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장 47절-48절 “눈 앞에 살 길이 보여도” 2021년 5월 12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누군가가 죽은 자를 살려냈다고 한다면 일단은 의심부터 할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 봤다고 한다면 무조건 부정할 수만은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에 사는 이들은 그런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문화 자체가 다양성을 인정하고 자기 일이 아니면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이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일반인들 뿐 아니라 사회 고위층도 이 사건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인 파장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진정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미 땅과 민족은 자유를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속셈이 무엇이었을까요?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란 그들의 말에서도 그들이 이것을 두려워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 실제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이를 증명하셨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가 살아난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이들의 입소문으로 유대 사회 전체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쥐고 있던 기득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를 놓고 얼마든지 비판할 수가 있습니다. 살 길을 보여주어도 그것을 발로 차는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만드는 그들의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차지하던 자신들의 지위를 끝까지 유지하려는 욕망이 이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강력히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이런 욕망이 당시 유대 사회의 기득권층에만 있었을까요?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이 모든 욕망을 이겨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위를 스스로 내려놓으셨습니다. 사람이 되셔서 모든 고난을 감내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살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이를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되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면 이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새로운 힘을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소망입니다. 자기 훈련, 자기 극복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득권이 생기면 우리도 그것을 유지하고 누리기 위해 예수님을 등질 수가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겸손함을 잃지 않은채 이기적인 욕망을 이겨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의 지위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3절-46절 “아무리 위대한 일을 보아도” 2021년 5월 11일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죽은 자 앞에서 통곡하는 가족의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 말을 하는 것 또한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미안하다거나 사랑한다거나 편히 쉬라는 말을 죽은 자에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느 시대에 살든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상식을 깨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향해 큰소리로 뭔가를 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굴로 된 무덤에 안치된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 번에 걸쳐 주문을 외우듯이 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 큰소리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무덤에 있던 나사로가 걸어나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 이 장면은 죽었던 자가 살아났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시체를 향해 나오라고 했더니 진짜로 죽은 자가 걸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 상황인데,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 아닌 누가 이 일을 해냈느냐입니다. 나사로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본문이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 조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날 수가 있느냐가 아닌 이 일을 해내신 예수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또 하실 수 있느냐라거나 지금도 가능하냐란 질문에 우리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이미 행하신 일에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낸 이 일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지어낸 이야기로 폄훼하는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기에 이 사실 자체를 우리는 붙들어야 합니다.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지라도 죽은 자를 살려내신 이 일 하나로 우리는 충분해야 합니다. 더 이상 죽은 자를 살려내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 일에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은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관건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과 달리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비열한 모습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이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일종의 고발인데, 예수를 이대로 놔두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당시 권력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린 일까지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유불리를 따지는 인간의 저열함이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죽은 자를 살린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은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더 보여주어야 충분할까요?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보여준다고 만족할 수가 있을까요? 인간의 욕망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채워질 수 없는 깨진 항아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됩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다”란 장면을 놓치면 안됩니다. ‘그를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보여 주어도 개인적인 이익을 따지는 이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렇듯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 갖고 있는 영적인 힘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지금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1절-42절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2021년 5월 10일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주객전도란 말은 주인과 손님이 뒤바뀌었다는 뜻으로 일의 순서가 바뀌어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때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사건의 본질을 놓치고 주변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성경 이야기를 읽을 때 무엇이 본질인지를 놓칠 때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과 죽은 나사로 이야기도 본질이 무엇인지를 놓친다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죽은 자를 살리시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가서야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그 과정입니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늦춘 것과 마르다와 마리아와의 대화, 유대인들의 반응에 대한 감정 표현 등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이 점을 더욱 명확히 말해줍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우라는 말에 사람들은 그 돌을 치웁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순서는 나사로를 살려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란 장면은 분명히 기도를 나타냅니다. 기도 내용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하고 깊은지를 기도를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에서 의도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에서 확인이 됩니다. 무엇을 믿도록 하려는 것일까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밝힐 뿐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것도 철저히 이 목적을 위해 실행된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 일에 조금도 지장이 없다는 의미가 있음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 사건을 놓고 그 때처럼 오늘도 죽은 자를 살려내시면 믿겠다는 억지 주장을 하면 안됩니다. 기적은 필요에 의해서 행해지는 선물과 같은 일입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란 사실입니다. 이를 믿느냐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믿음의 반응이 아니라 기적만을 추구하는 신앙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적은 성경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 기적들만으로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아닌 불신이 우리 마음을 가득채울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중심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아직 살려내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믿게 하려 하신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작은 기적들을 통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반응은 여전히 우리 삶의 중심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가득채워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일설교 5/09/2021 히브리서 5:12-14, 신앙 성장(11) “신앙이 멈추어 있나요?”

