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오천 명을 한 사람의 식량으로 먹인 사건은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 당시 유대인들입니다. 눈 앞에서 일어났기에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가난과 기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시자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요셉의 아들인 것을 다 아는데 자꾸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할 뿐 아니라 이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인 자신의 살을 먹어야 한다는 황당한 말까지 서슴없이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이제는 자신의 살을 먹어야 영생한다고 하니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예수님의 주장에 벌집을 쑤셔놓은 듯 어수선해졌습니다. 본문에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란 묘사는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투다’란 ‘싸움을 하다’는 뜻이 아니라 격렬한 논쟁을 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에 거칠게 반발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유는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지금 예수님이 버젓이 주장한 것에 그들이 화를 낸 것입니다. 너무 황당하고 상식에 어긋난 말을 들을 때에는 그냥 무시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자신들이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한다고 한다면 불쾌할 뿐 아니라 강한 반감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란 분노의 감정을 예수님에게 쏟아냈던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유대인들의 분노는 정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이 그런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오는 자’와 ‘나를 믿는 자’가 그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것을 공격의 빌미로 삼았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은 예수님을 더 이상 대화의 상대로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이 무엇이냐란 질문을 던져봐야 했는데 그럴 가치가 없다고 단정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세상의 가장 불행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때 세상이 자주 보이는 반응으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공격입니다. 세상은 항상 이런 식으로 기독교를 비상식적인 것으로 몰아세워왔습니다. 기독교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자꾸 주장한다고 세상은 비난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란 공격으로 세상은 기독교를 비상식적인 집단으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세상의 공격 앞에서도 꿋꿋히 이겨왔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일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생명처럼 여기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공격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상식을 무시하지 않지만 상식을 뛰어넘는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우리는 지치지 않고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반응할 때 우리는 의기소침해지면 안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확실하기에 우리는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사람들과 그 생명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