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에 비해 남에게 크든 작든 피해를 주는 실수가 있습니다. 운전 실수로 남을 다치게 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법을 어김으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음주 운전으로 남을 다치게 한다면 과연 실수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실수와 죄는 엄연히 차원이 다른 영역입니다. 죄를 실수로 덮는다면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힐 수가 있습니다. 물론 죄를 죄로 인정하는 일은 때론 매우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죄의 결과가 너무 크거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 때 죄를 인정하지 않고 실수로 포장하고 싶은 유혹이 커집니다. 죄를 실수로 덮으려는 우리의 욕망은 용서를 비는 당연한 행동마저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마저 빼앗아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하면서 살아갑니다. 잘못한 상대방이 낮은 자세로 용서를 구할 때 마음이 풀어지면서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피해가 너무 커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용서를 빌지 않는 상대방의 뻔뻔함을 보게 된다면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은 더 커집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용서하면서 살고 싶지만 용서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용서를 받아야 함에도 죄를 인정하지 못해 용서받지 못한 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죄를 지은 가해자 입장에서 용서받았을 때의 행복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자로서 죄를 인정하고 죄 용서를 받은 상황에서 노래한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한 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었고 그로 인해 큰 심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죄를 고백하지 않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난 경험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는 태도 변화를 보입니다. 그는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다”면서 실제적인 회개를 합니다. 그 결과로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다” 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용서의 행복입니다. 용서받은 자가 느끼는 행복을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노래한 것입니다.
용서의 행복을 맛본 사람은 “주는 나의 은신처”임을 알게 됩니다. 주의 보호 속에서 새로운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신앙의 행복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주는 즐거움은 용서받았을 때 가장 크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죄를 숨길 때입니다.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용서의 깊이를 체험하면서 내적인 평안과 영적인 희열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