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9장3절 “이것이 끝이 아님을” 2021년 3월 4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길가에서 구걸하는 모습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시각이 그리 곱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치 천벌을 받아서 맹인으로 태어난 것처럼 여기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누구의 죄로 인해 이렇게 맹인으로 태어났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서 그것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그것을 천벌로 여겨 죄인 취급하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여겨졌기에 가혹하다는 생각 자체를 사람들이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누구의 죄로 인해 이렇게 맹인이 된 것이냐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호기심만이 분출될 뿐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에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단호하게 두 가지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는 죄로 인해 이렇게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를 통해 무언가 하실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죄로 인해 맹인이 된 것이 아니란 점과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일을 하실 것이란 점은 당시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자들이 갖도록 하셨습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대하는 사회적인 시각을 벗어나 하나님의 시각을 갖도록 이끌고 계셨던 것입니다. 선천적 맹인에 대한 차가운 시각과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냉혹한 태도를 바꿔놓으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상적인 것을 넘어 세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시는 놀라운 행위입니다. 맹인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느냐란 시각에 찬물을 끼얹는 동시에 하나님은 그런 맹인을 통해 무언가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멋진 장면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주류를 형성했던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능력과 실력, 사회적인 지위와 권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멋지게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에 이렇게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사람의 능력에 의지해서 무언가를 하시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이런 시각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에 함몰된채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그릇된 시각을 교정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세상에 보여주려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교회 구성원들을 관찰한 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이것은 맹인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는 예수님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렇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볼 수 있는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만은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시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맹인으로 태어났기에 어떤 희망도 없는 것처럼 여기는 세상의 시각이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불행해져도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교회는 항상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시각을 교회가 회복한다면 어느 누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도 순수한 마음으로 환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실지 기대감을 갖고 응원해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면 누구든지 훈련시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적인 능력이며 교회만이 누리는 영적인 축복임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복음9장1절-2절 “죄 때문에 불행이 생기는가” 2021년 3월 3일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통해 죄에 대해, 그에 대한 처벌에 대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해 배웠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의 전성기는 그 이후 국가의 분열로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그 분열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는데, 그 원인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라는 죄입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했는데, 그것도 모두 다 죄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는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가슴 아픈 역사인데, 그 원인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흐름은 예수님 당시에도 이어졌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냈지만 로마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 것인데, 이것도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유대인들은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국가적인 재앙 뿐만 아니라 개인의 불행도 유대인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욥 이야기를 들 수 있는데, 욥이 겪은 엄청난 개인적인 불행을 그의 세 친구들은 욥의 숨겨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유대 사회에서 하나의 관습처럼 흘러왔습니다. 개인의 불행은 죄의 결과라는 시각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걷던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이것은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을 그들이 이번에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만의 고민이 아니라 유대 사회가 갖고 있던 풀기 어려운 신앙 이슈였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모든 인류가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일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유무와 관계없이 어떤 불행을 겪게 되면 죄를 지어서 이렇게 벌 받는 것이 아니냐란 생각을 사람들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죄 때문이냐란 질문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음주 운전 사고로 죄 없는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음주 운전자의 죄로 인해 발생한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일까요? 제자들은 ‘누구의 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부모의 죄인지, 당사자의 죄인지’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은 누군가의 죄로 인해 맹인으로 태어났다고 확신했다는 점입니다.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의 불행을 죄의 결과로 보는 것에 대해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정말 죄 때문에 불행이 생기는가란 좀 더 근본적인 질문 자체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불행이 찾아오는 경우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이 정말 죄 때문에 일어나느냐에 대해 애매한 경우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불행이 죄로 인한 것인가란 질문을 해야 합니다. 본문의 경우에도 누구의 죄 때문인가란 질문 보다는 정말 이 불행이 죄로 인한 것인가란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물론 죄와 불행을 전혀 연결하지 않으려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둘을 인과관계로 연결하면 죄책감에 시달리고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사회 생활에 큰 장애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와 불행의 관계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죄 때문에 불행하다고 단정짓기 보다 이미 겪고 있는 불행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을 죄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불행의 원인을 죄에서 찾는다해도 불행 자체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불행의 원인이 무엇이냐보다 이미 일어난 불행을 어떻게 이길 것인지에 우리 신앙의 모든 화력을 쏟아부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더욱 건강한 신앙인으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불행을 이기는 신앙을 갖고 있어야 그것을 체험하는 이들을 우리는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8장56절-59절 “상상할 수도 없는 일” 2021년 3월 2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누군가가 오백 년 전의 사람이 지금의 자신을 미리 알아보았다고 말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아브라함은 무려 4500년 전에 살았던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지금의 예수님을 미리 보았다고 하니 과연 유대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공상 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는 시간 여행을 주제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접하고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래의 세계로 미리 가보는 경험을 가상적으로 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상상일 뿐 현실은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미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란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상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에 기겁을 했습니다. 