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장47절-49절 “오만함을 뚫고서” 2021년 1월 20일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오만함에는 경멸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가 많습니다. 권력과 부를 거머쥔 이들이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을 향해 오만한 자세를 취할 때 이런 경멸이 깔려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 속에 들어갈 때에도 사람의 오만함이 작동합니다. 인간 이성이 진리 판단의 기준이 되어 이성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성경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신앙을 이성으로 판단하면서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인위적으로 잘라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학의 시대에 맞게 사람의 이성으로 용납할 수 있도록 성경의 기적들을 신화로 여기는 해석이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과학의 눈으로 볼 때 성경 이야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오만한 자세가 아닐까요? 인간의 오만함은 성경에 대한 경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예수님 당시 권력과 부를 거머쥔 고위층의 사람들이 이런 오만함을 드러냈습니다. 48절, “당국자들과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란 말에서 그것이 드러납니다. 그들이 ‘우리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라고 한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를 잡으라고 보냈던 아랫사람들이 빈 손으로 돌아와서는 예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말을 했을 때에 고위층 관료들이 분노를 쏟아내면서 하는 말이 ‘우리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였습니다.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면 우리가 어찌 몰라보겠느냐’란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매우 오만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설교를 듣고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이 이 때까지 없었다’면서 감동을 받은 이들을 우습게 보는 이 태도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이런 지적인 오만함에 빠져 있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란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를 신뢰하는 것을 보고서 경멸하는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이 동정녀 탄생,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 예수를 믿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오만함은 기독교 신앙을 수용함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입니다. 47절, 바리새인들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란 말은 예수가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보는 것인데, 지금도 이런 시각에 붙들려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런 오만한 사람들 속으로 지금도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갖는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경멸하는 이들일지라도 개의치 않고 당당히 그들 속으로 들어가 진짜 실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실력은 반대하는 이들 속에서 더욱 빛이 납니다. ‘우리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의 오만한 마음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경멸하고 성경 이야기를 미신으로 폄훼해도 기독교는 그들 속에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믿는 자가 있느냐’란 말이 ‘이런 우리들이 이제는 믿는 자가 되었다’는 신앙 고백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세계 곳곳을 누비며 활약하는 진정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인간의 오만함을 뚫고 들어가 그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사람들 속에 심고 계십니다. 성령은 오늘도 사람들로 ‘우리가 이제는 믿는 자가 되었다’고 말하도록 변화시키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