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님께 실망해서 그의 곁을 떠난 수많은 제자들 속에서 베드로는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물질적인 욕심, 권력에 대한 야망, 출세에 대한 욕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신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으시고 매우 심각한 경고성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이것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선택이 완벽하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일까요? 예수님도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낸 것일까요? 선택을 받았어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이 선택할 당시에는 괜찮았는데 도중에 마귀로 변질된 것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제자 중의 한 사람은 마귀였을까요? 사람을 마귀라고 지칭하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이런 질문들이 쏟아질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강력합니다. 위의 질문들 중 어떤 것은 쉽게 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신학적으로 논쟁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입니다. 신앙 고백은 칭찬을 듣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앙 고백이 만병통치약처럼 작용하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 고백이 아무리 훌륭해도 언제든지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선택받은 제자들 중에 마귀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경고가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에 대해 본문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라고 구체적으로 실명을 공개합니다. 심지어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고 예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마귀 편에 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마음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으면서 몸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이러한 이중성을 우리는 얼마든지 비난할 수가 있습니다. 배은망덕하게도 이렇게 사악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느냐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깊은 회의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거두어 키워도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못된 성품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 강하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선택 받고 신앙 고백을 훌륭하게 해도 얼마든지 마귀의 편에 설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라는 이 울림이 우리에게 작게 들린다면 우리의 영성에 이미 빨간불이 켜졌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울림이 크게 들린다면 우리는 지금 깨어 있는 신앙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성장과 쇠퇴를 거치면서 형성됩니다. 잘 자라고 있는 듯이 보이다가 어느 순간 확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제는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확신했다가도 갑자기 의심에 사로잡혀 뿌리까지 흔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 생활에 깊은 회의가 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에 은혜를 받아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지고 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렇듯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여러 굴곡을 경험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안주하거나 불안해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깨우는 자각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깨울 수 있는 신앙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