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표어: “함께하는 신앙, 함께가는 교회”(엡2:22)
- 주일예배: 예배10분전에 오셔서 기도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토요새벽예배: 매주 토요일 아침 6시에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영적 무장을 하는 귀한 시간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 주중새벽예배: 매주 화요일-금요일 새벽5:30에 본당에서 있습니다.
- 친교 담당: 이번 주일은 목회자가정, 다음 주일은 드보라 구역입니다.
- 전교인야외예배예고: 전교인 야외예배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일시: 6/11(주일) 오전11시, *장소: seven hills park(384 Florence St. Union city, CA 94587).
- 성찬식예고: 다음 주일(6/4) 낮 예배 시간에 성찬식이 있습니다.
- 장년 성경공부: 장년부를 위한 성경공부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목요반 또는 토요반 둘 중 하나에 오시면 됩니다. *개강: 6/8(목) 오후7시-8시 또는 6/10(토) 오전 7시-8시 *교재: “그리스도와의 교제” *장소: 교회 친교실
- 중보기도팀: 이번 주 수요일 오전11시에 교육관에서 모입니다.
- 카운실 모임: 이번 주 수요일(31일)에 카운실 모임이 있습니다.
Author: EBCTL
찬양팀 워크샵
예배부와 찬양팀을 위한 영성훈련입니다. *일시:5/20(토) 오후7:30-9:30, *강사: 정현섭 목사(오클랜드감리교회),*장소: 교회 본당


주일설교 5/28/2023 “구원받기 전 우리의 모습” (엡2:2-3)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본문2-3절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세상의 풍조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세상 풍조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세상의 모든 문화와 사상을 말합니다. 세상은 겉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영적 눈으로 보면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 풍조를 따르지 않습니다. 둘째, 악한 권세와의 관계입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사탄,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악한 권세와 맞서 싸웁니다. 끊임없이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셋째, 우리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죄악된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마음이 부패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부패했다고 하셨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구원받고 나면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됩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모습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육체의 본성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 풍조와 악의 권세, 그리고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능력으로 세상을 새롭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주일설교 05/21/2023 “영적 죽음에서 살아나다” (엡2:1)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바울은 이런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데, 죄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부정적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복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영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위한 바울의 처방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예전의 영적인 상태를 잊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처방전입니다. 그렇다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선,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신체적,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서 발생한 죽음인데,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입니다. 로마서는 한 사람인 아담을 통해 이 죽음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영적 죽음은 인류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역주행하는 차를 몰고가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브레이크 없이 내리막길을 운전하는 차와 같습니다. 왜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일까요? ‘너희의 허물과 죄로’에서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영적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로마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고, 야고보서는 ‘죄가 장성한즉 사망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죄로 인해 영적 죽음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할까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그들이 살아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임한 곳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이 능력으로 살아날 수가 있습니다.
