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9장26절-27절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2021년 3월 16일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대화에서 설득은 매우 중요한 수단입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잘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설득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설득의 실패는 언제나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뜬 사건은 당시 유대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 눈을 뜨게 했기에 본질은 사라지고 논쟁만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눈을 뜨게 한 예수님의 능력은 깎아내리면서 안식을 범했다는 정죄만 쏟아냈습니다. 그 중심에 맹인이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대인에게 소환된 이후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당당히 말했지만 사람들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눈을 뜨게 된 과정을 있는 그대로 말해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확실한 체험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 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과 억지스러움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유대인들은 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이것은 이미 여러 번에 걸쳐 물어본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높이는 맹인이었던 사람을 압박하면서 다른 답을 나오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강압적 태도는 그를 꺾지 못했고 오히려 역공을 당하고 맙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란 질문을 던지면서 상대방을 당황케 합니다. 아무리 체험한 이야기를 말해줘도 듣지 않는 유대인들의 태도에 그는 역정이 났고 상대방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을 질문 형태로 되돌려 준 것입니다.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합니까”란 말은 핵폭탄급 파장을 불러올만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미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고자 하는 것을 보니 설마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그러느냐란 어찌보면 능청스러운 질문은 유머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위트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은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옆에서 듣던 사람들은 일종의 기분 전환을 느낄 정도로 통쾌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반격에 담긴 깊은 의미를 우리가 가볍게 넘어가면 안됩니다. 듣고 또 듣는 일이 제자됨의 중요한 요소란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듣지 않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해줘야 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비록 지금은 예수 이야기에 거부 반응을 보여도 그들은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기에 그들은 예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란 말에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 절실히 필요함을 감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줘도 소용없구나란 절망감을 맹인이었던 사람이 느꼈을지 몰라도 우리는 세상을 향해 예수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줘야 합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예수 이야기를 마음껏 펼쳐놓아야 합니다. 예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믿음이 생길 것이며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중도에 예수 이야기 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는 굽히지 않고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신 복음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말해줘야 합니다. 상대방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일이 없을 것 같아도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우리가 세상 속에 남겨진 이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