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일로 인해 유대인들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을 우습게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일 수 있느냐는 그들의 반발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강력한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가셨습니다. 특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설교는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이 설교를 듣고서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란 부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것은 비밀리에 고백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표현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신앙 고백을 했다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이 상황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유대 권력자들이 무서워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말한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견고한 바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에 금이 간 것입니다. 작은 희망의 싹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고무적인 것은 단순히 기적만 보고 예수님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설교의 힘이 실제로 사람의 마음까지 파고들었음을 보여주기에 이 장면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삐뚤어졌다해도 여전히 진리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일이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해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위험을 무릎쓰고 당당히 예수님을 인정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마음을 울리는 설교는 예수님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예수님을 구하기 보다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렇듯이 삶의 구조 자체가 크게 바뀝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왜곡이 심각하게 일어나도 흔들림없이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목소리를 뚫고 예수님을 왜곡시키는 목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음에도 사람들은 그를 갈릴리 출신이라 규정하고 사실을 왜곡시켰습니다. 이 거짓된 정보를 근거로 예수가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주장했습니다. 구약은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했기에 갈릴리 출신은 절대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각한 왜곡과 거짓 뉴스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이렇듯이 예수님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이 공존하면서 혼란이 가중될 수 있습니다. 43절,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란 상황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전하는 설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심각한 왜곡이 버젓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설교는 작은 희망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설교를 좋아하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을 얼마나 바르게 전하느냐로 판단할 때에 작은 희망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으로 가득채워지는 일은 이런 작은 희망이 점점 커질 때 가능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에 그분을 가장 사랑해야 하며 그분에 대한 올바른 설교가 항상 울려펴저야 합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설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