이 단어와 문장을 이해하면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킬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문맥을 고려해서 읽어야 합니다. 23절과 24절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24절이 설명해줍니다. 저자는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라면서 23절의 믿음의 반응을 의심의 눈으로 봅니다. 표적을 보고 믿은 것만으로 충분한가란 의구심을 내비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적들을 보고 사람들은 믿음으로 반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은 가식적으로 믿는 척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표적의 진실성과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임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23절에서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지만 24절은 그것과 반대되는 듯한 예수님의 행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표적을 보고 믿은 이들을 예수님의 시각으로 다시 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을” 정도로 뭔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좀 더 큰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저자는 1:12에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특별한 지위를 얻는다는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2:23의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요? 2:11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제자들도 그를 믿었다고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맥을 고려하면서 읽다보면 저자가 사용한 ‘믿음’이란 단어의 의미를 재해석하게 됩니다. 같은 ‘믿음’이란 단어를 사용해도 문맥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즉, 2:23의 ‘믿음’은 1:12과 2:11의 ‘믿음’과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2:24의 예수님의 반응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2:23에서 표적을 보고 믿은 유대인들을 가짜 또는 위장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표적의 진실성과 그것을 행하신 예수님의 특별함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신뢰를 얻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표적을 보고 믿은 이들을 신뢰하지 않은 것은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는 예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경각심을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끼리는 표적을 보고 믿었든 다른 것을 보고 믿었든 믿는다고 말하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겉으로 드러난 믿음의 반응만이 아니라 마음 속까지 들여다보시면서 판단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우리 마음을 아신다는 예수님의 능력에 시비를 걸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의 판단으로 어떤 사람의 믿음의 진실성을 규정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두 세명의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야 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매우 단호한 어조로 예수님은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예수님의 표적 뿐 아니라 사람의 속마음까지도 아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이것이 진정한 신앙임을 저자는 강조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저자는 묻고 있습니다. 우리도 속마음을 숨긴채 겉으로 드러난 믿음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적(기적)을 보고 믿을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동원해서 예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는지를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마음으로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 믿어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우리는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속마음까지 다 동원해서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요한복음2장17절-22절 “진리는 살아있다” 9/22/2020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을 갖고 살다가 그것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거짓이 진실로 둔갑할 때에는 과연 끝까지 진실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란 회의가 밀려오게 됩니다.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왜곡해서 공격할 때에는 비참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세상이 두려워집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진리를 끝까지 붙들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매우 위태로워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의 이야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가지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참 메시아라는 점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들이 보기에도 당황스러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과격한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채찍을 사용해서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쫓고 환전해주는 사람들의 상을 엎어버리신 것입니다. 매우 충격적인 장면인 것은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문제는 더욱 커집니다. 성전 안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의 공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더 심각한 장면이 이어집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면서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따집니다. 이것은 권위와 관련된 질문입니다. 이것을 행할 권위가 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표적을 보여주어야 그들이 인정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없습니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무슨 표적을 보여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는 함정을 파놓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려면 그들이 성전을 먼저 헐어야 합니다. 그 뒤에 예수님이 사흘만에 그것을 다시 세우시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앞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뒤의 말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렇게 공격합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이것은 그들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정신이 아니거나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과 비교할 때 성전 논쟁은 어찌보면 말다툼에 불과할 지 모릅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이 없이 말로만 성전을 헌다느니 사흘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느니 싸움을 하는 듯이 보입니다. 증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실 공방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헐 일이 없기에 사흘만에 다시 지을 수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고발한 자들은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26:61)는 말로 공격하게 됩니다. 그들은 교묘한 말로 예수님의 의도를 왜곡시켜서 공격한 것입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본문이 전합니다. 저자는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제자들은 이 의미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깨닫게 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됩니다. 제자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공격 앞에서 예수님의 진리를 붙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살아서 움직입니다. 당장은 오해받고 왜곡될 수 있지만 진리는 마침내 승리합니다. 진리되신 예수님을 붙든다면 세상의 어떤 공격 앞에서도 당당히 이길 수 있습니다. 당장 증명하기 어려워 억울한 말을 들을지라도 진리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냅니다. 예수님을 진리로 섬기는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장 12절-16절 “본질 흐리기” 9/21/2020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쫒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융통성이 있다는 말은 보통 칭찬으로 들립니다. 반면에 고지식하다는 말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옛 것을 지키려고 할 때 듣는 말이 ‘고지식하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변해서는 안되는 가치를 지킨다면 이것 또한 융통성이 없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이야기는 융통성이 없는 예수님의 고지식한 모습으로 읽힐 수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시대적인 요구에 맞춰 도입한 새로운 제도를 예수님은 온 몸으로 거부하셨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성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이 가까왔을 무렵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노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책상을 엎으셔서 돈을 바닥에 쏟으셨습니다. 이것은 폭력적인 행동이었을까요? 그렇다면 교회도 언제든지 불의에 맞서 폭력을 사용해도 되는 것일까요?

