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쁜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면 매우 당황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불행이 겹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구약의 욥은 당대에 완벽한 신앙을 가진 자로 소문이 난 인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열정을 아무도 막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의 신앙적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욥기서를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업이 번창하고 성품이 정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투철한 욥은 모든 이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불행이 그의 삶을 뒤덮습니다. 강도들에 의해 그의 종들과 가축들을 다 잃게 됩니다. 토네이도 같은 강풍으로 인해 그의 자녀들이 한 집 안에서 모두 죽는 비참한 사고가 발생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평생 한 번 일어날까 할 정도의 불행이 연속으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이 악성 종기가 그의 몸 전체를 뒤덮습니다. 과연 누가 이 정도의 불행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경외한 신앙인입니다. 왜 그에게 이런 불행이 겹치는지 그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불행 앞에서 사람은 무기력해집니다.
시인은 자신의 형편을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엎드려 기다리고 강한 자들이 모여 나를 치려 한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원인을 분석하면서 “이는 나의 잘못으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나의 죄로 말미암음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고 그의 삶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은 “내가 허물이 없으나 그들이 달려와서” 공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시인은 자신보다 더 강한 자들의 공격 앞에서 자신에게는 저항 능력이 없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불행이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오든, 사람을 통해서 오든 그것을 막을 힘이 없기에 그냥 앉아서 당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삶을 뒤흔드는 불행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히 막아내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가 막아내지 못해도 불행이 비껴가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뒤돌아보면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의 위험한 일들을 지나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 번 중 아홉 번을 어떻게든 피했다해도 한 번의 불행 앞에서 와르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불행 앞에서 우리는 저항 능력을 상실한채 무기력해집니다.
신앙도 불행 앞에서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을까요? 신앙은 저항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시인은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어 살펴 주소서”라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이것이 신앙이 갖고 있는 저항 능력입니다. 원수들이 달려들어 우리의 생명을 해하려고 할지라도 우리는 신앙으로 저항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힘으로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불행에 저항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이 여기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떤 위협 앞에서도 저항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 갖고 있는 저항 능력의 참된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