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 사는 것은 축복입니다. 언론의 자유가 억압당한 사회와 비교할 때 그것의 가치는 더욱 커집니다. 하지만 자유만큼 중요한 것이 책임을 지는 자세입니다. 말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낀다면 한 마디 말일지라도 신중하게 할 것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은 언어 생활에 대한 책임을 얼마나 크게 느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의 예로, 말의 자유와 책임을 적절히 균형잡기 위해 우리는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침묵은 단순히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말할 수 있음에도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침묵은 비겁한 행동으로만 평가될 수 없습니다. 침묵은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십 년 동안 미디안 땅에서 살아가던 모세에게 어느날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때 모세의 나이가 팔십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은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모습을 가장 잘 드러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지셨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셨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하신 약속을 신약의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것만 보더라도 충분합니다.
자유롭게 말씀하시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시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침묵하면 안될 것 같은 상황임에도 하나님은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시인은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어” 교만하게 행동할 때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란 기도를 합니다. 주의 원수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고 말하면서 주의 백성을 치려고 간계를 꾀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는” 위급한 상황에도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자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라면서 탄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침묵에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의 위급한 상황이면 당장이라도 해결하셔야 할 것같은데도 하나님은 조용히 계십니다. 급한 불은 꺼야 하는 우리의 심정과 달리 하나님은 너무도 조용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란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좌절하거나 실망하기보다 ‘침묵하지 말아달라’는 애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드리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 신앙에 보약처럼 쓰이려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침묵하지 마소서”란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뚫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신앙 성장의 소중한 동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