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기억” (시편74편 묵상) – 5/30/2020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축복입니다. 하지만 잊지를 못해서 고통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잊고 싶지만 더욱 또렷해지는 과거의 기억으로 매일 신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픈 기억은 몸에 난 화상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어서 그냥 평생 동반자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지워서는 안되기에 계속해서 기억을 재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바벨론 포로 생활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입니다. 지워서는 안되는 아픈 기억입니다. 국가적으로 수치를 당한 날일 뿐 아니라 오랜 시간 포로가 되어 온갖 고통을 당했던 민족의 시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볼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들을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이라 말합니다. 따라서 바벨론 포로는 기독교인에게도 아픈 기억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시대, 문화, 민족, 국가를 넘어 바벨론 포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아픈 기억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경험입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서 겪었던 기억이 오랫동안 마음을 짓누를 수 있습니다. 여전히 회복이 되지 않아 신음하듯이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란 심적 고통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시인은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아픈 기억을 안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 인정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좋은 기억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말에는 시인 자신도 포함됩니다.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픈 기억이 우리 신앙 생활 전체를 방해하도록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이신지를 잊지 않도록 우리는 아픈 기억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인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는 창조 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만을 위한 수호신으로 여기지 않고 온 우주의 왕으로 고백하는 이 모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실망했어도 여전히 온 세상의 창조주로 계심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실패한 경험이든 버려진 경험이든 아픈 기억은 우리 신앙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밤과 낮, 겨울과 여름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원수들이 주의 백성들을 짓밟고 비방하고 괴롭혀도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자신의 뜻에 따라 운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시인처럼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우리는 여기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에 깊숙히 개입하셔서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걸림돌” (시편73편 묵상) – 5/29/2020

멀쩡히 길을 걷다가 갑자기 넘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길가에 뭔가 돌출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짝 놀래는 정도면 괜찮지만 큰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 약한 부분에 충격을 줌으로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은 우리로 더욱 조심하게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방심을 하게 되고 비슷한 일을 또 겪게 됩니다. 자책도 해보지만 우리의 삶에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입니다.

신앙 생활을 잘하다가 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뭔가 돌출된 부분에 걸린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다 거기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작은 돌부리일지라도 거기에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이 살짝 흔들리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나 신앙의 뿌리까지 뽑히는 비극으로 끝날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적으로 사망 직전까지 갔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린 상태입니다.

신앙이 무너지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시인은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다”고 이유를 밝힙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직접 목격한 후에 신앙이 거의 사망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죄가 분명함에도 법망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분노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피해를 입힌 자가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법망을 피해갈 뿐 아니라 더 잘되는 것을 보면 분노를 넘어 삶이 망가질 정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이 정도는 이겨야한다는 소리를 듣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울함만 증폭될 뿐입니다. 나에게 물질적, 정신적, 사회적 피해를 입힌 사람이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에게 없는 것을 본다면 신앙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삶에서 겪을 수 있는 신앙의 깊은 고민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시인은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해결책을 찾고 싶었지만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고민을 해결하려 할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적 고통을 겪게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심적 고통을 이기고 드디어 해답을 찾은 모습입니다. “내가 깨달았다”는 말은 몰랐던 답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알던 답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걸림돌에 넘어지면 이미 알고 있던 어떤 답도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신앙을 붙들고 있으면 알던 답을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다”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도울 힘이 있다면” (시편72편 묵상) – 5/28/2020

어린 시절 우리는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비현실적인 답을 내놓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답이 대표적입니다. 큰 꿈을 품는 것 자체를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꿈은 작아지고 현실은 높아지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비참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실에 맞춰 사는 모습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실제로 막강한 힘을 갖는 위치에 서기도 합니다. 힘을 갖게 된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일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왕은 절대 권력을 쥔 사람입니다. 시인은 “그가 주의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할 것”이라 말합니다.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면 그가 이렇게 선한 방향으로 그 힘을 사용할 것이란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을 것”을 고대합니다.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힘을 가진 자가 이런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한다면 그 사회는 훨씬 더 건강해질 것입니다. 도울 힘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 편에 서서 압박하는 자를 꺾는다면 억울한 사람이 줄어들 것입니다.

자유민주사회는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뉘어집니다. 사회적인 지위, 정치적인 권력, 물질의 부를 가진 이들과 가난하고 연약하고 억눌린 이들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시인이 기대하듯이 힘을 가진 이들이 약자를 돕는다면 사회는 훨씬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벤 풀 위에 내리는 비 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은” 존재로 힘 있는 이들이 살아간다면 사회는 훨씬 더 밝아질 것입니다. “궁핍한 자가 부르짖을 때”에 귀를 막거나 눈을 감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도울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를 꿈꾼다면 너무 이상적일까요?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특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셔서 한 번도 잊지 않으신 사명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자신의 힘을 이것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목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면 어떤 세상이 될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우리는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도울 힘을 갖고 있을 때 더 큰 힘을 추구하기보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해내라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남을 도울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복을 누릴 것입니다.

