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적 시골은 화장실이 바깥에 있었기에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저희 사형제는 서로 품앗이 하듯이 짝을 지어 화장실에 같이 가곤 했습니다. 둘이 함께 가면 두려움이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나보다 약한 동생을 데리고 감에도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보지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혼자 보다는 둘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의 두려움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짓누릅니다. 우리는 보호 장치를 마련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를 보호해 줄 그 무엇인가가 있다면 든든함을 넘어 깊은 안도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추구합니다. 안전한 삶을 무너뜨리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공격해 들어오면 우리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지만 곧바로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줄 존재를 찾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찾아가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할 분이십니다. 시편 저자는 1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피신했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앙인이 경험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어려움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아픔 또는 역경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우리의 특권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께 피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웃습니다. 저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1절에서,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피했는데, 다른 곳으로 도망하라니 이보다 더 모욕적인 조롱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이 짓밟히고, 내 명성에 금이 가는 것으로 모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피난처로 여기는 우리의 신앙이 조롱당할 때 더 큰 모욕을 느낍니다. 하나님께 피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조롱섞인 말에 우리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우리를 조롱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며 우리의 삶을 현미경 보듯이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 시편 저자는 4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하면서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신다”고 확신있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감찰하십니다. 우리는 세상과 달리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살아갑니다. 지금과 같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이겨나갑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의 파워입니다.
바이러스로 인한 위축과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순간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보고 계심을 믿으며 그분을 피난처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