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파력” (시편75편 묵상) – 6/1/2020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있는데 어느 것을 먼저 듣고 싶냐는 질문을 들으면 우리는 살짝 고민을 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각자 이유가 있습니다. 선택을 어떻게 하든 변하지 않는 것은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먼저 듣든지 두 개의 상반된 뉴스는 들려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나쁜 뉴스를 무효화시킬 정도로 좋은 뉴스가 강력하다면 우리는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전하는 소식은 두 가지입니다. 심판과 구원입니다. 이 둘은 절대 나쁜 뉴스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구원을 좋은 뉴스로, 심판을 나쁜 뉴스로 여깁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든 구원과 심판은 그들에게 들려져야 할 뉴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서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구원과 심판의 뉴스가 동시에 등장합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운 것’은 구원의 뉴스입니다. 구원을 체험한 이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세상에 전파합니다. 하지만 구원이 필요한 이유가 없다면 절반의 뉴스에 불과합니다. 구원은 심판이 있기에 빛이 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 뉴스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구원은 빛을 잃게 됩니다.

구원과 심판 소식은 둘 다 좋은 뉴스입니다. 시인은 당당히 “내가 오만한 자들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 하며 악인들에게 뿔을 들지 말라 하였다”고 밝힙니다. 그는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이것은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신다”는 확고한 신앙관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낮추시기에 시인은 담대하게 ‘오만한 자들과 악인들’ 에게 오만하게 행하지 말라거나 뿔을 들지 말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인 자만이 구원에 동참할 수가 있습니다. 심판의 뉴스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심판이 없는 구원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세상에 들려져야 할 좋은 뉴스입니다.

하나님의 뉴스는 사람들에게 들려질 뿐 아니라 그들의 입을 통해 전파되어야 합니다. 시인이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한다”고 말하듯이 주의 구원과 심판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파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파력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기독교는 심판과 구원을 받아들인 이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전파되어 왔습니다. 기독교의 전파력을 어떤 권력과 문화와 사상도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뉴스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세계로 뻗어나갔습니다. 지금도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 앞에서도 기독교의 복음 전파력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위축될 수는 있지만 전파력이 약화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이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유일한 좋은 소식입니다. 교회는 이 사명을 어떤 상황에서도 훌륭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