“꾸준함” (시편71편 묵상) – 5/27/2020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성경 책 중 전도서는 첫 장부터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거침없이 표현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말은 유명합니다. 그가 사용한 또 다른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문구입니다.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헛된 짓을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을 돌아볼 때 그와 같은 헛된 일에 매달렸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질없는 말과 행동이 참으로 많았음을 우리는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인생의 참된 진리를 알게 된 사람으로서 그런 함정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반석과 요새이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물론 시간 차이는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만난 이가 있는 반면 죽음 직전에 만난 이도 있습니다. 시인은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아마도 그는 어린 나이 때부터 주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를 의지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어머니의 배에서부터 주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확신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물론 죽음 직전에 예수님을 믿어도 이런 고백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청년의 나이에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고 에베소서1:4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깨달은 영적인 세계의 독특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던 자신의 인생을 알게 된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허무주의란 함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인생의 반석과 요새이신 하나님을 만났지만 우리는 영혼을 엿보는 자들로부터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는 무서운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우리 영혼이 이런 무신론적인 공격에 의해 짓눌리고 비참해질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한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귀에 들릴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허무함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시인처럼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란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란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심한 고난”으로 인해 마음이 피폐해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실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꾸준함입니다. 우리는 평탄대로를 달릴 수만은 없습니다. 때론 험한 계곡과 깊은 수렁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석과 같은 꾸준한 신앙은 지금처럼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우리를 더욱 더 강력히 붙들어줄 것입니다.   

“구조 요청” (시편70편 묵상) – 5/26/2020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사람에게 일분일초는 천금과 같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를 우리는 “나의 영혼을 찾는 자들”이란 시인의 말에서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힘있는 이들이 그의 삶을 절벽으로 몰아가는 형국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인의 삶의 정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 “속히” 도와달라고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위급한 일들을 겪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고통스러운 일이 눈 앞에 펼쳐지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속담이 있지만 현실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없이 누군가의 미움만 받아도 분노로 인해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작은 상처라 할지라도 우리를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려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얼마든지 하나님을 향해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위급한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찾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삶의 뿌리까지 흔들 정도로 힘든 일을 겪을 때 우리가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역경을 벗어나는 것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어려움을 겪으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로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를 맛보게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라 기도합니다.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단순히 어려움을 벗어난 자로서 예우 차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새로운 차원의 삶의 환희에 들어선 모습입니다.  

구조 요청은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할 수 있습니다. 시인처럼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라고 간절히 외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자유롭게 해 주시듯이 우리를 삶의 덫에서 건져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는 진심어린 고백입니다. 구조 요청에 응답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위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 위대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외침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위대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구조 요청을 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꿋꿋히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주를 향한 열심” (시편69편 묵상) – 5/26/2020

어떤 일에 열정을 쏟다가 한순간 마음이 식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일이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고 싶지 않은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 생활에서 흥미를 잃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한 취미가 바뀐다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공부에 흥미를 잃게 되면 부모의 근심이 됩니다. 개인을 넘어 집안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공부 열정을 되살리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를 설득해서 다시 공부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부모는 최선을 다합니다.

신앙의 열정이 생기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신앙 열정이 타오르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신앙 생활을 합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신앙 생활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삶의 의욕이 차고 넘칠 뿐 아니라 모든 일이 아름답게만 보입니다. 신앙 열정이 생기면 마치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안에 신앙의 열정이 타오르면 바울이 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됩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신앙의 열정이 어느 순간 식어버립니다. 신앙 생활이 낯설게 느껴질 뿐 아니라 불편해집니다. 불편한 사람을 만나고 불편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신앙 생활에 거부반응이 생깁니다. 이유는 사람마다 다양할 것입니다. 시인이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친다”고 말한 것처럼 삶에 큰 고통이 찾아올 때 신앙이 식을 수가 있습니다.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삶이 왜 이리 고달프냐는 탄식이 신앙의 열정을 삼켜버립니다. 시인이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다”고 하듯이 하나님께 기도했음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 신앙이 식어버릴 수 있습니다. 적절한 때에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지만 전혀 기도 응답이 없는 삶이 이어지면서 신앙 생활이 불편해집니다.

