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11/29/2020 사도행전 11:1-4,17-18 “하나님 편에 서다”

한 사람의 회개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고넬료의 회심은 그 기쁨을 다시 확인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유는 할례자가 무할례자와 식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 문화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범죄 행위와 같습니다. 베드로를 향해 쏟아진 비난의 수위는 상당히 높았습니다. 베드로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환상을 보여주셨고, 어떻게 고넬료 가정에 가게 되었으며, 복음을 선포한 가운데 성령이 어떻게 임하셨는지를 열정적으로 전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였습니다. 얼마나 멋진 신앙 자세입니까! 아무리 비난과 야유가 쏟아져도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이상 당당하게 외쳤던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렇듯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 신자를 길러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배와 말씀, 성경공부 등이 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신자가 길러지면 교회는 영적으로 강해집니다. 모세가 약했지만 바로왕에 맞서 하나님 편에 섰듯이 우리도 세상과 맞서 하나님 편에 서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목소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 길러져야 합니다. 때론 하나님 편에 서는 일이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축복이 날마다 넘쳐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소식 11/29/2020

  1. 기도요청: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주일에 가정 예배로 드리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온라인 주일예배: 교회 홈페이지(www.ebctl.org)에 있는 온라인 예배 순서를 따라 주일에 각 가정에서 예배 드리시기 바랍니다.
  3. 매일 요한복음 묵상: 매주 월-금까지 전체 카톡을 통해 묵상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 유익과 경건의 시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4. 실내예배금지: Alameda County가 실내 예배를 금지한 상태입니다. 실외 예배는 허용되고 있습니다(추후 변동사항 공지).
  5. 2021년도 예결산 위한 카운슬모임: 이번 주 수요일 오후 7시에 zoom 으로 예결산 위한 카운슬 모임을 갖습니다.  

요한복음6장5절-6절 “진단 검사” 2020년 11월 27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분석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이 분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제자들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섣부른 판단과 미숙한 이해는 선입견을 만들어내고 편견에 사로잡혀 왜곡된 시각을 갖도록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약점을 잘 아시기에 기회가 있는대로 올바른 시각을 심어주시려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는 본문 저자의 해설은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시험’이란 말은 ‘합격 또는 불합격’의 개념이 아니라 더 깊은 이해로 들어가기 위한 과정을 뜻합니다. 빌립을 시험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의 이해를 더 깊고 넓게 하시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를 내놓고 학생들을 당황시키거나 기를 죽이려는 심술궂은 선생의 모습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지금 점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영적 진단을 위한 질문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예수님의 치유 능력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몰려드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환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매우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입니다.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떡이 아니라 치료입니다. 떡은 치료받고 나서 먹어도 됩니다. 치료받고나서 집에 돌아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 떡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조금은 엉뚱한 질문을 하십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떡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것도 빌립을 콕 집어서 이 질문을 던지신 예수님의 모습에 아마도 옆에 있던 제자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지금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상황인가란 의구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생뚱맞게 ‘음식’ 문제로 제자들을 시험하십니다. 이것은 질병 치료보다 더 중요한 뭔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저자는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는 해설로 질문 의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란 부분은 제자들에게 답을 찾아보라고 질문하신 것이 전혀 아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해 제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가장 좋은 답을 찾아내려 했던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어떻게 하실지를 다 알고 계신 상황에서 제자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살면서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질문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받아든 예수님의 질문처럼 말입니다.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느냐’란 질문은 제자들의 실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감당못할 일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상황이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절호의 기회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진단 검사를 이런 사건과 사고를 통해 받게 됩니다. 인생의 어려운 질문 앞에서 과연 우리가 주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는지를 점검받게 됩니다. 힘들고 지쳐 있는 우리 입장에서 영적 진단 검사를 꺼려하거나 귀찮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괴로운 현실 앞에서도 더욱 자신의 영적 상태를 진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거나 유지 또는 향상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방식입니다. 영적 진단 검사를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더욱 더 신뢰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6장1절-4절 “따르는 이유” 2020년 11월 26일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어린 시절 시골에서 동네 아이들과 구슬치기하면서 놀던 시절이 가끔씩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구슬이 많은 친구는 큰 부자라도 된 듯이 으스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친구는 동네에서 인기도 많고 그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녔습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로 음식 잘 먹는 것 하나로 수많은 팔로워(특정한 사람이나 업체 따위의 계정을 즐겨 찾고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들을 거느리는 것을 봅니다. 소위 ‘페북 스타’(SNS ‘페이스북’에서 다수의 팔로워를 확보해 유명한 사람을 가리킴)들이 있습니다. 마치 연예인처럼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면서 커다란 인기를 누리는 이들이 인터넷상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따르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하지만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아픈 사람이 추종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어느 병원 어느 의사가 어떤 병에 대해서 최고의 권위자란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듭니다. 그 의사를 만나면 치료될 것 같은 신뢰감이 환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런 신뢰감을 갖고 예수님을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커다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장면을 봅니다. 그 이유에 대해 예수님이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이라고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죽음 직전에 있던 왕의 신하의 아들을 치료하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또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치료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이기에 그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유대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다양한 병을 갖고 있던 환자들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의 거리를 유지하셨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란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그들과 떨어져 계셨음을 말해줍니다. 물론 사람과의 거리 두기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을 싫어하셔서 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귀찮아서 멀리 도망가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너무도 잘 알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예수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있던 ‘제자들’은 어떤 이들인가요? 이들은 병을 잘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병고침을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 자체를 배우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특정한 목적을 갖고서 예수님을 추종하는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예수님 자체를 배우려는 자세로 그를 추종해야 합니다. 어떤 필요에 의해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에 우리는 큰 실망을 하게 됩니다. 반대로 필요가 채워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필요를 찾아내서 그것을 채워달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를 따르면서 배우는 삶의 자세는 사라지고 어떤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아무렇게나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방식으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이 아닌 우리의 전부가 되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의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요한복음5장45절-47절 “모세를 믿었더라면” 2020년 11월 25일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옳은 일을 했음에도 비난을 들을 뿐 아니라 고발까지 당한다면 그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치유했다는 이유로 당시 권력을 쥔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른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했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은 옳은 일을 하셨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불의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억울한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셨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셨습니다. 차분하게 자기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풀어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아들이며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음을 강력히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장 신뢰하던 모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꺼내십니다. 모세가 유대인들을 고발할 것이란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모세는 언제나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본문45절에서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라고 하시면서 인정하셨습니다.

