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8장43절 “들어도 들리지 않는” 2021년 2월 19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등산을 하다보면 출입 금지란 경고 문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위험을 미리 알려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그것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무시하고 행동하기에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할 때에 어리석다는 질책을 듣습니다. 사고당한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그 질책을 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런 심정으로 유대인들에게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추궁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이 땅에 오셨는지를 알리고 설명해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에 이렇게 질책을 하신 것입니다. 답답한 심정이 진하게 묻어있는 꾸중의 목소리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했기 때문일까요? 만약 예수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했다면 그들이 꾸중들을 일이 아닙니다. 설명이 어렵거나 부족해서 발생한 일이라면 듣는 사람의 잘못일 수가 없습니다. 설명이 뭔가 잘못되어 일어난 일이기에 듣는 사람의 책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왜 깨닫지 못하느냐’란 꾸중은 합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설명이 너무도 확실하고 선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영어 성경은 이 본문을 “내 말이 왜 너희에게는 선명하지 않는가”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의 설명은 선명했지만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준 좋은 번역입니다.

설명하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듣는 이의 책임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시면서 듣는 사람들의 반응에 커다란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뒤이어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듣지 않는 태도를 문제삼은 것이 아닙니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 부족을 지적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듣지만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상태를 꼬집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붙잡을 생각이 처음부터 그들에게 없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가장 큰 비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 마음 상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기가막힐 정도로 해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청각에 문제가 있거나 듣기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가 아니라 조금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듣고 싶어하지 않는 이에게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들려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심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움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설교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좋은 설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설교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듣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느냐에 있습니다. 듣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메시지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만큼 위대한 설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 메시지를 전혀 듣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유대인만의 문제일까요? 좋은 메시지가 없어서 듣지 않는 것일까요? 오히려 듣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듣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설교를 잔소리로 여기는 풍토가 점점 커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좋은 말씀이 계속해서 들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나마 우리에게 남은 소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마른 영성의 시대이지만 듣고 깨닫는 이들이 생기고 있기에 좋은 말씀은 계속해서 들려져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해서 좋은 말씀을 듣고 깨닫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