제목: “신앙이 멈추어 있나요?” (히 5:12-14)

신앙 성장에 있어서 신앙 멈춤 상태를 점검하는 일은 필수입니다. 신앙이 멈춘 상태인지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채로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교회도 신앙이 멈춘 상태인지를 오랜 시간동안 알아차리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덱 이야기를 교회가 알아듣지 못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때가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신앙의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신앙 성장을 이루기 위해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 외적인 자극이 주어져야 합니다. 이는 성경을 통해 영적인 자극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지식만 늘어난다고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과의 거리가 좁혀져야 합니다. 이는 성경이라는 외적 자극이 계속 주어질 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내적 수용입니다. 성경을 통해 신앙 멈춘 상태인지를 알게 되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본문은 어린 아이와 어른의 음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교회가 여전히 우유를 먹고 있었음을 보여주면서 영적 멈춤 상태를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습니다. 셋째, 실제적인 치료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신앙인이 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연단이 필요하며 이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실력을 키워줍니다. 이것이 신앙 멈춤 상태를 이겨내고 성장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신앙이 멈추었는지를 점검하면서 말씀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교회소식 5/09/2021

  1. 실내예배: 매주일 오후 1시(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2. 2021년도 새표어:은혜 속에 성장하는 교회”(골로새서1:6)
  3. 온라인 녹화예배: 현장 예배가 시작었지만 당분간 온라인 녹화 예배는 계속해서 제공됩니다. (주일마다 전체 카톡으로 보내드립니다).  
  4. 요한복음 묵상글: 매주 월-금까지 전체 카톡을 통해 묵상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 경건을 위해 꼭 읽으시기 바랍니다.
  5. 오늘의 성경읽기: 매일 세 장씩 성경읽기에 적극적 참여 바랍니다.
  6. 친교: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교회가 꽃과 간식을 준비하였습니다.
  7. 소천: 노재권 집사님의 어머님이 지난 금요일에 소천하셨습니다. 유족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8. 알림: 교회 카운슬은 원영자 집사님을 명예권사님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결정기준: 80세 이상, 출석5년 이상, 십일조 생활, 주일성수), 6월6일 주일 예배 시간에 추대식을 갖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38절-40절 “설마가 현실이 되다니” 2021년 5월 7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람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낫다’에서 알 수 있듯이 공허한 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할 때에 특히 더 그렇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시는 분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것이란 말조차도 절대 공허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이 이 점을 매우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은 그 누이인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 했으며, 이보다 앞서서 제자들에게 죽은 나사로를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들었던 제자들과 마르다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알아들었다해도 ‘설마’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덤 앞에 선 예수님이 놀랍게도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너무도 이상한 명령입니다. 당시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아놓았는데 이 돌을 치우라는 것은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마르다도 이 행위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완곡한 어법으로 이것이 매우 이상하고 비상식적인 일임을 표현했습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거절 의사를 확실히 나타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무덤’과 ‘죽은 자’란 말이 반복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죽은 지 나흘이 지났다는 말을 했으며 시체가 썩기 시작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덤을 열어놓으라니 마르다가 반대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르다를 향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면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울 것을 다시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믿음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요? 사실 마르다의 믿음과 관계없이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실 것입니다. 마르다의 반응에 따라 달라질 문제가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은 마르다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믿음’이란 단어가 쓰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적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믿음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에 대한 태도로서 믿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열고 죽은 자를 살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녀가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을 하나님은 하십니다.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믿음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마’라 여겼던 일들이 현실이 되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과연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상식 선에서 미리 예단하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적인 불행인데, 우리의 삶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보지 못하는 서글픈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해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으로 볼 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 윤택해질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6절-37절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이유” 2021년 5월 6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시점에서 예수님이 장례식장을 찾아가셨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조문하러 와서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 그 옆에서 함께 울었을 정도로 그들의 위로는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조문객들의 우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 조문객으로 온 당시 유대인들이 이 눈물을 놓고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본문 36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란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눈물을 사랑의 표현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다르게 본 이들도 있습니다. 본문 37절에서 우리는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란 차가운 반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맹인의 눈도 뜨게 했다면 그 능력으로 나사로가 죽지 않도록 치료할 수 있었지 않냐라는 비난이 섞인 감정이 드러난 것입니다. 눈물의 의미을 놓고 다양한 해석을 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의 정황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이들도 이렇듯이 상반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운 뿐입니다.