모세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뢰는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 오경이라 불려지는 책들이 있는데, 총 다섯 권이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 등입니다. 그 중에서 출애굽기를 보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모세의 모습이 나옵니다. 모세가 전한 율법의 기원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강력히 증거하기에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거의 성역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언제나 희망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모세가 유대인들을 하나님 앞에서 고발할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은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 말을 정면으로 반박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던 그들이기에 이 말 또한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더 큰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것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란 말씀입니다. 모세가 예수님에 대해 기록했기에 모세를 믿었더라면 예수님도 믿을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그의 글에서 예고한 메시야 이야기가 곧 예수님의 것임을 이렇게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모세가 바라보던 메시야임을 인정한다면 모세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했다는 것은 지극히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를 믿은 것처럼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했기에 그의 글을 믿는다면 예수님께로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모세의 글과 예수님의 글을 동시에 읽고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모세와 예수님을 연결해서 읽지 않는다면 당시 유대인들처럼 엄청난 오류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은 예수님의 은혜를 내다보기 때문에 이 둘을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율법은 은혜 안에서 성취된 것이기에 예수님 안에서 모세의 율법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행위 구원을, 예수님의 은혜는 믿음 구원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모세는 율법으로 구원받으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율법이 주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재조명해야 합니다. 특히 모세의 글인 율법은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란 틀 속에서 읽혀져야 제대로 이해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지금도 모세의 율법을 통해 풍성한 은혜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5장41절-44절 “누구의 칭찬을 구하는가” 2020년 11월 24일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문명은 전세계를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습니다. 인터넷만 통하면 지역, 시간, 거리와 상관없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 부작용도 있지만 온 세상을 매료시키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유튜브는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을 알리고 여론을 형성하는 막강한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댓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악플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있지만 위로와 응원을 얻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면 한 순간 유명인이 되어 부와 영광을 거머쥐게 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이 칭찬에 목말라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응원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없던 힘도 생길 정도로 신이 난다고 말합니다. 무플(댓글이 전혀 없는 상태)보다 악플(악한 평가)이 더 낫고 악플보다 선풀(응원의 메시지) 더 낫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근본적으로 관심을 받고 싶을 뿐 아니라 칭찬을 듣고 싶어합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라 해도 사람의 칭찬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대표적인데, 그들은 사람의 이목을 끌고 칭송을 듣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기도, 구제, 금식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교묘하게 포장을 했을 정도입니다. 노골적으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경건 생활을 하면 외식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기에 그들은 안그런척 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을 끌어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이란 ‘칭찬’을 뜻하는데,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평가를 무시하거나 외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평가를 절대화시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으로 자신의 사역을 평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단호한 모습입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끄집어 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하시다니 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란 말씀으로 그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예수님을 거절하는 그들의 태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영접할 뿐 아니라 서로 영광을 취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속내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마음 속 깊이 꼭꼭 숨겨두었던 사람의 영광(칭찬)을 구하는 그들의 삶의 목표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것을 믿고 있었던 유대인들이지만 정작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는 태도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들로 사람의 칭찬에서 자유로워지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람의 칭찬이 더 중요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사람의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면 우리의 신앙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칭찬이냐, 하나님의 칭찬이냐의 갈림길에서 헤매게 되는 안타까운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의식하느냐, 사람을 더 의식하느냐란 질문을 항상 자기 자신에게 던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정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는 사람의 칭찬에서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더욱 더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39절-40절 “성경을 읽는 이유” 2020년 11월 23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긍심은 대단했습니다. 히브리 성경인 구약 성경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보물이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모세가 가르쳐준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신명기6:6-9절은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희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심을 예수님도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본문3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 연구’에 대한 열정만 본다면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확실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생명을 주는 책이란 사실을 유대인들은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 연구와 목적 의식을 공유하셨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그들의 자세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란 말씀으로 유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측면을 드러내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목적이 생명을 얻기 위함인데, 이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분노할 일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한 부분도 아니고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한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거절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과 예수님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책인 반면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과 같은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 사고 방식을 갖고 있던 유대인을 향해 ‘영생을 얻기 위해 나에게 와야 한다’고 하시니 얼마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었던 유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재조명하지 않은 점입니다. 구약 성경이 영생을 주는 책인 것을 인정했지만 그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구약 성경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함을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심장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없는 상태로 구약 성경을 연구하고 위대한 글을 쓰는 것은 심장 없는 사람으로 걸어다닌 것과 같습니다. 생명 없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도덕적인 삶의 모델을 발견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허무할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목적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구약과 신약 전체를 볼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고 계심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열매가 온 세계에 퍼져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예수님 안에서 성경을 읽고 연구한다면 생명의 사역은 더욱 활발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노력을 꾸준히 해나갈 때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11/22/2020 추수감사절 Outdoor 예배