당시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파는 것과 돈을 바꾸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매번 성전에 오실 때마다 이와 같이 행동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의 행동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그 전에도 이런 장면을 많이 보셨지만 이번처럼 행동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셨을까요? 비둘기 파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인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의 과격한 행동으로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것을 강력히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전이 장사꾼의 돈벌이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집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사하는 집으로 변질시켰습니다. 물론 그들도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 권위자들의 허락 하에 합법적으로 희생제물을 팔고 돈을 바꾸는 일을 했다고 말입니다. 제사(예배)를 드리기 위해 온 순례자들을 돕는다는 숭고한 정신을 모독하지 말라고 당차게 따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볼멘 소리는 본질 흐리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어떤 이유를 들어 정당성을 피력해도 결국 장사한 것입니다. 이윤을 남기려는 목적으로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뚫고 추상같은 목소리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외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는 외침은 이번 한 번 뿐이 아니라 계속해서 외쳐져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행할 거룩한 일들을 위해 이런 저런 방법들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익을 남기려는 사람의 욕망이 얼마든지 꿈틀거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 집이라는 거룩한 장소에 장사라는 세속적인 욕망이 얼마든지 개입될 수 있습니다. 모양과 형태,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거룩한 예배에 인간의 더러운 욕심이 덧칠해져 신앙의 순수성이 깨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을 깨끗이 하신 예수님의 행동에 담긴 깊은 의미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라는 유혹 앞에서 하나님의 집이란 거룩한 진리로 맞서야 합니다. 우리의 만족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예배당에 오지 않도록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마음가짐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는 세속적인 욕망과 이기적인 마음과 자기 만족이라는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뼈를 깎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흐리려는 모든 유혹을 하나씩 뽑아내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자로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노력을 꾸준히 한다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집이라는 예배의 본질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소식 9/13/2020

  1. 기도요청: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주일에 가정 예배로 드리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온라인주일예배: 교회 홈페이지(www.ebctl.org)에 있는 온라인 예배 순서를 따라 주일에 각 가정에서 예배 드리시기 바랍니다.
  3. 매일 요한복음 묵상: 매주 월-금까지 전체 카톡을 통해 묵상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 유익과 경건의 시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4. 성도간의 교제예수님 안에서 성도간의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전화나 문자를 통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5. 실내예배금지: Alameda County는 실내 예배를 금지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이 더욱 증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하루 빨리 정상화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일설교 9/13/2020 사도행전9:19-25 “달라진 삶”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큰 충격 속에서 삼 일동안 금식 기도하던 사울은 몸과 마음이 회복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유대인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의 과거를 안다면 그의 달라짐이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장 부끄러워했던 사람입니다. 신성 모독과 십자가 죽음만으로도 충분히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목숨 걸고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도 달라지게 만들었나요?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 고백의 무게를 그는 너무도 크게 느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너무 익숙해진 말이라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것은 아닌가요? 말의 무게는 사람마다 얼마든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말은 익숙해지면 식상해지고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란 말도 그렇게 여겨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자랑이 커지면 어떤 난관도 우리는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장벽도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사울은 유대인들의 공격 앞에서 오히려 힘을 더 얻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어려울수록 예수님을 더 의지하고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가 갖고 있어야 할 영적인 파워입니다.

