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실용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 쓸모 있느냐로 가치를 판단합니다. 진리일지라도 유익을 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뭔가를 희생할 수 있지만 더 큰 유익이 주어져야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신앙도 유익하냐로 판단합니다. 내 삶에 유익하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려야 합니다. 물질적인 유익을 주든가 마음의 평안을 주든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도 나에게 유익하냐로 판단합니다. 나에게 도움을 주고 문제를 해결해주며 어려움을 미리 예방해주는 하나님일 때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더라도 나에게 유익이 될 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할 때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마치 힘 센 친구를 옆에 두는 것만으로 든든해 하는 심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셔야만 된다는 심리가 강합니다.
나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아 돌아가라 하셨다”는 시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어떤 시각으로 보시는지를 보여주는 말이지만 불편하게 들립니다. 시인은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라 하면서 우리 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 말합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생의 차이를 확실히 드러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은 아침에 돋는 풀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평가할 때 시인은 “우리의 연수는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다”고 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는 인생임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날카로운 평가입니다. 유익이 되느냐로 하나님의 존재를 판단하는 모든 시각을 부끄럽게 만드는 놀라운 묘사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이란 하나님 앞에 선 인생이 들의 풀 정도에 불과함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은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마음인데, 시인은 이것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풀에 불과한 인생임을 아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식 차원에서 어떤 이야기를 아는 정도로 만족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수준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며 오직 그 분에게만 충성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은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라면서 우리가 지혜로운 마음을 얻을 때 가능하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은 우리의 모든 실용적인 사고 방식을 뒤집어놓습니다. 결과로 진리를 판단하거나 유익함으로 하나님을 접근하는 모든 태도를 바꿔놓습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