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에게 불행이 닥쳐오면 신앙인으로서 고민하게 됩니다. 혹시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찔림이 생깁니다. 누구에나 양심의 가책이 있듯이 신앙인에게는 독특한 신앙 양심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일종의 죄책감인데,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나 하는 감정적인 반응입니다.
개인을 넘어 국가적인 재앙이 오면 신앙인으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죄악에 물든 사회를 이런 방식으로 벌하실 수 있다는 검증되지 않은 느낌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전세계적인 바이러스 재앙이 발생하면 ‘혹시 이것은 마지막 때의 징후가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외적인 현상을 놓고 신앙적으로 판단하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당시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사고를 놓고 신앙적인 판단을 하셨습니다. 이번 바이러스의 침공으로 온 세상이 고통을 당하는 시국에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를 놓고 교회가 고민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선지자적인 안목이 있는 양 편향된 시각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오히려 배가시키는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건전한 교회는 지금의 재난 앞에서 어떻게 해야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시편 저자는 2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 합니다. 3절에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면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시대적 재난이든 개인의 재난이든 신앙인으로서 가장 먼저 반응해야 하는 자세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수척해졌다’와 ‘내 영혼이 매우 떨린다’는 솔직한 감정 표현을 들어보십시오. 남에 대한 판단 보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신다’고 솔직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고백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외롭고 힘든지를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재난에 직면한 신앙인의 영적 무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질 수 있는 특권을 우리는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재난 앞에서 피할 길을 찾는 것은 본능이지만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신앙적 결단입니다. 4절에서,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라 할 수 있는 간절한 소망을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표출해야 합니다.
신앙적 의연함은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지만 이런 저런 위기와 재난을 겪으면서 단련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의연하게 신앙적으로 대처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