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8장44절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2021년 2월 22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정치인들이 가끔 군중을 자극하기 위해 선동적인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편 가르기란 비판을 듣지만 자기 편을 모으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라고 정당성을 펼칩니다. 상대방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모욕적으로 들릴 정도로 심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을 근거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달리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해서 상대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것은 분명 모욕적인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당시 유대인들은 비판과 비방 사이를 오가는 복잡한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태도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온갖 비방의 말을 쏟아냈습니다. ‘미쳤다’거나 ‘거짓말한다’거나 ‘자살하려한다’는 등 감정적인 단어들을 섞어 인신 공격을 예수님에게 퍼부었습니다. 비판과 비방이 난무하는 상황이 길어지면 양 쪽 모두 잘못되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수님이 옳았고 유대인들이 틀렸음에도 둘 다 잘못이라는 양비론이 힘을 얻게 됩니다. 이런 진흙탕 싸움 속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대응하시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관성을 갖고서 유대인들을 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영적 아비가 누구인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38절, ‘너희 아비에게서’와 41절, ‘너희 아비가 행한 일’에 이어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 아비 마귀’라고 하시면서 그들의 아비의 실체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영적 실체를 드러낸 정확한 진단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모욕적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39절에서,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했고, 41절에서는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 규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스러워하던 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단어인 ‘마귀’를 사용하면서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워했을까요? 이보다 더 모욕적인 말이 없었을 정도로 유대인들은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향해 ‘바알세불’(귀신의 왕)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모욕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들이 마귀의 자녀들인지를 설명하시면서 그 근거를 제시하셨습니다.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이 마귀의 자녀들인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아비인 ‘마귀’가 어떤 실체인지를 매우 상세히 밝히셨습니다. ‘처음부터 살인한 자’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며’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의 독창적 주장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귀’가 이런 존재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마귀가 어떻게 하와를 유혹했는지를 그들은 잘 알고 있었고,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 모두 다 마귀의 후손이라는 예수님의 단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공중의 권세잡은 자가 누구냐면 ‘마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진단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아비 마귀’라고 한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이제는 마귀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따라서 마귀의 권세를 꺾고 그 굴레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세상에 전파하는 일은 축복을 나누는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이 일을 위해 부름받았음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