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대화를 하다가 ‘억지부리지마’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일을 끝까지 부정하려 하는 경우에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을 놓고 유대인들은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맹인으로 있다가 눈을 뜬 사실 자체를 부정하다가 여의치 않자 그 부모를 소환해서 억지를 부려보지만 그것도 실패로 끝나게 되자 이제는 맹인을 낫게 한 예수란 사람을 정죄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 놓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눈을 뜨게 된 일을 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불문율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예수란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동시에 예수를 정죄하는 그들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구태여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파헤치는 순간 쓸모없는 논쟁에 휘말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너무도 명확한 자기 입장을 내놓습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는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고 말합니다. 이는 너무도 현명한 처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냐란 논쟁보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시 언급함으로 논란을 끊어내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유대인들에 맞서서 ‘어떻게 예수님을 감히 죄인이라 말할 수 있느냐’고 따졌어야 한다고 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이 순간 대단한 용기를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인 논쟁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행위 자체를 덮으려는 유대인들의 치졸함에 맞섰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죄인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가 눈을 뜨게 한 사실 자체입니다. 쓸모 없는 논쟁에 에너지를 소모하기 보다 이미 일어난 사실 자체를 통해서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아닌 하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고 억지 주장을 펼쳤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란 사람이 눈을 뜨게 한 장본인임을 강력히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유대인들의 사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지만 맹인이었던 사람은 그런 복잡한 생각보다는 예수란 사람이 자신의 눈을 뜨게 했다는 점만을 강조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란 사람이 해냈으니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를 선지자로 보았던 것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예수를 죄인으로 정죄해도 그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과 그것을 일으키신 예수란 사람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모습입니다.
모두 다 반대하는 곳에서 외로이 찬성표를 던지는 행위는 힘든 일입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 편에 서서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은 더욱 성숙해질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이것에 실패하면 우리의 신앙은 자기 만족에 그치는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용기 있는 신앙의 행동은 반대에 부딪힐 때 빛이 납니다. 예수 신앙을 비난하고 업신여기는 사회 또는 개인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영생을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새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해주셨는지를 잊지 않아야 이렇듯이 용기 있는 신앙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오늘도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감격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