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행복 추구는 우리의 기본 권리입니다.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행복을 느끼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바램과 달리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사건과 사고를 만나게 됩니다. 재난 수준의 고통을 겪게 되면 죽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절망에 빠진채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시인은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다”고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것을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았다”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죽음이 코 앞에 다가온 사람으로서 겪은 고통을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재난이 없는 사회 속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개인에게 재난이 불어닥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유명한 은퇴 목사님이 최근에 폐암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힘들게 받으면서 그동안 겪지 못한 개인적 재난을 깊이 체험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개인적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종류의 재난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면 시인처럼 우리는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이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듯이 우리는 깊은 절망감에 시달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다”는 시인처럼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을 때 우리는 더 깊이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처럼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십니까”란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재난 앞에서 몸부림을 치는 우리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리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아픈데 아프지 않은 척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헛된 일입니다. 시인처럼 우리는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극심한 재난 앞에서 의연한 척 한들 우리 신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다”는 시인처럼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강함을 신뢰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달라”고 솔직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재난은 언제든지 우리 삶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개인적 재난들이 있습니다. 온 몸으로 겪는 고통은 당사자 외에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고통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어떤 재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