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법정에서 증언을 할 때 진실만을 말할 것을 공개적으로 선서합니다. 거짓된 증언일 경우에 그에 따른 처벌이 있다는 사실을 공지합니다. 증언이 거짓일 경우에 누군가는 억울한 누명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증언에 있어서 진실함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진실성에 흠집을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해 “나는 세상의 빛이라”한 말의 진실성을 문제 삼았던 것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가 증언’이 과연 믿을 수 있느냐란 문제 제기였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는 세상의 빛’이라 주장한다면 그것을 신뢰할 수 있느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이것은 증언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라는 요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자가 증언’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한 그들의 공격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은 참되니”라고 재반박하셨습니다. 그들은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한다’는 이유로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진실하다고 맞선 것입니다. 이 두 주장은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것처럼 만날 지점을 찾기가 힘듭니다. 과연 어느 쪽이 맞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증언이 옳은 이유를 이렇게 제시합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자가 증언’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무지에 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함부로 예수님을 판단하는 그들의 오만함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이 구도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도를 넘는 무례한 태도를 비판하셨습니다.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아무 것도 모르면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열변을 토하는 상대를 대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겸손한 태도를 취할 때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지금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양 쪽 모두 다 자기 주장만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이 상황에서 제 삼자의 입장이 중요할까요? 예수님과 바리새인 모두 다 문제라는 양비론이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요? 우리는 어찌보면 제 삼자의 입장에서 이 장면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양 진영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요?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만약 바리새인의 입장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세상의 빛’이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간 입장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한지를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객관적인 진실이냐보다 예수님이 진실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주장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지지하느냐로 진실함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진실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그를 따를 것이냐를 결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진실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길로 걸어가면 됩니다. 어떤 반대 주장들도 우리를 흔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진실하시기에 우리는 그것을 무너뜨리는 어떤 것들과도 싸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하신 예수님을 믿기에 그것에 모든 것을 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신뢰를 얼마나 깊이 하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진실성을 깊이 신뢰한다면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