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시편18편 묵상) – 4/1/2020

우리는 사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가 되면 자식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도 넓을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낌없이 베풀고 싶은 넓은 마음이 생기는 것을 경험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정도에 차이는 있습니다. 부모의 자식을 향한 사랑과 자식의 부모를 향한 사랑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부모를 사랑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 절대 미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성격, 내용, 깊이 등이 다를 수 있지만 사랑하면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이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넓어지기에 세상이 더없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은 활기가 넘치고 생동감이 느껴지며 밝은 표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로 멸망이 아닌 영생을 얻도록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예수님을 통해서 체험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사랑을 철저히 예수님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체험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넓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까요?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 라고 그의 확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시편 저자는 과거만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이 그의 삶 속에 들어와 계심을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여호와는 살아계신다”면서 “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실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런 확신을 품고 있으면 기도에 자신감이 붙습니다. 시편 저자는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다” 해도 “내가 환난 중에서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사망의 올무란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가족 전체가 위험에 처하는 것, 경제 활동 중지로 인한 재정적인 압박 등일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올무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킬 수가 있을까요? 이러한 압박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확신과 기도 속에서 더욱 신앙적으로 단단해질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고 기도를 통해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 (시편 17편 묵상) – 3/31/2020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목표가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항상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성향을 말합니다. 때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힘들어해도 목표가 있어서 다시 힘을 내고 그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즐기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표가 사라지거나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면 삶이 따분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매사 의욕을 상실한 사람처럼 보이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 달리다보면 하루가 손살같이 지나갑니다. 남들과 똑같이 24시간을 사용하는데, 두 시간처럼 여겨질 정도로 빨리 지나가는 것을 느낍니다. 뒤를 돌아볼 시간도, 자신을 성찰할 시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이 바쁘기만 하지만 지루해 할 틈도 없기에 나름 의미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현대 사회의 삶의 한 단면인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바이러스로 인해 모든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회 전체가 마비되었을 때에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까요? 모든 사회 활동이 멈추고 생필품 구입 외에는 외부 출입을 못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의 하루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우리는 자아 성찰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가를 돌아볼 시간을 얻은 것입니다.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감출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 마음 상태가 어떤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쁜 일상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치 않을지라도 지금은 한가로움을 보약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가로움이 지루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닌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라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달라”는 간절함으로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도하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들여다봅니다. “주께서 나를 판단해달라”고 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나를 감찰하셨다”고 말합니다. 기도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직히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그는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있는 그대로 고백합니다. 그는 주의 길을 지키려고 무척 노력했기에 이런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감찰하지만 자신의 의로움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여 내게 귀를 기울이여 내 말을 들어달라” 고 합니다. 그는 “여호와여 일어나 나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합니다.

바쁘게 살다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생긴 지금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따뜻한 격려의 말” (시편 16편) – 3/30/2020

우리는 듣기만 해도 힘이 되는 말에 목말라 합니다. 그냥 듣기 좋은 말이 아닌 마음을 울리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어합니다. 단순한 칭찬의 말일지라도 사람을 기분좋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격려의 말은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마음 속 깊숙히 들어온 격려의 말은 오랜 시간 우리의 마음을 살찌우는 마력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이 정도로 강력한 격려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나친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장황한 말로 기분 좋게 해준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장된 표현과 비현실적인 칭찬은 진실성에 의문을 품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심어린 격려의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격려의 말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웁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기에 우리의 기분만 좋게 해 주는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깊은 속까지 꿰뚫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겉모습만 보고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완벽해야만 칭찬해 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러했다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맞는 격려의 말을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약하면 약한대로, 실수하면 실수한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우리의 수준에 맞게 격려의 말을 해 주실 수 있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따뜻한 격려의 말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시는 하나님께 깊이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지 그는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고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라 고백합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 옆에 바짝 붙어있고 싶어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찬 모습이 부럽기만 합니다. 시편 저자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항상 가까이서 뵙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켜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이 정도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싶어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격려의 말로 채워진 영혼은 하나님과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강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시편 저자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나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게 합니다. 이런 마음이니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따뜻한 격려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영혼을 살찌우는 격려의 말을 듣고 새로운 힘을 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이러한 갈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03_29_2020 엡6_10-13 “영적전쟁”

제목: 영적 전쟁 (엡6:10-13)