전에도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던 그들이 이제는 확신을 갖고 그를 완전히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것을 ‘네가 오십 세도 안되었는데’란 말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는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예수란 사람이 시간을 초월해서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니 유대인들의 표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하지만 미친 사람의 미친 말 정도로 넘길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 치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처형하려 했던 것입니다. 즉결 심판을 해도 될 정도로 엄중한 죄를 지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그동안의 주장에 비춰보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 소개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5:46에서,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했던 예수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하면서 그분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이스라엘 땅에 사셨지만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는 설교는 들려져야 할 복음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심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보고 싶어했고 실제로 보았던 예수님을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신 분으로서 유한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지를 우리는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이것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 이야기를 세상에 마음껏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요한복음8장53절-55절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2021년 3월 1일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아브라함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은 단순한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했기에 그들에게 아브라함은 매우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증명하기에 특별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긍지를 허물어뜨린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예수님은 마치 죽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고 유대인들이 물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면서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은 정말 알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귀신들린 사람으로 규정했기에 미친 사람의 말을 들어서 무엇하겠느냐란 냉소적인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내게 영광을 돌리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유대인의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신다니 그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에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은 분노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감정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시고 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란 대목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모욕적입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모세 오경을 외우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대못을 박다니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예수님이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근거로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예수님은 앞 단락에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뺀 채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이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진정한 목적이기에 그들은 귀담아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방황하면 안됩니다. 이 두 분이 서로 자기 쪽으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것처럼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 두 분 사이에는 어떤 빈틈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큼 하나님을 알고 지키는 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철저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두 분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 안됩니다. 마치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아이들처럼 행동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하고 사랑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더 깊이 알고 그분의 말씀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에 감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 일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일설교 02/28/2021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워요” (요일4:9-10)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키우려 합니다. 하지만 야단을 쳐야 할 때가 있고, 눈물이 쏙 나오도록 혼을 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알지만 이런 경우에는 사랑받는 것이 맞나란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에 이런 의심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나 우리는 살면서 그 사랑이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신앙 성장의 멈춤 현상이 이런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실까요? 성경은 넘치는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이것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돌봄을 의심했듯이 우리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사랑하신다면서 왜 고통을 제거해주지 않으시는 걸까란 의구심을 갖습니다. 이것을 방치할 때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독소들이 가득차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요? 그릇된 접근은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해결책은 내 편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증거합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쌓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깊이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신앙 성장의 길로 들어서게 이끌어줍니다.  

교회소식 02/28/2021

  1. ZOOM 주일예배: 매주일 오전11시에 zoom으로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적극적인 참여 바랍니다. 또한 온라인 예배도 그대로 제공됩니다.
  2. 온라인 주일예배: 교회 홈페이지(www.ebctl.org)에 온라인 주일 예배 순서가 있습니다(주일마다 전체 카톡으로 보내드립니다).  
  3. 요한복음 묵상글: 매주 월-금까지 전체 카톡을 통해 묵상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과 경건의 시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4. 실내예배: 향후 미국 교회와 협의하여 실내 예배 시기를 정한 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5. 2021년도 새표어: “은혜 속에 성장하는 교회”(골로새서1:6)
  6. 오늘의 성경읽기: 매일 세 장씩 성경읽기에 적극적 참여 바랍니다.

