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6장67절-69절 “떠나지 않는 이유” 2020년 12월 30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만남과 헤어짐은 모든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만날 때의 즐거움도 있지만 불행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헤어짐이 슬픔을 주지만 행복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만남은 축복이지만 헤어짐은 비극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는 것이 행복입니다. 중간에 끊어지거나 완전히 헤어지는 것은 불행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것을 그리 크게 생각하지 않는 듯 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행복을 느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루하고 따분해질 뿐 아니라 귀찮고 거추장스러워진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나빠지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좋을 줄 알았는데 비난과 모욕이 쏟아지자 관계를 끊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상당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고 다시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더 이상 함께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고 말입니다. 어떤 뉘앙스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문맥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떠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매달리는 심정으로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의 본심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앞장서서 ‘절대 가지 않습니다’란 답을 내놓습니다. 예수님 곁을 떠날 일이 없다는 확답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답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체험한 수많은 기적들을 언급하지 않고 ‘영생의 말씀’을 콕 집어 답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기에 떠나지 않겠다는 이 고백을 가볍게 여기면 안됩니다. 이것은 교육을 받아서 앵무새처럼 정답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신앙 고백입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고 한 것처럼 체험적 신앙 고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많은 수의 제자들이 예수님 곁을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도 동요하는 분위기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무척 귀한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의리로 한 말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터운 신뢰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불빛이라도 크게 빛나듯이 한 마디의 말일지라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진솔한 신앙 고백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얼마든지 다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신 줄 믿고 알았다’고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신앙이 있다면 조금 손해보고 희생해도 감수할 수가 있습니다. 당장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도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려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교회를 폄훼해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진실한 신앙을 지키려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좋은 것이 뭐가 있냐란 소리를 들어도 우리는 주님에 대한 신뢰를 더욱 견고히 해야 합니다.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비난의 표적이 되고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시대일수록 이 질문은 더욱 자주 들려져야 합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란 질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를 매순간 돌아보게 만드는 보약같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에게 있음을 확신하기에 그분을 절대 떠날 수 없다고 우리는 오늘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