성령의 열매에 이어 영적 전쟁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 한다. 영적 전쟁의 적은 마귀이다. 마귀는 보이지 않지만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되 그 힘이 막강하다. 우리 교회는 거룩한 성도, 활기찬 교회 이루기 위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서 이 땅에서 활동한다. 죄와 죽음을 무기로 세상을 통치하는 마귀의 일을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멸하셨다. 과연 우리는 그에 맞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귀는 우리의 원수이다. 어떻게 대적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해질 것을 당부한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할 뿐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영적 무장을 해야 한다. 단지 우리의 능력과 실력으로 할 수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강해져야 한다. 우리의 경험에 의존하면 무조건 진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강해져야 한다. 어떻게 강해질 수가 있는가? 본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당부한다. 이것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영적 무장이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느냐에 대해 바울은 세밀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옷을 입어야 영적으로 무장할 수 있는지를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강해짐을 명심하자. (나눔) 여러분은 영적 승리를 위해 어떤 측면이 보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뿌리 깊은 신앙” (시편 15편 묵상) – 3/28/2020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미국 전체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위기 의식은 점점 더 고조되고 있습니다. 외출금지 명령이 내려진 주(state)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집에만 있으면 안전하다고 하지만 기약없는 기다림에 사람들이 점점 지칠 수가 있습니다. 국가가 개인 살림에 현금으로 도움을 주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일시적인 위로를 얻을 수 있지만 단방약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경제 활동의 위축은 개인을 넘어 국가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매우 자명합니다. 마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길을 무작정 걸어가는 불안감이 밀려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안정일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에 집중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바이러스로 인해 안전 지대가 없는 현 시대의 상황에서 우리가 회복할 것은 마음의 안정입니다. 불안을 이겨낸 마음을 회복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깨끗해질수록 우리의 신앙은 굳건해질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주의 장막, 주의 성산’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축복이 넘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에 머물수 있다는 사실은 신앙인에게는 가장 가슴벅찬 일입니다.

하지만 주와 함께 거하는 축복을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얻었지만 마음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흔들리면 더 이상 그것이 축복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혹시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는지 점검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안에 들어가 있지만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려서 매일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불행을 맛보는 신앙인들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뿌리 깊은 나무처럼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면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이 시편 전체에서 흔들림없이 신앙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런 일을 행하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행하는 자’란 신앙이 단단해지려면 행동하는 신앙을 평소에 갖추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기 위해 우리는 실천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뿌리 깊은 신앙을 갖고 있어야 우리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몇 가지 행동 지침이 아니라 삶의 방향, 목표가 주님을 향할 때 뿌리 깊은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며 행동에 옮긴다면 보람있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시편 14편 묵상) – 3/27/2020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물질의 가치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회이기에 교회도 깊이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물질의 힘을 우리는 어디서든 느낄 수가 있습니다. 경제는 민심의 척도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는 단순히 질병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나라 경제를 멈추게 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타격이 바이러스처럼 나라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무엇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물질은 우리가 의지하는 매우 중요한 삶의 기둥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주의 사회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물질 자체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질을 숭배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물질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지는 존재로 전락해버립니다. 시편 저자는 당시 사회가 “하나님은 없다”는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음을 고발합니다. 물론 지금과 다른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을 것입니다. 이유가 어떠하든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에 대한 무례한 태도는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교회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회에서 어떤 태도를 유지해야 할까요?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신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면밀히 살피고 계십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은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찾는 자’란 누구일까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 삶 깊숙히 개입하심을 믿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적인 감각을 지닌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무신론 사회라해도 엄연히 존재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 당시의 사회만이 아니라 현재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사회가 마비된 곳에서도 믿음의 눈을 갖고 있는 분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은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고 저항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도 믿음의 눈을 갖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실 뿐 아니라 역사하십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시편 저자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신다”고 말하듯이, 우리를 사로잡는 모든 세력으로부터 구출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성경 시대처럼 지금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구원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무신론적 사고 방식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 인생을 살피고 계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시편 13편 묵상) – 3/26/2020

구약 성경 중 전도서를 보면 매우 놀라운 지혜들이 넘쳐납니다. 그 중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이것은 인류의 진보를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새로운 발명들이 출현하는 문명 사회에서 이 말씀은 비현실적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업적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서가 말한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접근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과연 새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도 상상하지 못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실 수 없는 유한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처음과 끝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바이러스의 공격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슈퍼급 전염성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으로 위축된 세상 속에서 과연 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면 될까요?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절대로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을까요? 바이러스에 걸리면 하나님이 버리신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바이러스에 걸리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바이러스에 걸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거나 외면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바이러스가 신앙의 기준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바이러스를 기준 삼으면 하나님은 주변으로 밀려나고 바이러스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연약해서 시편 저자처럼,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라고 탄식합니다. 이것은 연약함의 표현이지만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과 두려움, 불안에 휩싸여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신을 얼마든지 표출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지 못하시니 우리 스스로 보호하자는 불편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출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이 떠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바이러스로 인해 사망의 잠을 잘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과연 누가 담대해질 수 있을까요?

