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용수철은 누를수록 더 힘차게 튀어오르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진리도 억누를수록 더욱 강렬해집니다. 진실의 힘은 억압을 받을수록 생명력이 커집니다. 예수님의 진리 선포를 방해하던 유대 관료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를 억압했습니다. 하지만 억누를수록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많아지자 유대 권력자들은 부하들을 시켜 그를 잡아오게 했습니다. 힘으로 예수를 제압하려는 그들의 의도는 성공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힘 없는 대중들이 예수를 따를 뿐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그의 반대편에 서서 움직였기에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부하들이 예수를 잡아오기만 하면 모든 골치아픈 일들은 사라질 것으로 그들은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유대 권력자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를 잡으러 보냈던 부하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45절,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란 물음은 단순히 추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묻어난 것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눈 앞에서 펼쳐진 것입니다. 예수가 숨어 있었다면 모르지만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얼마든지 잡아올 수 있는 너무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책임 추궁을 받자 부하들은 너무도 의외의 답을 내놓습니다. 46절,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부하들이 예수를 잡으러 갔다가 그의 설교를 들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37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설교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서 그들의 마음이 요동친 것입니다. 상급자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위치에 있던 부하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큰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하들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상급자들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입니다. 심지어 명령에 죽고 사는 위치에 있던 부하들 자신들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물론 그들이 평소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평소 예수님의 설교를 좋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상상일 뿐 본문은 조금도 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서 그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심경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어찌보면 이들은 직무 유기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범인을 잡으러 갔다가 그와 한 편이 되었으니 당시 분위기로는 죽음까지 내놓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붙잡을 수 없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변명하지 않고 예수님을 옹호했으니 매우 위험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단순한 책임 추궁을 넘어 목숨까지 내놓을 위기에서도 예수님 편에 선 이들의 행동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이 이 때까지 없었다’는 고백 속에 신앙의 진면목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분을 인정하고 그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온갖 억측과 왜곡이 난무하는 곳에서 ‘그와 같은 분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진짜 신앙입니다. 쉽게 남의 말에 흔들려 예수님을 꺼려한다면 이런 용기 있는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이미지가 나빠져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못한다면 ‘이처럼 말하는 분을 만난 적이 없다’고 당당히 밝힐 수가 없습니다. 신앙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온실 속이 아닌 광야처럼 험한 환경에서 더욱 돋보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신앙은 우리를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