시인은 “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다”고 말합니다. 삶의 어려움과 기도 무응답 수준을 넘어 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데도 오히려 비방과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수치가 얼굴을 덮었다’는 것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굴욕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다”고 자신의 심경을 밝힙니다. 이런 수치와 모욕을 겪으면서도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 무엇도 주를 향한 우리의 열심을 꺾을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고통 분담” (시편68편 묵상) – 5/23/2020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확인합니다. 성경의 첫 장만 보더라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당황케 하는 것은 세상이 심하게 망가졌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세계가 죄로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반역과 거짓, 미움과 살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처지가 대비되면서 성경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그것을 배격하는 사람들의 저항이 계속 충돌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사람의 힘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과 싸우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은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어나시는데 어느 누가 감히 저항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인은 “연기가 불려 가듯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란 기도를 합니다. 악인의 멸망을 구하는 기도가 왜 나오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일어나심에도 원수들이 흩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실력이 줄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시인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 앞에서 행하신 장면을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다”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신데 악인들은 여전히 활동하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고민합니다. 노아 홍수 때처럼 왜 악을 완벽히 제거하지 않으시는 것인지, 악인을 왜 이대로 살려놓고 계시는지를 놓고 미로를 헤매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전능한 분이신 하나님이 지금 누구의 아버지라 하나요? 누구를 위해 지금 일하고 계신다고 하나요?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독한 자, 갇힌 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아와 과부가 생기지 않도록 하시면 모든 것이 깔끔히 해결될텐데 왜 굳이 이들의 아버지로 계시는 것일까요? 시인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말합니다. 능력이 무한하심에도 가장 나약한 존재의 아버지로 계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우리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통을 분담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애정만큼은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짐을 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가난한 자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고통 분담이 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은혜로 우리는 오늘도 힘을 다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05/17/2020 교회소식

  1. 기도요청: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주일에 가정 예배로 드리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안전을 유지하면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주일 가정예배: 주일 예배 순서를 따라서 각 가정에서 가급적 주일 낮 1시에 참여하시되, 여의치 않다면 주일 어느 시간이든 반드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3. 온라인예배: 교회 홈페이지(www.ebctl.org)에 온라인 예배 순서가 올라와 있습니다.
  4. 매일시편묵상: 시편 묵상할 글들이 목회 칼럼으로 교회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 유익과 경건의 시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5. 성도간의 교제: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간의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격려와 위로의 전화나 문자를 주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6. Stay at Home Orders: 주정부는 5월 말까지 자택 대피령을 연장했습니다.  

“거룩한 도구” (시편67편 묵상) – 5/22/2020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복을 주시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창세기12:2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말씀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아브라함 개인만 보면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큰 민족, 창대함’ 등은 당시 문화에서 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복들입니다. 이것이 전능하실 뿐 아니라 약속을 완벽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아브라함은 말 그대로 복덩이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덩이가 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합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을만한 어떤 비밀을 갖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12:3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십니다. 아브라함 개인의 영화를 약속하신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일 것이란 말씀입니다. 아브라함 개인에게 복이 넘쳐 그것이 밖으로 흘러 모든 민족에서 흘러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복덩이가 된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셔서 자신을 세상에 알리시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이는 것이 아브라함 인생의 최고의 복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삶이 평탄하지 못하고 수많은 고생을 함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쓰였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시인은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 기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태평의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은 항상 건강하고 평탄하고 사업이 번창하고 안전한 곳에 사는 것으로만 보는 현대인의 관점과 거리가 멉니다. 시인의 바램은 하나님이 모든 나라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개인의 물질과 건강의 복을 기독교의 하나님을 통해 얻는다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같은 연약하고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사용하셔서 세상에 자신을 알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는 모든 신앙인이 품고 살아가야 할 비전 기도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모든 복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느냐를 이 비전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모든 민족들의 찬송을 받아야 할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기뻐할 뿐 아니라 즐겁게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도구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위대한 일” (시편66편 묵상) – 5/21/2020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사람들은 감탄을 쏟아냅니다. 파란 하늘 위에 흰 구름들이 멋지게 펼쳐진 모습에 감탄하기도 합니다. 석양에 비친 하늘의 오묘한 색채에 눈을 뗄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인류는 누리고 있습니다. 인류의 개발로 인해 자연이 손상을 입어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시인의 말처럼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내라”는 말은 매우 옳은 표현입니다.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장면을 떠올려보십시오. 그들이 “걸어서 강을 건넌” 장면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시인은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시인은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하나님의 창조를 더욱 조롱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힘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신화나 미신으로 추락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반응하고 계신가요?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들으신 하나님은 모욕감과 수치심에 우리를 포기하신 것일까요?

시인은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신다”고 밝힙니다. 단련하시는 방식에 대해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해도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시인은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구원이 실제로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 있음을 증언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를 조롱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우리는 시인처럼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과 웅장함, 사람들의 반역에도 긍휼을 거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와서 보라”고 초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을 알리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세상에 알리도록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한다”고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업적과 공헌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배와 전도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전하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이것을 드러내고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자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