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동문서답’은 질문에 대해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곤란한 질문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이런 태도를 취할 수도 있지만 질문의 정확한 뜻을 몰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만족스럽지 못한 답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겠느냐’였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적어도 오천 명 이상인 상황에서 이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충분한 떡을 먹일 수 있는 방안을 물어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답은 몰라도 예수님에게는 어떤 해답이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어야 했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제자인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시 노동자가 적어도 200일을 일한 비용으로 떡을 사더라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답을 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도 많은 떡을 어디서 구입할 것이며, 그것을 구입할 돈이 어디에 있느냐는 냉소적인 답을 제자들이 한 것입니다.
빌립 옆에 있던 또 다른 제자인 안드레가 나섭니다. 9절에서 그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빌립과는 달리 자신들이 갖고 있던 식량을 예수님 앞에 내놓으면서 이것이 가능한 일이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이같은 행동에는 사람들에게 떡을 제공하려는 예수님의 계획을 만류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해결 방안도 없는데 괜히 사람들에게 먹을 음식을 줄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헛된 희망을 품지 않도록 예수님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이렇게도 제자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시각으로 볼 때 이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더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무조건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이것만은 할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그들의 속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이해와 신뢰가 더 깊어져야 하는데 제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상황과 처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형편에 따라 판단하려는 습성에 젖어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경험과 실력을 기준으로 삼으면 안됩니다. 우리 입장과 처지만을 고집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신앙적인 요소도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따르는 대상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감정과 환경, 사고방식만을 내세운다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을 때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도 주님을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마다 원망과 불평 대신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수님이라면 뭔가 해답을 갖고 계실 것이란 기대와 신뢰를 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으로서 불가능할 것 같은 현실의 벽 앞에서 절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