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9장18절-19절 “진실을 가리려 하지만” 2021년 3월11일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숨기려는 인간의 욕망을 날카롭게 지적한 말입니다. 이러한 행위를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뜬 사실 자체를 지금 부정하려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이것은 보고도 믿지 않는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당사자가 ‘내가 맞다’고 함에도 그들은 극구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그들의 자세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그들의 심정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실이 밝혀지면 뒷감당을 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가려는 그들의 의도가 어긋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를 영웅으로 추앙할 수가 있음을 그들은 너무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맹인이었던 사람도 예수를 ‘선지자’로 추앙하고 있기에 맹인이 눈을 뜬 사실 자체를 묻어버려야 하는 절박함이 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을 부정하고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그들은 당사자를 제쳐두고 그의 부모를 소환해서 취조합니다. 맹인의 부모를 불러다가 이상한 질문을 그들은 서슴없이 합니다.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두 개의 질문을 연달아 했는데, 앞의 질문은 부모로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맹백한 사실과 관련이 있지만 두 번째 질문은 얼마든지 다르게 말할 수 있는 해석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부모로 하여금 빠져나갈 수 있게 해놓은 동시에 맹인으로 눈을 뜬 사실에 예수가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교묘한 질문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뜬 사실 자체보다 예수가 그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유대인들의 의도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을 부정하면서까지 그들은 진실과 마주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진실이란 예수가 곧 하나님이 보내신 세상의 구세주란 사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들은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면서 극구 부인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맹인이 눈을 뜬 것을 보았고 당사자의 고백을 들었음에도 끝까지 그 진실을 숨기려 하는 그들의 고집스러움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고집스러울까요? 이에 대해 바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네가 쌓는도다.”(롬2:5) 이것은 지금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 눈을 뜬 사실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의 고집스러움을 그대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으로 강퍅해진 유대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거부 반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고집스러움에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고집스러움이 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필요한 고집도 있지만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 있어서는 쓸모 없는 고집을 부려서는 안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집으로 진실을 가리려 하지만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집을 꺾고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삶을 위해 우리는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잘못된 고집을 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론 우리의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지만 그럼에도 예수님 앞에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로 잘못을 인정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은혜속에서 살게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