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시대에 성경은 여러 가지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창조 이야기입니다. 과학과 창조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과학적 방식으로 증명할 수 없는 창조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에게 이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창조와 과학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하다 교회에서는 창조를, 교회 밖에서는 과학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 안에 과학이 하나의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창조 세계를 연구하면서 발견 또는 발명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을 이성으로, 창조를 신앙으로 이분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입니다. 창조의 시각으로 과학을 연구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과학의 지식으로 창조 세계를 올바르게 이해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날 것이기에 창조를 믿는 이들에게 과학은 매우 중요한 학문입니다.
오늘의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웅장한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입으셨나이다”고 하면서 자연 세계인 빛, 물, 구름, 바람, 땅에 펼쳐진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과학 이전 시대이기에 시적으로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적인 표현을 과학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시를 시로 이해해야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란 표현입니다. 과학적 시각으로는 시인의 느낌을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아름다운 장면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른 예로, “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는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 올랐으나”란 표현입니다. 얼마나 시적으로 멋지게 표현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철저히 하나님의 작품임을 독자들이 감성적으로 느낄 수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고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왜 하나님의 세계인지를 시적인 감성으로 절묘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도 자연 세계를 보면서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라고 탄복할 수 있다면 시인의 감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심”을 알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시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즐거워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있는지를 점검할 때입니다. 망가진 세상, 불의와 죄악이 들끊는 세상, 거짓과 더러움이 솟구치는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의 세계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는 시인처럼 우리도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세계를 행복한 눈으로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