시편 저자는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가 하나님을 이긴 것처럼 기세등등합니다. 교회도 바이러스가 하나님을 이겼다고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공적 예배가 중단되고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되고 기도 모임이 힘을 잃었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바이러스 앞에서 무장해제된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시편 저자는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 다짐합니다. 지금이 우리 신앙의 상태를 점검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주의 사랑을 의지하는지,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확실하면 잠시 주춤하고 위축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할 때” (시편 12편 묵상) – 3/25/2020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회복된 후 인터뷰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 회복된 것에 감사하면서도 가장 괴로운 것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주변의 차가운 시선입니다. 바이러스 환자를 죄인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두려웠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음에도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뿐 아니라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이러스 감염자들도 희생자들인데, 마치 가해자인 것처럼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감염된 환자로서 약자임에도 전염성 때문에 격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치이지만 차갑고 매정한 눈으로 보는 것은 2차 피해를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약자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이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5절에서,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심을 강조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직접 일어나 그들을 도우실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희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주어져 그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가 가련한 자들, 궁핍한 자들을 더 누르고 더 아프게 했던 것입니다. 감염환자들을 죄인 취급함으로 마음의 상처를 깊게 내는 지금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비슷합니다.

시편 저자가 살던 당시 사회에 과연 이웃을 품을 수 있는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까요? 저자는 1절에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진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사회에 가짜 뉴스가 난무하면 사회적 분위기는 냉랭해지고 비열해집니다. 저자는 8절에서,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을 때”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 일들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진실에 기초하지 않고 괴소문에 마음이 사로잡혀 약자들을 더욱 괴롭히는 사회는 불행합니다. 과연 지금의 사회는 어떠한가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가짜 뉴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가장 두려운 일은 감염자들이 죄인취급당하는 것입니다. 전염성 때문에 격리하고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분노와 화풀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짓을 말하는 자들은 4절처럼, “우리의 혀가 이기리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겠느냐”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약자들을 짓누르고 없는 자들을 탄식케 하는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과연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할까요? 약자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어나 약자들을 안전한 지대에 두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7절,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우리 사회에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감염자들도 희생자이며, 따뜻한 위로가 필요함을 우리는 알지만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감염에서 회복되었음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것 또한 그들의 아픔을 알지만 용기가 없어 품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움츠러들기보다 어깨를 펴고 용기를 갖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03_22_2020 갈 5:22-24 “절제의 열매”

제목: 절제의 열매 (갈5:22-24)

우리는 절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절제와 무절제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과연 성령의 열매인 절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절제가 필요하실까요? 하나님은 완벽하시기에 절제를 연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절제하셔야 했을까요? 죄가 없으신 분으로 사셨기에 절제를 연습하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절제는 인간 고유의 영역입니다. 세 가지 영역에서 절제가 필요합니다. 육체의 정욕, 혀, 분노는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는 유혹들이기에 더욱 절제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은 신앙이 최고의 수준에 있어도 찾아옵니다. 다윗은 최상의 신앙 상태에서 육체의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다.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강제로 취했습니다. 혀의 절제는 언어 생활인데, 야고보는 ‘혀는 불의의 세계’라 했고,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절제력을 발휘해야 할 영역인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분노는 반드시 승리해야 할 영역입니다. 분노의 표출로 사람들이 상처입기에 신앙인으로서 성령의 힘에 의존하여 그것을 절제해야 합니다. 분노가 거룩해 보여도 통제하지 않으면 불의를 생산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절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 심으시는 거룩한 열매입니다. 절제는 우리로 활기 넘치는 교회를 이루게 합니다. (나눔) 여러분의 절제의 삶은 어떠한가요? 어떤 영역에서 절제가 필요한지를 서로 나눠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