예수님의 나사로를 향한 사랑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변 이웃들도 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놓고 눈물을 흘린 예수님을 향해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그 사랑이 의심받고 있습니다. 진짜 사랑하셨다면 왜 그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느냐란 이유 있는 항변 때문입니다. 무능한 예수님이라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겠지만 맹인의 눈도 뜨게 하셨기에 죽기 전에 병을 치료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이런 딜레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성경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로 듣게 됩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주 작은 문제 하나 해결해주지 않을 때에 이런 의심이 싹틉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불행을 겪으면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쪽인가요? 아니면 불행을 막아주지 않은 것을 놓고 의심하는 쪽인가요?

중한 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신앙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안쓰럽고 안타깝지만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깊고도 풍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란 또 다른 목소리 앞에서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할 것인지, 의심할 것인를 놓고 매순간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잘 알 것 같다가도 어떤 불행한 일을 겪게 되면 그 사랑을 쉽게 의심하고 맙니다. 맹인의 눈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 우리의 삶에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이 생깁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렇기에 이를 경계하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만 확인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사랑의 모든 것을 증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족하다는 신앙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일상의 문제가 해결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확신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35절 “함께 울 수 있는 마음” 2021년 5월 5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람의 감성은 이성과 함께 뭔가를 감각하고 지각하는 인식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감성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성이 메마른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달리 정서적인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을 수 있는 정서적인 반응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웃었다는 표현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감성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을 보면 감성이 풍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는 묘사는 이를 잘 반영해줍니다. 이 뿐 아니라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란 표현도 그의 뛰어난 감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감성을 저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감성이 풍부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적절히 표현하시는 분이십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 죽음에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통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공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한 감정 표현 그 이상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와 조문객들의 우는 모습과는 다릅니다. 이들의 눈물은 상실에서 오는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표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의 횡포에 지쳐 있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이들의 절망을 보시면서 흘리신 것입니다. 이는 슬픔에 젖은 감성적인 눈물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겪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죽음 앞에서 눈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이 눈물에는 죽음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죽음에 어떤 응징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하는 우리와는 달리 예수님은 죽음을 종결시키고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시는 분으로 눈물을 흘리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위로의 차원에서 함께 우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도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만 본다면 우리는 너무도 중요한 가치를 상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우시는 것은 단순한 공감과 위로 차원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로 죽음을 직시하고 그것의 횡포에 눈을 뜨게 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소망하도록 이끌어 주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눈물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우리는 슬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우리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눈물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신 이로서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아무런 소망이 없는 이들처럼 눈물만 흘릴 수 있습니다. 죽음이 코 앞으로 다가온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막연히 좋은 곳에 가셨다라는 위로만 할 뿐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서 대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죽음 앞에서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이 느끼는 슬픔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처럼 슬퍼하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소망이 충만한 상태에서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눈물의 가치를 안다면 우리는 절망이 아닌 영원한 소망을 품고서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8절-32절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다면” 2021년 5월 4일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친밀한 관계가 어색해지면서 서먹한 사이로 변할 수가 있습니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 서로 멀리하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이후 마르다와 마리아는 실제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오빠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냈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고 결국 오빠는 죽고 맙니다. 