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8장21절-22절 “영적 감각을 살리려면” 2021년 2월 2일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미움이 커지면 더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한 미움에 그치지 않고 살해라는 극단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개인이 아닌 집단에 의해 이루어질 때 남의 생명을 뺏는 악행은 더 쉽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특히 봉건주의 시대는 이러한 악행이 힘의 논리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회는 지금처럼 민주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계급 사회였고 힘이 곧 법인 시대였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면 법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 권력자들의 핍박을 이런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갖고 있었지만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예수를 마치 범법자처럼 취급했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예수를 잡아 감옥에 넣으려 했고 종국에는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7:30에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는 말씀과 8:20에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이 그들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리니’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간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아’ 유대 권력자들이 아무리 예수를 죽이려 해도 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가 스스로 ‘내가 가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그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고 계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예수의 운명이 아니라 ‘그들’의 운명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너희 죄 가운데 죽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경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겪을 죽음보다 죄 가운데 죽을 그들의 운명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인 무감각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예수를 죽이려는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비극적인 운명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들의 운명을 알려주어도 그들은 영적으로 아무런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는 그들의 반문은 역으로 그들의 영적 무감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드러내 줍니다. ‘너희 죄 가운데 죽는다’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을 어찌해야 할까요?  유대인들의 영적 무감각이 그들만의 문제일까요? 바울은 이것을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라고 진단했습니다. 마음의 혼미함이 예수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요? 아무리 심각한 말씀이라도 건성으로 듣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어딘가 고장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죄 가운데 죽을 것’이란 말을 들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적 감각이 병들어 있다고 여겨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영적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훈련을 한다면 우리는 이 감각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