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8장35절-36절 “진정한 자유” 2021년 2월 12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수님 당시 사회는 노예 제도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노예 신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노예는 자유가 없습니다. 주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노예는 스스로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란 놀라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곧 죄의 종이란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실제로는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노예임을 폭로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로 절망하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를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의 종 상태에 있음을 직시하게 함으로 무엇을 원하신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있는 사람은 그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종과 달리 아들은 그럴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란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종과 아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집에서의 위치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종은 집에서 일을 할 뿐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영원히 집에 머물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통해 종은 할 수 없는 일을 아들은 해낼 수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하신 후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에게 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종은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없지만 아들은 종을 자유롭게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란 누구일까요? 당연히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종인 자들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음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죄의 종인 자들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갈5:1)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교회는 죄의 종에서 벗어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경험한 이들로서 세상에 그 자유를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실제로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말하는 자유가 아닌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의 종이었다가 자유를 얻은 자로서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란 더 이상 죄의 굴레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지 않으려 영적 전쟁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진의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죄의 종으로 다시는 살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죄의 종에서 벗어난 우리는 이제부터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날마다 새로운 결심을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죄의 종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지 않도록 놀랍게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됨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