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장14절-16절 “설교의 권위” 2021년 1월 6일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유대인의 살해 위협 속에서 예수님은 은밀하게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성전에서 유대인들을 향해 설교를 하셨습니다. 14절,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설교하셨습니다. 다른 점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설교는 목숨을 걸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유대인들의 심장부에 들어가 설교하셨기 때문입니다. 적대적인 유대인들은 허를 찔리는 기분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을 막기 위해 공개 수배까지 내렸는데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공개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설교단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설교자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입니다. 15절,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비난한 것입니다. 배우지 못했다는 점과 글을 모른다는 점을 부각시켜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매우 비열한 방식이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설교자의 권위는 매우 중요한 신뢰의 기준이기에 이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의 설교를 신뢰할 수 있느냐란 이슈를 청중에게 던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태복음의 기록을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상설교를 들은 후에 보였던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마7:29을 보면, 복음서 저자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라고 평가합니다. 이것은 청중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서 당시 성경 교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위가 있음을 인정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서 설교하신 후에도 사람들은 비슷하게 반응했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대적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깎아내렸던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설교자의 어떤 설교도 가치가 없다는 전략이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통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우지 못한 자로 낙인을 찍은 근거로 당시 저명한 학자의 제자가 아니란 점을 든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탁월한 지식인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사회가 인정하는 학자 밑에서 배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권위가 되어 무엇을 가르쳐도 사람들이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배경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은 단정적으로 예수님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로 낙인을 찍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란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누구에게서 배웠느냐로 설교자의 권위를 규정하던 당시 사회에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르킵니다. 어떤 학자의 해석을 따르느냐로 권위를 삼았던 이들과 달리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교훈인 점을 강력히 내세우셨습니다. 가르침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두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권위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이렇게 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학자의 권위에 의존했던 당시 모든 성경 교사들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로 설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전하는 모든 설교자는 예수님의 권위에 의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냐로 설교의 권위를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날 모든 설교의 중심이어야 함은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시대의 모든 설교의 권위는 언제나 예수님에게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의존한 설교가 전해질 때에 교회는 올바른 신앙 위에 서 있을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