요한복음8장51절-52절 “내 말을 지키면” 2021년 2월 26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이었습니다. 은유를 통해 진리를 전하시는 방식 때문에 여러 오해들이 발생했습니다. 예를 들어,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물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어머니 태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물리적인 물로 오해했습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을 실제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오해를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약속한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거짓된 약속을 공개적으로 말한 것이 됩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을 지키면 어느 누구도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 될까요? 요한복음11장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나사로가 육체적으로 죽음을 경험한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되어 육체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약속하신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육체의 죽음을 면제받는다는 의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육체적, 물질적 죽음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죽음을 경험한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열매를 먹자 그들이 육체적으로 죽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왜 그 자리에서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을까요?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했으니 먹는 즉시 죽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남으로 죽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겼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 그림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는 것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면 그 생명이 끊임없이 그 사람에게 흘러들어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상에서 옆의 사형수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 사형수는 육체의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축복을 소유한 상태로 육체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약속은 누구에게 주어지나요? ‘내 말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무시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내 말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않는다는 것과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그들로 ‘내 말을 지키는’ 일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정도로 위대한 일임을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가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고자 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의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요한복음8장50절 “누구의 영광을 구하는가” 2021년 2월 25일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유대인들의 가장 큰 가치는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손상을 입히는 것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요한복음5:44에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있다고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한 그들의 삶을 날카롭게 관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칭찬에 목말라했던 그들의 본성을 예수님이 정확히 꿰뚫어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의 칭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셨던 것일까요? 요한복음5:41에서 예수님은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8:29에서 예수님은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고 하시면서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누구의 영광을 구하느냐에 있어서 예수님은 항상 명확하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은 뒤로하고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사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유대인들이 인신 공격성 비난을 쏟아내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개인의 명예가 실추되고 온갖 모욕적인 소리를 들어도 상대를 같은 수준으로 비난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셨던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49절에서 그는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말로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고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명확히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공경한다면 그분이 추구하시는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공경하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면밀히 살펴보고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삶을 산 사람을 모델로 삼아 본받을 때에 가능합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분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더 깊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0:31에서 “그런즉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의 신앙 목적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영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은 예수님 안에 있기에 가능하며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를 도우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가란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당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답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8장48절-49절 “날선 대립 속에서” 2021년 2월 24일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토론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때가 있습니다. 서로간의 공격이 도를 넘어 인신 공격에 이르면 불쾌감만 줄 뿐 남는 것이 없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기 위해 절제의 언어를 사용하셨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진흙탕 싸움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예수님의 인격을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고 매우 불쾌한 인신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7:20에서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에 했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8:44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란 예수님의 말에 그들이 역공격을 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 주장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억지 주장임에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들이 6:42에서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기위해 ‘사마리아 사람’과 ‘귀신에 들린 사람’으로 예수님을 규정한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 험악했는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극한의 대립 속에서도 감정을 절제하시면서 반응하셨습니다.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는 방어를 하셨습니다. 특이한 점은 ‘나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너무도 명확해서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사실이 아님을 다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이 들린 사람이란 오명은 확실히 벗어버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말은 귀신 들린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의 특징이기에 강력한 방어로 적합했습니다. 귀신에 들린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란 것은 예수님의 어떤 말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는 그들의 마음 상태를 꼬집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모욕이 얼마나 비인격적인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만큼 비인격적인 것도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조금의 존중도 없이 모멸감과 치욕만 주려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대우를 받으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너희가 나를 무시하니 나도 무시한다’는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할 때 심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듯한 불쾌감은 잘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복음을 말하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의연한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날선 대립 속에서도 감정을 절제하면서 대응하는 모습은 세상 속에서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감정에 사로잡혀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억울함과 모욕감을 이겨내고 차분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말할 수 있는 내적인 성숙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로서 세상 앞에 서 있는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감정의 절제와 함께 진리의 수호자로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8장45절-46절 “진리가 공격받을 때” 2021년 2월 23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메시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메신저를 오염시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흠집내면 그가 말하는 어떤 메시지도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메신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면 메시지는 자동적으로 신뢰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공격을 예수님에게 퍼부었습니다. 본문46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죄로 책잡다’는 것은 없는 죄를 덮어 씌워 죄인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극악한 죄인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한 유대인들의 계획은 치밀했고 교묘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죄인으로 만들려 하고 있구나’라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이에는 이’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와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란 그의 항변이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음을 강하게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진리를 말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죄인이란 오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죄인의 입에서 나온 진리를 누가 신뢰하겠느냐란 전략을 세웠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지만 예수님은 차분하게 대응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란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를 말해줘도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에 그것이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인가요? 진리가 들려져도 그것을 듣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 어찌 유대인들만의 문제일까요? 지금도 얼마든지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심을 전하는 교회의 목소리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목소리가 세상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차별적으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진리를 외치는 교회가 완벽하지 못하기에 세상은 교회의 잘못을 핑계로 진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모양인데 그들이 말하는 진리를 신뢰할 수 있느냐란 볼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흠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죄인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은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 흠이 있는 존재로 예수님을 세상에 외치니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완벽해질 때까지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전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흠이 있는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교회를 사용하셔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속에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을 내다보면서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최선을 다해 전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성령은 지금도 불신하는 이들 속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진리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진리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