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을 걸을 때 경계심은 더욱 커집니다. 위험한 지역을 지날 때에는 경계하는 마음이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경계심은 자신을 보호하는 매우 중요한 방어 본능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경계심을 가장 극도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 특정한 지역, 특정한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경계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의 속도를 늦추기 위한 방안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같이 사는 가족 외에 어느 누구와도 적어도 2미터 거리를 두라는 방침은 실제로 전염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치료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계속해서 유지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계심을 정당화시켜주며 모든 사람들을 멀리하도록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경계심은 피해를 입을 것과 피해를 줄 것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지만 모든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보게 만듭니다. 이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부작용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한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계속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해야 할 상황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경계심이 우리의 신앙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축복의 말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혹시 바이러스 보균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는 신앙적으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축복의 말을 중단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바이러스 보균자일지라도 그를 축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만약 상대방이 우리와 같이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우리는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환난 날에”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는 모습입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요? 우리는 어쩌면 환난 날을 통과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경계심만을 키울 뿐 환난 날에도 우리가 서로를 축복해야 함을 놓친다면 신앙적으로 너무 큰 불행입니다.
환난 날임에도 시편 저자는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한다” 면서 기도의 삶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축복의 말은 아무 효과도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을 이제 내가 안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오른손으로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심”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축복의 말을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우리가 축복한대로 이루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축복의 말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시기이나 우리는 서로를 향해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전화나 문자를 통해 누군가를 축복할 기회가 있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