두 자매는 아마도 서로 예수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표출했던 것 같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서운한 감정의 온도차는 서로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훨씬 더 격한 감정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러 갈 때에 그녀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던 것을 볼 때에 그런 추측을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마르다처럼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예수님을 만나뵙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하자마자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는’ 장면에서 이것을 충분히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에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단숨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 도착합니다. 주저없이 그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속에 담아둔 서운한 감정을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란 말로 토해냅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말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하겠다는 그녀의 의지입니다. 한 때 서운했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입니다. 오빠의 죽음과 제 때에 도와주지 않은 예수님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느냐입니다. 마르다를 통해 마리아에게 전달된 예수님의 메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다가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했던 장면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음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마리아의 회복을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를 다시 부르심으로 새로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불편한 감정을 해소시키고 관계 회복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아주 귀한 영적 교훈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존심 싸움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을 진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 회복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함에도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넓은 마음입니다. 마리아의 미숙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먼저 부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감정 싸움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넓은 마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놀라운 변화들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있는 행동이 이어진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멋진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기대를 품고 넓은 마음으로 대할 때에 주님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풍성한 은혜를 맛보도록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7절 “내가 믿습니다” 2021년 5월 3일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던 사람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이들이 확인되지 않는 악한 소문과 악평에 시달리다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일들을 가끔씩 보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그 사람을 과연 믿을 수 있느냐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도 한 편으로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선한 일과 차별화된 메시지, 겸손함 등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에 대한 악평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미친 사람이라거나 신성 모독을 자주 한다는 악한 소문들이 휘몰아쳤습니다. 이런 가운데 가장 난감한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일 것입니다. 사회의 주류 그룹으로부터의 배척이 더욱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그를 계속 믿고 따를 것이냐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불행이 찾아옵니다. 마르다의 경우 사랑하는 오빠인 나사로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기에 이 불행을 조금도 막아주지 못하는 예수님에게 얼마든지 실망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지만 제 때 해결해주지 않는 모습에 실망은 절망으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이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에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란 목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물어오는 것입니다. 오빠인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상태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믿느냐를 확인하고 있으니 더욱 실망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놀라운 모습을 보입니다.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음에도 신앙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에 대해 ‘주여 그러하외다’고 매우 긍정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믿나이다’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실망과 분노, 절망을 느낄 수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백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욱 더 놀라울 따름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믿습니다’고 했으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런 고백이 가능한 것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마음 때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오빠인 나사로의 죽음도 이 고백을 무효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퍼져 있는 예수님에 대한 악한 소문들도 이 고백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참다운 신앙 고백은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흔들림없는 신뢰 속에서 나옵니다.

‘내가 믿습니다’란 마르다의 고백을 우리는 흘려들어서는 안됩니다. 맹목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태에서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삶의 고통과 비극을 온 몸과 마음으로 체감하면서 이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는 사막 같은 곳에서 온갖 모래 바람을 맞아가면서 견뎌낸 신앙 고백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지적인 동의나 습관에서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런 고백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와르르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가요? 어떤 환경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안전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신앙 고백하고 있는지, 불안과 고통, 아픔을 겪으면서 신앙을 붙들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이론적인 완벽한 신앙 고백 보다는 삶에서 나온 진국같은 신앙 고백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삶의 온갖 비바람을 맞으면서 형성된 신앙 고백은 뿌리깊은 나무처럼 견고할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어디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을 담대히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