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인상이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사람을 알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을 아는 일은 시간과 사건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얼마든지 넓혀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지식에 불과할 수가 있습니다. 지식은 많아질지 몰라도 인격적인 앎은 전혀 없는 빈수레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노력과 더불어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겪는 사건과 사고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쌓일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더욱 강화됩니다.
우리가 체험해야 할 신앙은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겪은 이들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겪었는지 성경 어디를 펴든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읽는 우리 자신이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성경 읽기는 매우 공허해질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공허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이 없기에 마치 사막을 걷는 기분으로 성경을 읽게 됩니다. 시인은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은혜를 구하는 기도인데, 이미 그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던” 은혜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일지라도 시인처럼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는” 고통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평탄한 삶을 살아야 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야 한다는 것은 거짓된 복음입니다. 우리는 은혜받은 것을 어떤 어려움도 피해갈 수 있는 부적처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과 아픔을 겪을 때 은혜받은 것이 소용없다는 냉소주의가 마음을 차지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우리는 “주는 선하사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후하시다”는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확신할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기 위해 우리는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를 힘들고 고달픈 상황에서도 할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다”는 확신은 흔들릴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우리를 “돕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지금도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