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토론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질 때가 있습니다. 서로간의 공격이 도를 넘어 인신 공격에 이르면 불쾌감만 줄 뿐 남는 것이 없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기 위해 절제의 언어를 사용하셨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의도적으로 진흙탕 싸움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예수님의 인격을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고 매우 불쾌한 인신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7:20에서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면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에 했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8:44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란 예수님의 말에 그들이 역공격을 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 주장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억지 주장임에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들이 6:42에서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예수님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기위해 ‘사마리아 사람’과 ‘귀신에 들린 사람’으로 예수님을 규정한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 험악했는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극한의 대립 속에서도 감정을 절제하시면서 반응하셨습니다.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는 방어를 하셨습니다. 특이한 점은 ‘나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너무도 명확해서 구태여 언급하지 않아도 사실이 아님을 다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귀신이 들린 사람이란 오명은 확실히 벗어버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말은 귀신 들린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의 특징이기에 강력한 방어로 적합했습니다. 귀신에 들린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란 것은 예수님의 어떤 말도 귀담아 듣지 않고 있는 그들의 마음 상태를 꼬집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모욕이 얼마나 비인격적인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만큼 비인격적인 것도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조금의 존중도 없이 모멸감과 치욕만 주려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대우를 받으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너희가 나를 무시하니 나도 무시한다’는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이야기할 때 심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듯한 불쾌감은 잘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로 복음을 말하지 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의연한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날선 대립 속에서도 감정을 절제하면서 대응하는 모습은 세상 속에서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감정에 사로잡혀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달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억울함과 모욕감을 이겨내고 차분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말할 수 있는 내적인 성숙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로서 세상 앞에 서 있는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감정의 절제와 함께 진리의 수호자로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