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복을 금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인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면서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들에게 마땅한 벌을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편 전체를 보면 악인을 심판해달라는 기도가 의외로 많습니다. 과연 신약과 구약은 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인은 스스로 복수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인의 편만 들어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공평함을 시인은 너무 잘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판단에 맡긴 것입니다.
시인은 개인의 복수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께 복수해달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고민은 악인의 횡포가 너무 길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란 절박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악인의 질주는 “그들이 마구 지껄이며 오만하게 떠들며 죄악을 행하는 자들이 다 자만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만듭니다. 악인의 횡포에 신음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합류하여 정의를 무너뜨리는 이들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이 유예되거나 실행되지 않으면 사회를 뒷받침하는 정의는 얼굴을 감출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사회 정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나서달라고 간청하는 시인의 마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시인은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소유를 곤란하게 한다”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 중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협박을 받고 물질적 피해를 당하며 심한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에도 정의가 무너진 사회는 전혀 보호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악인의 횡포 사이에 낀 존재로서 신앙인은 깊은 신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의 무신론자에 의해 하나님은 심각한 모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분개한 것입니다. 그는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면서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시지 아니하시랴”고 강한 어조로 하나님의 심판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시인의 말처럼 하나님 편에 서서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라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을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우리가 갖는다면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실”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