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자유가 폭력으로 변질되면 위험합니다. 싫어하는 감정이 상대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닙니다.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든 해서는 안되는 반사회적인 행동입니다. 그럼에도 힘 있는 이들은 폭력을 자유롭게 활용하곤 합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들이 행사하는 힘은 너무도 막강해서 약자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폭력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도 이런 형태의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권력을 쥔 바리새인들과 당국자들에 의해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일 뿐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공개적으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의 신앙 고백이 봇물 터지듯이 일어났습니다. 이것까지도 막고 싶었던 권력자들은 예수 따르는 이들을 ‘저주 받은 자’라고 정죄했습니다. 49절,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인권이 보장되는 우리 사회에서 이 말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이 말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의 평가를 일반 시민들이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따르면 저주받은 사람이 되기에 절대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작은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이 목소리는 비록 작지만 큰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반대했던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예수의 말을 직접 듣고 그가 행한 일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그를 판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로 심판했기에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 따르는 이들을 율법을 모르는 ‘저주 받은 자’라고 비난했던 그들이 사실은 율법을 정면으로 어겼던 것입니다. 율법 전문가들이 파렴치하게도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으면서도 율법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 집행자인 동시에 실천자임을 망각한채 오직 율법으로 심판하기에 급급했던 그들의 민낯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을 동료 바리새인인 니고데모가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과연 이 말이 효과가 있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를 향해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면서 예수와 한 편이냐고 몰아붙였습니다. 옳고 그름 이야기를 진영 논리(니편 내편으로 나누기)로 바꾸어 공격한 것입니다. 진영 논리에 빠지면 거짓된 정보도 진짜처럼 사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가 베들레헴 출신임에도 갈릴리 출신이라면서 거짓된 정보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니고데모는 작은 목소리로 진실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진실한 목소리는 비록 작지만 울림은 얼마든지 커질 수가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목소리가 비록 작았지만 바리새인의 위선을 드러내는 큰 울림이 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주류의 목소리에 얼마든지 묻힐 수 있었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렇듯이 작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빛이 납니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작은 목소리라도 낸다면 우리의 신앙은 큰 울림을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목소리를 큰 울림이 될 수 있도록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보다는 누가 더 힘이 세냐로 판단하는 세상 질서 속에서 우리는 ‘이것이 옳습니다’라고 작은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때론 곤란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고 작은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작은 소리가 큰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우리는 소망을 품고 진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