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사회에서 공감 능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안전이 가장 중요하기에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시간 낭비인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이의 감정에 공감하고 격려하는 일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현실에서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극대화되는 디지털 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과의 공감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그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들여다본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정서 교류가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줍니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 세계가 어떠한지를 정직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누구의 간섭도 용인하지 않는 자신만의 세상을 꿈꾸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의 내면의 세계는 하나님과의 정서적인 공감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인은 개인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라면 위험하기에 개인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미래를 고민하며 정서적인 건강을 위해 사색과 독서를 한다면 멋진 시간 활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과의 정서적인 공감 능력을 키우는 일에 개인의 시간을 활용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독려합니다. 그것은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옴”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잊고 하나님만 바라보려는 그의 노력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시인의 노력에 어느 정도로 공감하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의 시간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정서적인 공감이 주는 유익에 대한 확실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흔들어놓는 사건과 사고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시인도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는 삶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 그는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할”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흔들리는 마음을 붙드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평소에 하나님과 정서적 공감을 누리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삶이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합니다. 우리는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는” 열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심”을 확신할 때 우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