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8장37절 “머물 곳이 없다니” 2021년 2월 15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말은 강력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들을 때에 사람들은 깊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냥 한 번 듣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 깊숙히 파고드는 말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말이 아닌 사람 자체가 마음 속을 파고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과 함께 그 사람의 인격이 마음 깊숙히 들어와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언어를 통해 그의 인격이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일에 주력하셨습니다. 그렇기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란 말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 소통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말이 통하는 관계 형성을 하자는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격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의 말에 거하는 사람의 인격 속으로 들어가시겠다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통해 사람의 인격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거절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배척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 자체를 지워버리겠다는 무서운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자리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여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에 머물 곳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거절하는 이들의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라고 진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조금도 귀담아두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 상태를 날카롭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선생의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는 학생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실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의 고집스러움을 탄식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다’는 말은 그들 안에 진리, 생명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훨씬 더 심각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이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것은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사느냐 죽느냐란 중차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머물 공간이 없는 마음 상태는 그것 자체로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장해준다고 주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없다면 그들은 생명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유대인들이 섬겼던 하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보내셨기에 그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는’ 유대인들의 상태는 가장 큰 비극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좀 더 다른 의미로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다’는 영적 진단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그분을 위해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놓고 있는지를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많이 알고 기억하느냐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그분을 담아낼 여유가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절했던 유대인들과 달리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지만 실제로는 그분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마음 상태가 아닌지 돌아볼 때입니다. 예수님이 머물 공간이 우리 마음에 없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모든 것이 채워져도 예수님의 인격이 머물 공간이 우리 안에 없다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예수님을 둘 마음의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영적으로 살리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