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메시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메신저를 오염시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흠집내면 그가 말하는 어떤 메시지도 공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메신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면 메시지는 자동적으로 신뢰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공격을 예수님에게 퍼부었습니다. 본문46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죄로 책잡다’는 것은 없는 죄를 덮어 씌워 죄인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극악한 죄인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한 유대인들의 계획은 치밀했고 교묘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죄인으로 만들려 하고 있구나’라면서 적극적인 대응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이에는 이’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와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란 그의 항변이 이점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셨음을 강하게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진리를 말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게 죄인이란 오명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죄인의 입에서 나온 진리를 누가 신뢰하겠느냐란 전략을 세웠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이지만 예수님은 차분하게 대응하시면서 유대인들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란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를 말해줘도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에 그것이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인가요? 진리가 들려져도 그것을 듣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 어찌 유대인들만의 문제일까요? 지금도 얼마든지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심을 전하는 교회의 목소리에 세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진리의 목소리가 세상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무차별적으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진리를 외치는 교회가 완벽하지 못하기에 세상은 교회의 잘못을 핑계로 진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모양인데 그들이 말하는 진리를 신뢰할 수 있느냐란 볼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흠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죄인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은 이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런 흠이 있는 존재로 예수님을 세상에 외치니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완벽해질 때까지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전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흠이 있는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교회를 사용하셔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이들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속에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것을 내다보면서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최선을 다해 전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성령은 지금도 불신하는 이들 속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아무리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진리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진리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