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가 ‘요나 이야기’입니다. 요나의 불순종과 고집스러움이 부각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에 있는 요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극적인 장면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요나의 모습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요나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란 근거로 삼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음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장면입니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고 말할 정도로 요나는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오늘 시편을 지은 시인도 비슷한 인생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고 합니다. ‘깊은 곳’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은유적으로 그의 상황을 표현한 것입니다.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살려달라고 몸부림을 치는 소망적인 행위입니다.
시인은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삶의 현장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기도가 아니라 그 곳에서 벗어날 때까지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란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그의 심정은 절망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절망하면 그 다음은 없다는 절박감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깊은 곳’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란 확신이 시인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몸부림 속에서 그는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란 질문에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고 답하면서 자신 안에 있는 죄악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은 절망을 더욱 깊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죄책감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단하기 위해 시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자신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신앙적 싸움을 우리는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절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시인처럼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깊은 곳에 빠진 상태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은 이런 소망을 붙잡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지점입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시인의 모습에는 소망으로 절망을 이기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소망은 절망을 꺾는 유일한 힘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의 행위는 깊은 곳에 처한 절망도 이겨내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넘치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깊은 곳에서라도 우리에게 차고 넘칠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기치 못한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