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눈 앞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면 잠시 동안은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상황 판단 하기가 쉽지 않고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맹인으로 태어나 구걸하던 사람이 어느날 건강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를 놓고 사실 관계를 확인합니다. 진짜 맹인이었던 사람이 맞느냐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눈이 떠졌는지,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란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지듯이 물어봅니다. 비록 이 기적을 일으킨 예수란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만나야 할 사람 보다는 전혀 엉뚱한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고 합니다. 이들은 왜 하필 바리새인들을 찾아갔을까요? 그것도 눈을 뜬 맹인을 강제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유는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에 따르면 진흙을 손으로 반죽하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판단하고 바리새인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안식일 위반이 눈을 뜨게 한 일보다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과연 이들의 판단과 행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실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한 행위가 구약 성경이 말하는 안식일 준수를 어긴 것은 아니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그런 행위를 범죄로 규정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이 얼마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지를 충분히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 준수를 어긴 것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진흙을 사용해서 고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보는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 보다는 당시 사회를 쥐락펴락했던 바리새인들의 판단이 그들에게는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아닌 바리새인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켰느냐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것보다 더 중요했던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들이 지켜온 전통에 사로잡힌 나머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불행인지를 그들 자신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마치 태양을 포기하고 전기불만 의지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더 귀하고 위대한지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모습이 더욱 더 도드라져 보입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기쁜 소식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요? 자신들이 지켜온 관습과 전통, 법칙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들 눈 앞의 문제에만 매달린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현주소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나요? 우리는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던 우리들이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찾아 만났다니 그 무슨 말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진짜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신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