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작은 것에 감사하는지, 아니면 불평하는지도 모르는채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감사 없이 불평만이 가득한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는 이런 경향이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감사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기에 특별히 어느 한 쪽에만 기울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집니다. 바울이 말한, “범사에 감사하라”를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범사’란 ‘모든 일’을 뜻하기에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이냐면서 볼멘 소리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이 귀한 권면을 가볍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이 추구하는 것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를 빼앗는 그 어떤 생각, 상황, 환경도 변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건강한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의 시편은 우리에게 풍성한 감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각 절이 동일한 패턴을 밟고 있습니다. “감사하라” 다음에 그 이유를 제시하면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합니다. 특징적인 것은 감사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가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와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를 비교해 보십시오. 본문을 보면, 감사의 이유는 같지만 감사의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행하셨느냐에 있어서는 매우 다양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시지만 그 사랑을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표현하시는지에 대해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각 절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풍성한 감사가 어떻게 우리 안에 형성되는지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옛날 믿음의 선배들이 경험한 것을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얼마든지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도 창조와 출애굽, 광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깊이를 언급한 후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주신 이에게 감사하라”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합니다. 시인이 어떤 비천함에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과거 믿음의 선배들이 노예란 비천한 상황에 있을 때에 그들을 기억하시고 구출해내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자신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시인의 대적이 누구인지, 어떤 세력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광야에서 유명한 왕들을 죽이시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도 그 일이 일어난 것을 두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더 넗게 “모든 육체에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면서 일반 은총으로 세상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사의 폭과 깊이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감사를 넗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묵상하면서 그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매일의 삶에서 풍성한 감사가 넘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