요한복음2장 1절-11절 “신뢰 쌓기” 9/18/2020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불가능한 일을 해낼 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온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가 어느날 완치 판정을 받는다면 당사자는 물론 가족 전체가 하늘을 나는 기분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적을 체험하고 싶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물은 물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일 뿐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과학적으로 물이 포도주가 될 방법은 아직까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를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니 무조건 믿자고 하면 되지만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물이 포도주가 되지 않느냐는 반문이 떠오릅니다. 저자는 왜 딱 한 번 물이 포도주가 된 것처럼 기록하고 있을까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물보다 포도주가 더 귀했다면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이 기적은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본문에서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속임수나 거짓이 가미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화학물질을 첨가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취한 것도 없습니다. 비어 있는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채웠고 곧바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았고 하객들은 만족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궁금한 것은 언제 물이 포도주가 되었느냐입니다. 본문에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하는데, 하인들은 어느 시점에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인지 알았지만 그 외 사람들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이상의 추측은 우리의 자유이나 본문은 침묵할 뿐입니다. 아무튼 신비로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인들이 따랐고 결혼식장에 있는 모든 하객들은 최상의 포도주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모든 것을 망칠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 해피앤딩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결국 예수님에 의해 모든 사람이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기적을 기록한 이유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이 기적을 통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그를 믿은 것입니다. 우리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일이 과연 가능하냐에 집중하지만 저자는 전혀 다른 것에 우리의 시선을 돌립니다. 이 기적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봐야 하는지를 저자는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보다 더 약한 기적이라도 보여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이유로 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의 영광과 제자들의 믿음이 그것인데, 우리는 이 둘의 함수 관계를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 된 것에 놀란 하인들, 이유야 어쨌든 좋은 포도주 맛을 즐긴 하객들과 달리 예수님의 영광에 믿음으로 반응한 제자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 기적을 통해 재확인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는 것은 더 깊이 예수님을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앞 장에서 제자들은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는 이 기적을 통해 더욱 확신을 갖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인격적 반응으로 더 깊은 신뢰를 쌓는 행위입니다. 전보다 더 신뢰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믿음의 반응입니다. 맹목적이거나 묻지마식 믿음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통해 더 깊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제자들은 이 기적을 통해 더 깊은 신뢰가 형성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의 삶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일들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지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1장 43절-51절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9/17/2020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 속을 알기 어렵다는 말에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의 속마음도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시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평가는 단지 외적인 모습만 보고 내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 얻은 것도 아닙니다. 빌립이 미리 정보를 제공해서 이렇게 평가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는 말씀을 통해 그를 눈여겨본 시기를 밝히셨는데, 이것만 가지고 어떻게 그의 속마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는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본문은 침묵하지만, 무슨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면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평가는 무색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던 나다나엘을 본 것만으로도 그의 속마음을 아신 것에 놀란 나머지 나다나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아마도 하나님이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구약 성경의 말씀이 떠오르면서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알아준 것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인정한 것이 아닙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속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는 나름대로 깨끗한 삶을 산 것에 대한 자긍심을 충족시켜준 예수님께 감격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칭찬은 커녕 비난과 악한 소문으로 나다나엘을 괴롭힐 때 예수님이 오셔서 위로해주신 것에 마음의 문을 연 것이 아닙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을 평가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되묻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예수님이 해주신 것에 대한 놀라움을 표현한 것일까요? 평소 듣고 싶었던 칭찬을 예수님이 해주셔서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물은 것일까요? 아마도 당시 어떤 유대교 선생들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평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란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빌립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를 말하자 평소의 생각이 여과없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출신이라면 그 누구도 별 볼일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나다나엘이 지금 예수님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란 말은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오던 모든 확신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기에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던 그릇된 확신이 근본적으로 깨지는 순간입니다. 그의 심적인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로 드러낸 것입니다.
심적으로 지진이 일어난 상태에서 단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던 자신을 본 것만으로 자신을 알아본 예수님에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나사렛 출신인 것만으로 평가절하했던 예수님을 이제는 하나님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이제는 예수님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도 얼마든지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그릇된 생각에 함몰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너져야 우리도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적인 변화가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만을 위한 삶을 건설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이루어기를 소망하면서 묵묵히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42절 “우리가 만났다” 9/16/2020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은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소문난 맛집을 찾아다니며 소위 먹방을 하는 유튜버들이 있습니다. 시청자들은 간접 경험을 통해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같은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찾아가 맛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물론 먹방을 하는 분들과 차이가 나는 음식 맛에 실망을 할 수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 사람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는 일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직접 체험한 이들의 열정에 좌우됩니다. 혼자만의 즐거움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전달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본다면 내용이 훨씬 쉽게 다가올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29절에 이어 36절에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증거합니다. 이번에는 그의 제자 중 두 사람이 그 이야기를 직접 듣습니다. 스승을 믿고 따르던 두 제자는 특이하게도 스승의 말을 듣고 곧바로 예수를 따릅니다. 그들이 스승의 허락을 받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스승이 미리 제자들에게 예수를 따르라고 권면한 내용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직접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정체를 말합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그들에게 뭔가 결정하라는 메시지가 되었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른 행위는 스승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40절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이란 말을 언급함으로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열정이 자신의 두 제자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왜 나를 따르느냐’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어디 계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면서 자신의 거처를 그들에게 공개하십니다. 그들은 ‘그 날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합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그와 함께 거하는 이 모습은 평범해 보이는 듯 하지만 결코 사소한 일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신령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동거는 이 두 사람에게 가장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 준 인생 최고의 순간입니다. 이것을 두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는 형제인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을 하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그와 함께 머물면서 보고 들었습니다.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이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드레의 증언인 ‘우리가 만났다’는 말은 그가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그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을 보고 들었던 것입니다. 스승인 요한의 증언인 ‘하나님의 어린 양’이 무엇을 뜻하는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확인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자신있게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찾아오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신비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물리적인 방식이 아닌 영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이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는 진실된 고백이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열정이 생겨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살리는 가장 멋진 모습입니다. 또한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삶이 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의 공동체로서 그와 함께 사는 것을 보고 배우는 열정으로 가득채워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