8개월 동안 모이지 못하다가 추수감사절을 맞아 교회 건물 사이 공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늘쪽은 햇빛을 피할수 있어서 좋았지만 좀 추웠다고 하네요. 햇빛이 있는쪽은 따스했지만 햇빛에 눈이 부신게 불편했습니다. 아무튼 반가운 얼굴들을 보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니 감격스러웠습니다. 어서 속히 교회 문이 활짝 열리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주일설교 11/22/2020 욥기 1:21-22, “감사의 폭 넓히기”

상실의 고통은 서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신앙적으로 성장을 이루는 기회로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욥입니다. 욥이 겪은 상실의 고통은 너무도 커서 감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녀 모두를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란 고백을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뿐만 아니라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유혹은 상실의 고통을 파고듭니다. 욥은 고통을 잊기 위해 죄짓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또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상실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있지만 그는 이것을 이겨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하면서 원망을 자주 했습니다. 물이 없어서, 음식이 없어서, 생활이 고달파서 원망했습니다. 욥은 더 고통스러운 상실을 경험했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단한 신앙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사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감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대단했을지를 상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감사의 폭은 상실의 고통을 거치면서 더욱 확대될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향한 감사는 상실의 고통 중에도 우리 삶 속에서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소식 11/22/2020

  1. 기도요청: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주일에 가정 예배로 드리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온라인 주일예배: 교회 홈페이지(www.ebctl.org)에 있는 온라인 예배 순서를 따라 주일에 각 가정에서 예배 드리시기 바랍니다.
  3. 매일 요한복음 묵상: 매주 월-금까지 전체 카톡을 통해 묵상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 유익과 경건의 시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4. 실내예배금지: Alameda County가 실내 예배를 금지한 상태입니다. 실외 예배는 허용되고 있습니다(추후 변동사항 공지).
  5. 추수감사주일: 오늘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앞으로 더욱 더 감사가 넘칠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