주일설교 5/14/2023 “교회의 자존감” (엡1:20-23)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 20절,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는 이를 증명합니다. 부활, 승천에 이어서 전우주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위상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입니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자존감이 무엇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교회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에 집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능력에 주목해야 합니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란 대목은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줍니다. 원수에 대한 승리를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신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능력 하나로 우뚝 세워진 곳입니다. 교회 구성원의 능력이 미력해도 문제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입니다. 몸과 머리는 하나입니다. 둘 사이에 분리, 분열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머리와 몸의 관계로 온전히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서 끊을 존재는 이 땅에 없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입니다. 그 충만함에서 교회는 수많은 혜택을 누립니다. 특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로부터 교회는 끊임없이 공급을 받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교회는 세상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주일설교 4/30/2023 “성도가 된다는 것” (엡1:18)
오늘은 영적 시력이 좋아지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또 다른 요소 하나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는 부르심의 소망이었고, 이번에는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입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의 영광스러움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불려지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의 기업인 성도입니다. 바울은 성도의 영광이 얼마나 부요한지를 알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선, 성도의 영광스러움을 누리지 못하는 신자의 모습을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확인하겠습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 모두 다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포기하거나 모르고 지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그 영광을 포기했고, 함께 지낸 큰아들은 영광을 전혀 몰랐습니다. 이 시대 신자들도 여기에 속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도의 영광의 풍성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시편23편에 나오는 신자가 이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둔 신자의 행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됨의 영광이 얼마나 부요할지를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성도됨의 영광을 제대로 누릴 수가 있을까요? 요한복음15장에 나오는 하나의 비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성도는 아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됨의 영광과 풍성함은 철저히 예수님 안에 있기에 가능합니다. 우리가 성도의 영광과 부요함을 누리려면 예수님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4/23/2023 “부르심의 소망” (엡1:18)
영적 시력이 좋아지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영적 변화가 있습니다. 바울은 총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부르심의 소망’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입장과 우리의 입장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에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우리를 적극적으로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 산을 다 뒤지는 목자의 심정과 같습니다. 찾을 때까지는 중도에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내십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부름 받은 우리는 실패 확률 100%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보면 실패 확률이 높은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절대로 실패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입장에서 부르심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의 부르심에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거절은 저주입니다.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할 정도로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부르심의 통로는 말씀과 기도인데,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소명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소명 의식입니다. 이 소명 의식이 강할수록 신앙이 강해집니다. 소명 의식이 약해질수록 신앙도 약해집니다. 바울 사도는 소명 의식이 가장 강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소명감이 그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얼마나 놀랍게 큰 지를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4/9/2023 “부활의 기쁜 소식” (고전15:12,19)
기독교 복음의 두 축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부활은 기쁜 소식으로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 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곳이 고린도 교회입니다. 부활 소식은 전파되어야 하고 누군가는 그 복음에 반응을 합니다. 기독교의 자랑은 이처럼 부활의 기쁜 소식입니다. 애석하게도 고린도 교회 안에 죽은 자의 부활 자체를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문제는 교회의 태도입니다. 부활 없다는 말을 하는 이들에 대해 제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믿고 안믿고는 개인의 선택 문제로 치부한 결과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바울은 부활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활은 완전히 다른 소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이란 말을 바울이 던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이 세상을 넘어 오는 세상까지 소망을 둡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두 번째로, 부활은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당당한 신앙을 갖게 함을 압니다. 예수님은 거할 처소가 없어도 당당하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부활 신앙을 갖고 있어서 당당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는 사람과는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압니다. 이 부활 신앙으로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일설교 4/2/2023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고난” (벧전2:21-25)
성경이 말하는 가장 행복한 인생은 죄용서받은 죄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 뒷면에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고난 자체를 욕을 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난이 ‘너희를 위하여’ 일어난 것임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너희’란 우리 모든 죄인을 포함합니다. 물론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일차 대상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는 그렇기에 우리 신자들에게 항상 감사와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를 기쁘고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왜일까요? 주님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란 베드로의 말에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들이 짊어져야 할 고난을 예수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에 있음을 이사야 선지자는 미리 예고했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다’는 고백이 우리 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것을 진짜 믿으면 우리는 달라집니다.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와 절교하고 의와 절친하는 삶이 됩니다. 또한 영혼의 목자를 따르며 살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란 시편23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는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신 결과로 죄용서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영원토록 영혼의 목자를 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껏 기쁘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주일설교 3/26/2023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소서” (엡1:17)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기도로 세워집니다. 성경은 기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한 기도를 서신서에 기록해두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중에서 단연 으뜸 기도제목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달라는 기도는 최고의 기도제목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데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만큼 성장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도 당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알자면서 더욱 힘써 알자고 호소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을 더 많이 알기 위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확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행복을 느끼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욥이나 야곱은 전과 다른 수준의 하나님을 아는 행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을 한 번만 제대로 아는 경험을 한다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경험을 한 이들로 가득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하나님을 아는 경험 면에서 돋보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도록 이끄십니다. 성경을 읽는 동안에 성령은 새로운 경험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달라고 지금도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